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춤과 높임의 역설
마 23:1-12, 창조절 열 번째 주일, 2017년 11월5일
1.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8.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1.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마태복음 23장은 전체 28장 가운데서 유별납니다. 마태복음만이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도 이런 대목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예수님이 아주 격한 어조로 어떤 이들을 비판합니다. 이것만 따로 떼어서 본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특히 13절부터 ‘화가 있으라.’는 저주가 눈길을 끕니다. 일곱 번이나 반복됩니다. 이 표현은 마 5:3절 이하에 나오는 소위 ‘팔복’과 구조가 비슷합니다. 팔복에서는 복이 나오고, 여기 마 23장에서는 화가 나옵니다. 팔복에서는 ‘어떤 이들’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고 표현되어 있는 반면에 여기서는 ‘당신들’에게 화가 미칠 것이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 23장이 훨씬 강한 표현입니다. 그 중에 두 대목만 확인하겠습니다. 13절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을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이고, 25절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입니다. 예수님은 33절에서 거의 막말 수준의 말씀을 하십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도저히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의 말씀이 23장 전체를 뒤덮고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여기서 예수님에 의해서 지목당한 이들은 두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는 서기관이고 다른 하나는 바리새인입니다. 서기관은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신학자, 대학 교수, 판사와 변호사 등입니다. 그들은 종교와 사회의 규범을 세워가는 일을 했습니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 특별히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럴만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대다수가 문맹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글자를 마음대로 다룰 줄 아는 서기관은 범접하기 어려운 대상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실제의 삶에서 실천하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순수하게 하나님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누가 봐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콕 집어서 모욕감을 느낄 정도로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태도는 어색하게 보입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알고 있는 예수님은 웬만해서 다른 이들을 비판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제자들을 부르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먹고 마시면서 사귀는 일만 해도 바쁘기에 다른 사람을 굳이 비판하는 일은 예수님에게 별로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두 이런 가혹한 비판을 받아야 할 정도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 중에서도 반듯하게 율법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모두가 인격 파탄자인 것처럼 비판하신 걸까요?
이 문제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사람이 살던 시대를 배경으로 읽어야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기원후 30년 즈음에 끝났습니다. 그를 추종하던 제자들과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을 부활 생명으로 경험하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자기들끼리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대다수가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유대교 방식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이 유대 기독교인들입니다. 유대와 로마의 전쟁은 기원후 70년에 끝났습니다. 예루살렘은 초토화되었습니다. 성전도 무너졌습니다. 유대교는 더 이상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어 율법 중심의 종교로 탈바꿈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이들이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유대교와 어중간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유대 기독교를 향해서 율법을 강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유대 기독교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요구하는 율법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그들과 결별하고 자신들만의 독자 노선을 걸을 것인지를 결정해야만 했습니다. 입장이 매우 난처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입장은 1517년 보름스(Worms) 제국의회에 호출당한 루터가 ‘당신의 책과 주장을 철회할 것인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말하라.’는 종교재판관의 요구 앞에 선 것과 비슷합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오늘 본문 23장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신앙과 태도는 우리의 길이 아니라고 선포했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잘못되었기에 그걸 반대하는 그동안 펼친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똑 부러지게 주장한 루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결별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무턱대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비난한 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가리키고 있는 그들의 문제는 대략 세 가지입니다. 첫째, 그들은 말만 하고 실천이 없습니다(3b절). 이게 율법 전문가들의 한계입니다. 율법을 말로 설명하기는 쉽지만 그대로 살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요즘 기독교인들도 그런 자조 섞인 말을 자주 합니다. 신앙과 삶이 분리되었다고 말입니다. 선생들에게도 이런 현상이 자주 나타납니다.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자기는 별로 공부하지 않습니다.
둘째, 그들은 무거운 짐을 남에게만 맡기고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고 하지 않습니다(4절). 그들도 물론 짐을 지려는 시늉은 할 겁니다. 또는 다른 이들이 볼 때 짐을 지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나름으로 진정성 있게 시작할지 몰라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으로 사는데 타성에 젖으면 무거운 짐은 아래 사람에게 맡기는 걸 당연하게 여깁니다. 목사들에게 이런 위험성이 높습니다. 천국에는 목사의 입만 간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습니다.
셋째, 그들은 자신을 남에게 돋보이게 하는 일에 매달립니다. 이게 가장 심각한 문제로 보입니다. 그 내용이 5-7절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경문 띠’를 넓게 하고, 옷 술을 길게 합니다. 경문 띠는 성구를 넣은 상자이고 옷 술은 옷단에 다는 술입니다. 이런 복장은 어디를 가든지 눈에 확 드러납니다.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들에게 랍비라 불리는 걸 좋아합니다. 한 마디로 위선적이라는 겁니다.
신앙과 위선
신앙생활이 위선에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기독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이었던 사람들이 교회의 신자가 되기도 하고, 일반 신자들 중에서도 종교적 위선에 떨어지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그걸 마태복음 기자도 알고 있습니다. 8절부터 자기가 속한 교회 신자들에게 말을 합니다. 세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8절). 왜냐하면 랍비, 즉 선생은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9절). 왜냐하면 아버지는 하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혈육의 아버지라기보다는 스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셋째, 지도자라는 말을 듣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지도자는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입니다(10절). 랍비, 아버지, 지도자는 모두 다른 이들보다 윗자리를 차지하는 이들입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사회 지도층 인사들입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일단 이런 말들은 높아지려는 우리의 본성에 거스르는 겁니다. 높은 자리에 오를 수만 있다면 그 어떤 희생도 다 감당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게 세상살이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려면 세상살이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이런 말씀을 ‘그러려니’ 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니 기억하고 있어야겠지만 현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간주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공자 왈’로 이런 말씀을 하신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면 이 가르침에 어떤 능력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 자체가 힘들기는 합니다. 그래도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성서가 가리키는 새로운 세상살이가 눈에 들어올 겁니다. 본문 11,12절을 다시 선입관 없이 들어보십시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솔직히 말해서 이런 말이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설득력이 있을까요?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받아들이기는 싫다고 생각할 겁니다. 여기 두 여자가 있다고 합시다. 한 여자는 돈이 많아서 집안일을 파출부에게 맡깁니다. 다른 한 여자는 형편이 어려워서 파출부로 삽니다. 주인 여자는 파출부에게 집안일을 맡겨놓고 동창 모임에 나가서 즐겁게 놀고 있습니다. 파출부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고 주인 여자의 집에 와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반찬을 만듭니다. 어느 쪽의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여기 두 목사가 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큰 교회의 담임 목사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 교회의 부목사입니다. 목사들에게 선택하라고 하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세속이든지 교회이든지 가릴 것 없이 큰 자가 되려고 하고 높은 자가 되려고 합니다. 이걸 나무랄 수도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늘 이런 관점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공허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영혼을 자유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 하나님의 통치는 지식이 많고 적음이나 재산의 많고 적음에 전혀 상관없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주어집니다. 거기서 자유와 해방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인 10월31일은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루터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영혼이 자유로워는 걸 경험했습니다. 그 이후로 그에게 다른 것들은 사소해졌습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나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권력이 가장 높았던 교황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의 영혼이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낮은 자리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진다는 것은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감으로써 가장 높은 자리에 이르는 경험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모든 사람들에게 수치의 대상이었던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바로 그 예수님을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땅의 비천한 몸으로 오셨다고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오셨다는 사실로부터 기독교 신앙은 시작됩니다. 루터는 예수님이 지옥에 계시다면 자신도 지옥을 택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이 제공하는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이야말로 구원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은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감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다시 세상의 방식으로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느냐 하는 것에 자신의 삶을 다 소진시킵니다.
이 문제를 좀더 실질적으로 설명해야겠습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의 시작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이었습니다. 위선은 속과 겉이 다른 겁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려면 속과 겉이 달라야 합니다. 실제로는 선생 능력이 없는데도 일단 선생 노릇을 해야 하니 위선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는 목사로서의 내공이 없는데도 일단 목사가 되었으니 위선적으로 목사 노릇을 해야 합니다. 위선은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남을 속이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영혼을 속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높은 자리는 이처럼 우리를 위선적으로 만듭니다.
높은 자리에 오를만한 자격과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런 말이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누가 선생이 될 수 있으며, 누가 목사가 될 수 있으며, 누가 대통령이 될 수 있으며, 누가 의사와 변호사가 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십시오. 여러분의 문제는 여러분이 판단할 문제입니다. 목사로서 저는 목사 자격과 능력이 저에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아는 것도 아니고, 알고 있는 것마저 신자들에게 알아듣도록 설명할 자신도 없고, 여러 가지 삶의 태도에서도 목사로서 부끄러운 게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랍비가 될 생각을 말라고, 아버지가 될 생각을 말라고, 지도자가 될 생각을 말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을 높이는 일에 마음을 쏟습니다. 인정받지 못하면 불편해합니다. 그게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위선입니다. 결국 영혼이 궁핍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시를 쓰고, 정치를 하고, 목회를 감당하고, 재판을 하느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마땅히 세상에서 중요한 일은 누군가 감당해야 합니다. 담임 목사로서 여러분들이 사회의 좋은 위치에서 일하면 좋겠습니다. 문제는 자기를 높이려는 태도입니다. 자기가 맡은 일을 최선으로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높이는 것에만 마음을 둡니다. 자기를 높이려고 점점 더 위선으로 떨어집니다. 자신의 지위를 잃을까, 노심초사 합니다. 본문에서 묘사되었듯이 ‘경문 띠’를 넓게 하고 ‘옷 술’을 길게 하는 일에 마음을 씁니다. 하나님의 통치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불행한 거지요. 거꾸로 자신이 크게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순전히 겸손하게 섬기는 데에 집중하면 영혼이 풍요로워집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는 말씀이 가리키는 삶의 역설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게 잘 안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인정할 것입니다. 이미 마음이 저 높은 데로 기울어졌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분열이 계속됩니다. 죽을 때까지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알게 모르게 자신 안에서 크고 작은 위선을 목도하게 될 겁니다. 우리 내면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은 따로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부활 생명으로 변화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최선입니다.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사는 경험이 깊어지면, 즉 믿음이 깊어지면 자신에 대한 걱정과 염려로부터 해방되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것이 사소해지기 때문에 저절로 자신을 낮추게 될 것입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 평화와 안식을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가 낮아지고 낮아져도, 아니 낮아져야만 결국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 여러분은 높아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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