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1:37-44)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마음이 통하는 것을 <이심전심>이라고 합니다. 똑같은 말인데도 서로 생각하는 게 다를 수 있기도 하고 같을 수 있다는 게 참으로 이상하지요? "가을이 왔습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합니까? 적금을 타겠구나. 밥맛이 나겠네. 옷 한벌 사야지. 설악산 한번 갔다 와야지. 인생의 겨울을 준비해야지. 어느 쪽에서 우리의 마음이 통합니까?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면 그것 자체가 즐겁기 때문에 그런 만남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당연히 이런 저런 이유로 인연이 닿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같은 직장에서 같은 일을 한다거나 또는 가족이나 그런 종류의 관계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무언가 통하는 게 많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보다 교회 안의 사람들끼리 통하는 게 있듯이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일이 늘 이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그렇게 가까운 사람들끼리 통하지 않는 게 훨씬 많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늘 함께 살아왔던 예수님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서로 통한다거나, 또는 통하지 않는다는 현상을 어떤 인간관계의 친소에 따라서 평가할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있다고 해서 우리 모두의 마음이 통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가장 예수님을 잘 이해해야할 바리새인이 오히려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종교 전문가가 종교 자체인 예수님과 통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는 말인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본문 말씀에서 전개된 상황은 37,38절, 단 두절로 아주 간단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어떤 바래새인이 예수님을 점심 식사에 초대했는데 예수님이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걸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 뒤의 말씀인 39-44절은 이 바리새인의 태도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입니다. 이미 7장36절 이하에서도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식사 초대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이 바리새인과 예수님 사이에서 죄와 의로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오늘 본문에서도 역시 정결과 부정에 대한 논란이 일어납니다. 손님을 초대해 놓고 엉뚱한 마음을 품었다는 말이 됩니다. 겉으로는 웃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살기를 품는 게 인간일까요? 누가 식사 대접한다고 해서 모두 선의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복잡한 이해타산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이 바리새인들이 불순한 의도를 갖고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편안한 식사 자리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이야 원래 예의가 바른 사람들이라서 그 당시 명망을 얻어가던 훌륭한 선생님을 자기 집에 초대하는 걸 대단한 영광이거나, 그게 아니라도 최소한 체면치례 정도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밥을 먹기 전에 반드시 행해야 할 정결의식을 예수님이 생략했습니다. 손을 씻지 않고 식탁에 앉았습니다. 이 행동이 바리새인에게는 아주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어느 정도로 이상하게 보였는지는 성서에 묘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단순히 자신과 입장이 다르다고만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바리새인인 내 집에 들어와서 몰상식하게 처신하는 예수를 고약한 사람으로 보았을까요? 그래서 결국 그의 기분이 상했을까요? 39-44절에 예수님이 과격하게 이 사람을 비판하는 것을 보면 바리새인의 반응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의 심리 상태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긴 하지만 접어두기로 하고, 그가 예수님을 이상하게 생각했다는 사실은 바로 예수님의 행동이 그에게 낯익은 게 아니라 반대로 낯설었다는 그 한 가지 점만은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늘 자기에게 낯선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습관이 있으니까요.
평소에 잘 알고 지냈기 때문에 식사 초대까지 한 예수님을 바리새인이 낯설게 본 이유를 성서는 아주 간단하게 한 문장으로 설명합니다.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38절). 공동번역에 보면 이 바리새인이 놀랐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행동이 과연 그렇게 이상한 일이고, 놀랄만한 일인가요?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만은 그랬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세상을 보는 눈이 없다거나 성품이 비뚤어진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모르긴해도 그들은 상당히 세련된, 교양이 넘치는, 합리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에게 낯선 것을 용납할 수 있는 준비가, 더 나아가 낯선 것을 이해해 보려는 준비가 전혀 없었습니다. 2천년 전 바리새인들만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들도 사실상 자기의 기준으로만 남을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우리와 다르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깊이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이 본문 말씀을 읽는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문제는 다른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우리 기독교인의 삶도 낯설게 보이는가 하는 점입니다. 바리새인의 눈에 예수님의 행동이 낯설었듯이, 우리의 행동도 역시 이 시대에 낯설게 다가갑니까? 아니면 우리를 전혀 낯설어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들은 세상에서 낯설기보다는 훨씬 익숙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똑같이 좋아하고, 그들이 하는 방식으로 똑같이 경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물로 손을 씻으면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비누로 닦습니다. 더 깨끗이, 더 많이, 더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처신과 세계관이 이 세상에서 하나도 낯설게 보이지 않는다면 아마 우리의 기독교적 삶은 이미 죽은 것과 똑같습니다. 모든 게 똑같으면서 죽어서 천당가겠다는 생각만 다르다고 한다면 이건 자기 기만이나 욕심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게 낯설게 보이는 게 될까요? 오늘 예수님은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혔습니다. 이런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죄인들과 격의 없이 지낸다거나 먹고 마시는 일에 별로 가리는 게 없다는 것, 등등이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낯선 행동이었습니다. 오늘 말씀대로 우리 기독교인은 우선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은 없겠지요? 이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우리를 내맡기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때에 따라서 이 세상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아마 그런 경우가 훨씬 많겠지요. 기독교인이 공연히 심술부리듯이 세상과 마찰을 일으키는 게 좋은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무조건 따라가면 안 됩니다. 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손을 씻고 식탁에 앉았는데 예수님은 손을 씻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손을 씻지 않았는지 무심코 그랬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는 분명히 세상의 요구에 그저 순응하면서 살아간 게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에서 아주 작은 예를 들어볼까요? 모두가 우리의 군사력을 증강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때 비폭력이나 비무장을 주장하는 것이 그런 것일지 모릅니다. 모두가 자녀 교육을 출세지향적으로 생각할 때 그게 아니라 의미있는 삶에서 모색하는 태도가 그런 것일지 모릅니다.
여기서 저는 어떤 선택이 바로 신앙적인 것인가를, 어떤 것이 옳고 그른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세상의 요구에 무조건 적응하며 사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점을, 그래서 세상이 우리를 낯설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그 당시에 손을 씻는 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습니다. 손 씻는 게 위생학적으로도 좋은 일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바리새인과 돈독한 관계를 맺어두는 게 현명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대도 예수님은 <삐딱>한 사람처럼 굴었습니다. 더군다나 자기를 낯설게 보는 바리새인을 향해서 아주 모욕을 느낄 정도로 책망했습니다. "평토장한 무덤" 같다고 했습니다. 대충 넘어가도 누가 뭐라할 사람이 없는대도 그렇게 낯선, 이상한 행동을 취했습니다. 그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피치못할 사정이 있었습니까? 성격 문제인가요? 정의감에 불탔나요? 이렇게 낯설게 처신하게 된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낯섬의 출처>에 대한 질문입니다.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님의 책망인 39-44절의 논조는 아주 명확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만 하나님을 따르는 것같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것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닦아놓지만 마음 속은 탐욕과 악이 가득하다고 했습니다. 세련된 종교의식은 잘도 따라하지만 의와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합니다"(43). 위선에 빠진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파헤치셨습니다. 인간만을 바라보면서 살게되면 우리는 늘 이런 상태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이라고하는 어떤 인간적 결격 사유때문이 아니라 그 어떤 학문, 예술, 사업, 정치도 인간학에 머물게 되면 외면의 그럴듯한 모습을 치장하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모두가 인사받는 일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우리가 사회의 지도층이 되려고 그렇게 안간힘을 쓰는 이유도 역시 남에게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서, 결국은 인사받기 위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다른 세상의 일들은 일단 접어두고 우리 종교 세계만 보더라도 이런 일들은 많이 일어납니다. 굳이 여러분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일들입니다만, 각 교단의 총회때가 되면 총회장이 되기 위해서 돈을 쓰는 인사들이 적지 않습니다. 대형 교회의 목사로 가려는 이유가 하나님의 일을 효과적으로 해보겠다는 외면적 이유가 없지 않습니다만, 실상은 남에게 자기를 깨끗하고 능력있게 보이려는 욕망도 강하게 작용합니다. 이런 욕망이 겉으로는 아주 깨끗한 그릇처럼 보입니다. 흡사 바리새인들의 손씻는 행위처럼 매우 합리적이고 교양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이 교양이고 지식이고 윤리, 도덕, 체면, 능력이기도 합니다. 이 사회를 유지해나가고 있는 그런 것들은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것들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런 인간적인 노력이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될른지 아주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종교의식과 교양의 내면에 숨어 있는 인간의 자기 집착과 그 한계를 보았습니다. 즉 인간적인 방식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이 바리새인들에게 낯설게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예수님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기만 하면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이 해결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따르려면 인간적인 방식으로 성취해보려는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혀 다른 근원인 하나님만을 의지해서 살았습니다. 그게 곧 낯섬의 출처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용어로 말하면 하나님만을 믿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이 낯설게 보였듯이 하나님은 낯섬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곧 이런 낯섬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래서 구약에는 이 하나님을 거룩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낯선 존재는 거룩한 분입니다.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은 신을 벗어야 합니다. 바울은 다매섹을 가다가 눈부신 빛을 경험했습니다. 아주 낯선 경험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하나님을 낯설게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저 사랑이 많으신 분, 우리를 구원해 주실 분, 축복해주시는 분이라고 알거나 믿을 뿐이지 우리를 새로운 생명의 충격으로 몰아넣은 낯선 분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종의 신앙의 <매너리즘>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을 새롭게, 늘 새롭게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매일 아무 생각없이 밥을 먹거나 나무를 보듯이 하나님을 늘 그런 식으로만 생각하고 맙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인간의 생각 속에 갇히지 않는 분입니다. 그 어떤 신학적 진술로도 하나님을 모두 표현해낼 수 없습니다. 바울도 부분적으로만 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어 오시기 때문에 그분을 경험하려면 자기의 굳어진 생각을 일단 접어두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자기의 고정관념에 완전히 묶여있기 때문에 이런 하나님 앞에서 당황하거나 외면해버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사물이 얼마나 우리에게 낯선지 의식하지 못하고 삽니다. 어제도 보았고 오늘도 보았으며, 내일도 보게 될 이 꽃, 태양, 강은 너무나 당연하게 그곳에 있어야 된다고 단정하고 살아갑니다. 그게 그런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이 생명형식이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늘 이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런 생명형식만이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전혀 다른 생명형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흡사 씨앗이 꽃이라는 전혀 다른 존재방식을 그 안에 숨기고 있듯이 오늘 우리의 이런 지상적 방식과 전혀 다른 부활의 생명형식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부활의 경험은 참으로 낯선 것입니다. 그 생명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게 아닌,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독특한 생명형식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잠시 이 땅에서 이런 방식으로 부대끼며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바리새인이 예수님에게 느꼈던 낯섬은 경우에 따라서 진리를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그들은 그것을 놓쳤습니다. 율법과 교양으로 구원받을 것으로 생각했던 그들의 고정관념이 그 율법과 교양의 근원인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린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자기 삶의 상투성에 빠지지 말고 생명의 힘 앞에서 낯설어하고 놀라워하도록, 그래서 그 근원인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도록 기회를 주시고 있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은 결국 인사받는 일에만 목표를 두는 이 세상의 방식과 다르게, 낯설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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