2007.07.15. 갈 6:7-16
갈라디아의 상황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세 주일 전 설교본문과 같은 갈라디아서입니다. 그때의 본문은 갈 2:15-21절이었고, 오늘은 갈 6:7-16절입니다. 이 두 본문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것은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세 주일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갈라디아서가 기록된 기원후 50-55년경의 기독교는 아직 유대교에서 독립한 상태가 아닙니다. 교회와 유대교의 관계가 별로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유대교의 전통인 율법과 할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반대하는 대표자는 바울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바로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갈라디아는 어떤 한 도시가 아니라 소아시아 중앙지역을 가리킵니다. 그곳에는 바울이 개척한 여러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교회에서 율법과 할례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복음을 전하기 그 지역을 떠났습니다. 얼마 뒤에 율법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 나타나서 바울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갈라디아 교인들은 처음에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겠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중에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의 기분이 어땠을는지는 불을 보듯 훤합니다. 오늘의 상황과 비교하면 어떤 사람이 교회를 개척한 뒤 사정이 있어서 떠났는데 그 교회가 신천지 이단에 빠졌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경우와 비슷합니다.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에 넘어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무식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나름으로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잘 믿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도 예수님을 믿는 건 똑같았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벌어진 문제의 발단은 부도덕한 행위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전한 예수님을 믿어도 갈라디아 교회에 이런 인간적인 잘못들이 계속 나타났습니다. 이때 율법주의자들이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게 아니다. 봐라. 우리에게 이렇게 죄가 나타나지 않느냐. 그러니 우리는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 우리가 열심히 노력해서 종교적으로 교양을 갖추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을 설득하고 회유했습니다. 그들은 세련된 사람들입니다. 인간적으로 고상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조상인 유대인들은 그런 노력으로 수많은 율법을 만들었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으며, 이방민족과 구별되는 할례의 전통을 이루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갈라디아 신자들이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에 설득 당했다는 건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들에게 복음을 가르친 바울은 그곳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부도덕한 일들이 자꾸 벌어집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이런 순간에 율법이 바로 교회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말을 들었으니, 어찌 따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상황은 오늘도 비슷합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지 잘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과 할례를 다시 따라가는 식입니다. 교회의 법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지요? 헌금으로부터 시작해서 금주금연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인이 지켜야할 법들은 곧 2천 년 전 갈라디아 교인들이 당면했던 율법이나 할례와 똑같습니다. 그것은 곧 사람들이 종교적 업적을 구원의 길로 여기는 것입니다. 조금 건전한 사람들은 두 가지 다 잘하면 좋은 게 아니냐 하고 생각할 겁니다. 법도 잘 지키고 믿음의 본질도 잘 지키면 된다고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술 담배 일절 하지 않고, 십일조 잘 내며, 교회 봉사 잘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으면 된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와서 바울의 가르침에 반대했던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되 율법과 할례도 지키자는 것입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매력적이고 현실적이었습니다. 결국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차츰 율법과 할례까지 겸해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율법의 한계
바울도 원래는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골수 바리새파였습니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철저하게 율법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이제 그 율법종교로부터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갈라디아 신자들이 율법과 할례를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억장이 무너졌겠지요. 그는 율법의 본질이 무엇인지 약간 풍자적인 방식으로 11-13절에서 설명합니다. 이게 갈라디아서의 결론입니다. 그가 ‘큰 글자’로 쓴다는 것은 강조한다는 뜻이겠지요. 바울이 볼 때 율법과 할례는 종교적 ‘겉치레’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려고 그것을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강요합니다.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만 유대교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요.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13절 말씀을 제가 다시 읽겠습니다. “실상 할례를 받은 사람들도 자신은 율법을 지키지 않고 다만 여러분에게 외형적인 할례를 시켰다는 것을 자랑하려고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할례주의자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은 사람이 근본적으로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는 지키지도 못할 법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들은 억지로 율법을 지켜보려고 노력하겠지요. 율법을 조금 더 잘 지킨 사람은 우쭐하고, 못 지킨 사람은 주눅이 들겠지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에서도 이런 상황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십일조, 금식, 사회봉사를 자랑하는 기도를 올렸고, 세리는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적으로 살지 못한 세리를 오히려 칭찬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인간이 잘못되었고, 세리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율법중심의 삶이 만들어내는 파괴적인 현상을 지적하는 것뿐입니다. 요즘도 새벽기도회에 빠지지 않고 잘 나오는 사람과 가끔 주일도 빠지는 사람이 교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돌아보십시오. 내신과 수능으로 학생들을 평가하는 것도 역시 율법중심의 질서입니다. 이런 질서에는 경쟁이 최고의 가치가 되고 맙니다. 이 세상이야 그렇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생명사건에 집중해야 할 교회마저 이런 식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구원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설명하다보면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지금 저는 율법이 근본적으로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윤리와 도덕은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은 한 인간, 한 공동체, 한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울타리입니다. 법, 윤리, 도덕이 없으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예컨대 학교에는 학칙이 있습니다. 일 년에 몇 번 결석하면 상급학년으로 올라가지 못합니다. 시험 점수가 몇 점 이하면 낙제합니다. 노력을 많이 한 학생에게는 상장도 줍니다. 이런 게 모두 학칙과 율법입니다. 이걸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교회의 법과 질서를 잘 지켜서 신앙생활 하는 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율법과 율법주의를 구분해서 보아야 합니다. 율법은 선하고 필요하지만, 그것이 절대화하면 율법주의가 됩니다. 율법을 얼마나 잘 지켰나 하는 것으로만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런데 율법과 율법주의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바르게 사는 것과 바르게 사는 것을 자랑하는 것을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 저 사람이 기도를 정말 정직하게 잘 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자기가 기도를 많이 하는 것 자체에 만족하고 있는 것인지 구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율법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은 순식간에 율법주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율법의 한계이면서 본질이기도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아무리 율법주의에 문제가 있다하더라도 율법을 지키게 하는 게 그나마 덜 악한 공동체를 만드는 길인가요? 그것은 바로 갈라디아에서 바울을 반대한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그리고 오늘 수많은 목회자들의 생각이기도 합니다. 억지로 전도하게 만들고, 억지로 헌금하게 만들어서라도 좋은 신자를 만들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이 그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율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공동체로 남아야 할까요? 이런 입장이 바로 바울의 가르침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 폐기론자가 아닙니다. 그는 율법의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할 뿐이지 인간의 선한 행위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본문 7-10절에서 바울은 율법의 문제를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성령론적인 해석입니다. 9,10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선을 행합시다. 꾸준히 계속하노라면 거둘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합시다. 믿는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선을 꾸준히 행하라는 말은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율법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노력을 강조하는 게 아닙니다. 8절에서 바울은 “성령에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둔다.”고 말합니다. 그는 선을 인간의 노력과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결과라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억지로 착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우선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면 그는 낙심하지 않고 꾸준히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율법주의에 의한 선과 성령에 의한 선이 어떻게 다른지, 아무래도 학생의 경우를 들어서 설명해야겠군요. 여기 두 학생이 있습니다. 한 학생은 다른 학생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합니다. 다른 한 학생은 공부 자체가 놓아서 열심히 공부합니다. 현실에서는 아마 공부 자체를 좋아하는 학생을 찾아보기 힘들겠지요. 그러나 신앙생활에서는 그게 분명해야 합니다. 공부 자체가 좋은 학생이 곧 성령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잘난 척하지도 않습니다. 자기만족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생산해내지 못하는 성령만이 이 사람의 삶을 끌어갑니다. 우리도 정말 이렇게 살고 싶습니다. 내가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이루어가는 게 아니라 흡사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나는 새들처럼 성령의 인도하심에 온전히 자신을 맡기면서 꾸준히 선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화끈한 성령의 불을 받아야 할까요? 방언을 받아야 할까요? 저는 잘 모릅니다. 바울의 가르침만 여러분에게 전하겠습니다.
성령과 예수의 십자가
율법주의의 특징은 ‘자랑’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랑입니다. 자기의 기도, 자기의 전도, 자기의 비전이 자랑거리입니다.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자기의(義)라고 합니다. 겉으로는 아주 순수하고 이타적이고 열정적으로 보여도 그 내부에는 ‘자기’가 가득합니다. 이와 달리 바울은 자랑할 게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14a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바울의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그가 이룬 것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미 그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 3:7) 하나의 예외만 있습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것만이 자랑입니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바울의 이 고백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와 닿습니까? 쉽지 않을 겁니다. 사람은 자기를 우주의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아주 강합니다. 모두가 연극의 주인공처럼, 공주와 왕자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자기의 것만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의 십자가는 공허하게 들립니다. 겉으로는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 같아도 그것마저 자기연민이며, 그것마저 자기의(義)입니다.
바울의 뒤이은 진술을 들어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바울은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다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바울은 율법주의와 투쟁하는 중입니다. 세상에서 얻으려는 모든 업적을 단절해낸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다면 당연히 율법을 통한 구원과는 단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 바로 성령의 경험입니다. 바로 이 사건에서 여러분은 참된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세상의 업적의(義)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자유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로 인해 주어지는 그 자유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이런 성령의 자유를 맛본 사람은 결코 낙심하는 법 없이 꾸준히 선을 행합니다. 이럴 때만 인간의 선한 행위는 의미가 있으며, 이럴 때만 인간의 선한 행위는 사람을 파괴하지 않고 살립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십자가만이 나의 자랑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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