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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아라! (막 1 : 40 – 45)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yBokVtkZc04?si=Znbg5QNjqWNoKqp9

▣ 들어가는 말

- 케리그마

‘케리그마’는 선포, 즉 ‘복음선포’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성서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개념인데, 단순히 역사적 지식이나 윤리적 가르침을 넘어 ‘구원의 선포’(케리그마적인 방식)로 성서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주 말씀을 드리지만, 성서를 해석할 때 단순히 역사적 사건으로 보거나, 도덕적 교훈을 얻는 정도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을 때, 읽고 있는 본문이 인간의 구원, 즉 복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종교의 세계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에 관한 관심입니다. 종교를 통해 더 많은 부나 성공을 얻겠다는 등의 세속성/세계성을 강화하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접근임이 틀림없습니다.

- 한 나병 환자 치유 사건

오늘 살펴보게 될 나병 환자를 고치는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짧게 기록된 이 사건을 해석할 때, ‘아, 병자를 고치셨구나’ 혹은, 소위 ‘영빨 쎈 사람에게 안수기도를 받으면 병을 고칠 수 있겠구나’ 등으로 이해하거나, ‘예수님은 굉장하다. 고치지 못하는 병이 없어’ 등으로 이해하는 것은 또 다른 문자주의적 성서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성경을 해석할 때, 이 본문이 케리그마적 차원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은 언뜻 드러나진 않지만 마태복음(8:1-4), 누가복음(5:12-18)도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공관복음의 저자들 모두 이 사건이 복음선포에 있어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데에 뜻을 같이한 것이지요. 이 이야기가 가진 케리그마로서의 중요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 해석의 실마리

- 때와 장소/보편성

이 이야기는 예수의 갈릴리 활동 전체를 요약해서 기술한 마가의 요약’(1:32-39) 부분 다음에 배치되어 있다. 주님은 회당을 시작으로 갈릴리 주변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1:38) 주님의 선교는 ‘갈릴리 전역’으로 확장되어 갑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한 나병 환자가…” 이는 갈릴리에서 예수에게 모여든 사람 전체를 ‘나병 환자’라는 범주에 넣은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갈릴리 사역 전체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지요.

마태는 이 이야기를 산상설교 다음(8:1-4)에 위치시키고, 마태복음 최초의 기적 사건으로 다루고 있는데,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마8:1) 이후 곧 “한 나병 환자가 나아와…”로 이어집니다. 마태 역시 “수많은 무리”의 현실을 “한 나병 환자”로 표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한 가지 덧붙이자면, 오늘 본문에 ‘때나 장소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자주 성서해석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때와 장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에 일정한 때에 대한 언급도 없고 어느 특정한 장소와도 연관시키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이 이야기를 통해 보편적인 의미/메시지를 전하려 하는 마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종합하면, 마가는 오늘 본문을 통해 특정한 때와 장소, 구체적인 개인에 국한된 메시지가 아닌, 때와 장소를 넘어서,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그때, 그곳, 그 누군가가 아닌, 오늘 여기 있는 바로 우리를 향한 메시지라는 말이 되는 것이지요.

- 왜 나병 환자인가?

마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려 했을까요. 분명, 단순한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과 관련된 복음을 전하려 했을 테지요.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이 나병 환자가 오늘 우리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우리의 어떤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가?” “어떤 모습을 드러내려 하는가?” 같은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마가는 왜 예수께로 온 사람을 구태여 나병 환자로 표현했을까요. 마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당시 나병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여겨졌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나병 환자를 부정한 자, 죄인 중의 죄인으로 간주합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의 삶에 의미 있는 케리그마로 이해하려면, 나병 환자가 오늘 우리 삶에서 어떤 사람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의 이야기이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여러 환자 중 굳이 나병 환자로 표현한 것은, ‘죄인인 인간 실존’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나병 하면, 떠오르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존재’ ‘에덴에서 쫓겨난 존재’를 표상하는 것이지요. 신 앞에서 죄인인 인간을 표현하기에 나병 환자와 같은 상징도 없지 않을까요.

“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와서…”에서 ‘오다’라는 동사를 현재형으로 시작하는 것도 바로 비슷한 까닭이지요. 당시 마가가 바라본 교회의 현실은 지금도 나병 환자와 같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오고 있다는 말 아닐까요. 마가는 과거의 이야기를 그의 복음서에서 현재화하고 있는 것이지요.

 

▣ 깨끗함을 받아라

-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마가는 왜 나병 환자의 입을 빌려 ‘고쳐달라’는 표현이 아니라 ‘깨끗하게 해달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병자라면 고쳐달라고 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러지 않고 깨끗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42절에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체 깨끗해졌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그냥 ‘고쳐졌다’ ‘나았다’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깨끗하게 해달라는 것은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부정하다는 인식을 전제로 깨끗하게 해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부정하다는 인식은 죄와 연관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이고, 자신의 삶이 부정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자만이, 깨끗하게 해달라고 청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나병 환자가 자신을 깨끗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나병 환자는 ‘죄인의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인 죄를 전제로 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상태인 죄로부터의 해방이 구원이지요. 이렇게 보면 깨끗해지기를 원하는 나병 환자의 간청은, 죄인인 인간, 모두의 간절한 바람이 틀림없지요. 자기 자신이 죄인이고 자신의 삶이 깨끗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을 자각하고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나병 환자처럼 깨끗해지기 위해서 예수께로 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자각을 가질 때 비로소 죄인은 예수께로 오는 자발성이 나타납니다. 자신이 더럽다는 것을 자각하고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더러움을 회개하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응답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 원하시면

‘원하시면’(델로)이 ‘하실 수 있나이다’(뒤나마이)로 이어진다. 원한다는 것은 의지, 뜻, 마음입니다. 하실 수 있다는 것은 힘, 능력, 권능이지요. 다시 말해서 마음/뜻이 없으면, 능력도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능력(뒤나미스)은 그분의 마음(델레마)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40절의 “원하시면”은 41절 “불쌍히 여기사”와 호응하고, “하실 수 있나이다.”는 “손을 내밀어”와 호응합니다. ‘원하시면~’하는 나병 환자의 절박함이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응답 됩니다. ‘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능력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라는 행동으로 구체화 됩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남을 보여줍니다.

성경의 기적 이야기에서 ‘손’은 능력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진다는 표현은 예수의 어떤 능력이 대상의 되는 사람의 삶에 어떤 영향력을 미쳤다는 뜻이지요. 본문에서는 마가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력을 손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안수한답시고 병자에게 손을 얹는 행위 등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지요. 의식을 집전할 때 상징적인 행위로 안수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병자를 치유한다는 명목으로 안수하는 행위는 분명히 신학적으로 재고해보아야 마땅합니다.

- 불쌍히 여기사

여기서 우리가 더 깊이 묻고 찾아야 할 것은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이 마음이야말로 믿는 자로서 마땅히 묻고 배워야 할 마음이요, 깨달아 행해야 할 마음 아닐까요. 성령이 예수님을 통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영을 받은 아들 예수님의 마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다면,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 없이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해야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사랑은 행위 이전에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때 묻지 않은 인간 본래의 마음 아닐까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마음 아닐까요. 그러기에 마가는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성령으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깊은 연민을 느끼다’ ‘불쌍히 여기다’ ‘마음 깊이 동정하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스플랑크나’에서 유래했는데, ‘내장’ ‘창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는 마음의 중심이 내장, 특히 창자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우리말에서 ‘애를 태우다’ ‘애를 쓰다’ ‘애를 끓이다’라고 할 때, ‘애’는 ‘창자’를 말하고, 걱정하고 아파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그야말로 애끓는 마음이지요. 인간 심성의 가장 깊고 지극한 자리, 이 애끓는 마음자리가 바로 하늘과 통하는 자리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솟아나는 자리이지요. 이 마음자리에서는 남도 남이 아니고, 이웃도 이웃이 아닙니다. 나와 남 사이에 거리가 없지요. 너나가 모두 하나, 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을 단순한 말로 들어서는 안 됩니다. 말이기 전에 마음입니다. 설명해서 아는 게 아니고, 알았다고 해서 터득되는 것도 아닙니다. 에고를 극복하고 넘어서야 비로소 열리고, 욕심을 버리는 만큼 주어집니다. 씻겨지면 스스로 드러나는 본디 마음, 원래의 마음이고, 깨끗해지면 저절로 임하는 하늘의 마음, 성령입니다.

- 내가 원하노니

그냥 깨끗해지라고 해도 될 것을 내가 하고자 한다는 말을 꼭 넣어야 할 까닭이 있을까요. 마가는 의도적으로, 죄인이 깨끗해지고 죄가 씻김을 받을 수 있는 권능은 “내가 원한다” 하신 예수님의 델레마(의지, 뜻, 마음)에서 생겨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당신이) 원하시면” 나병 환자가 말하고, “내가 원하노니” 예수가 답합니다. 매우 의도적이지요. 일부러 반복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하려는 마음, 즉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권능’이 생겨난다는 것을, 마가는 독자가 깨닫게 하려는 것이지요.

 

▣ 말하지 말고 보이라

- 엄히 경고하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침묵 명령은 참 의아합니다. 다른 경고가 아니라 왜 하필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셨을까요. 그리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라” 율법준수 명령을 내립니다. 종합해보면, ‘너의 깨끗해진 모습을 보여라’ 그러나 ‘말하지는 말라’가 되지요. 다시 말해서, 말보다 ‘깨끗해진 너 자신’을 행위로, 삶으로 보여주라는 것 아닐까요. ‘너의 깨끗함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말이 아니라 삶이라는 것 아닐까요. 결국, ‘죄 사함을 받았다’ ‘구원을 받았다’라는 것은 말이나 관념의 문제가 아니라, 행위와 삶을 통해서만 증거될 수 있다는 것을 마가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이는 마가가 처해 있던 초대교회의 신앙에서도 이미 사죄의 교리가 점점 실제 삶과는 멀어지고 관념화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라” 역시 레위기 14장에 기록된 대로 규정을 준수하라는 뜻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바치는 제물이 바치는 사람을 대신하는 것이라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상식입니다. 따라서,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말씀은 ‘깨끗해진 너 자신을 보이라’는 뜻으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깨끗해진 너 자신을 삶을 통해 나타내 보이고, 너의 깨끗함에 대해서 제물을 바치듯 너 자신을 바칠 때, 그런 행위야말로 네가 깨끗해졌다는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아닌가 뜻입니다.

그러니 말하지 말라. 세례를 통해 씻김을 받았다느니,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을 입어 내 죄가 깨끗해졌다느니, 그건 네가 할 말이 아니다. 그러니 말하지 말고 보이라. 삶을 통해 보이라는 것이지요.

- 그러나…

“엄히 경고하사” 그리도 엄하게 경고까지 하셨지만, 그는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경고를 듣지 않습니다. 신앙인이라면 우리도 마땅히 이리 살아야 할 것 같은, 그래서 그리 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 조금은 부끄러워지는 그런 구절이지요. 우리는 지금까지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 의미일까요. 45절을 찬찬히 뜯어 읽으면, 나병 환자가 나가서 전파하고 퍼뜨린 것 때문에, 예수는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람직하지 못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지금 나병 환자의 행동은 분명 비신앙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 하신 예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지 말라는 명령의 참뜻은 “너 자신을 보이라”는 데에 초점이 있습니다. 입으로 말하고 말로 증거하는 것이 말하는 자의 행위나 삶과 괴리되어 겉돌 때, 누가 그 증언을 믿겠으며 누가 너를 깨끗해졌다고 인정하겠느냐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도시로 들어갈 수 없었던”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하지 말고 보이라 하셨는데, 깨끗해진 자기 자신을 내보이지는 못하고 말만 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깨끗해졌다고 말은 하는데 그 삶에서 깨끗해진 구석을 찾아보기 힘들다면, 그 죄 사함의 교리는 분명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없는, 오히려 비난받을 수 있는 말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점점 더 전도가 이루어지지 않고 교회나 신앙이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비난당하는 현실을 놓고, 마가는 그 원인을 깨끗해졌다고 말하면서도 깨끗하게 살지 못하는 신앙인들 때문이라고 본 것 아닐까요. 너무나 뼈아픈 지적입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 나가는 말

성경의 말씀을 어설프게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이들 때문에, 신앙을 세속적 욕망을 부추기는 도구로 삼는 이들 때문에, 예수의 마음과는 아무 상관 없이 뭘 좀 안다는 높아진 오만함 때문에,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신앙을, 교회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가의 바람과 같이 성경의 말씀이 그 언젠가 있었던 일이 아닌, 오늘 우리의 사건이기를 바라봅니다. 본문의 나병 환자와 같이 자신의 깨끗하지 못함을 인식하고 그분을 향해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해방하신다는 믿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깨끗해지기를 바랍니다. 타인과 세상을 향한 애타는 마음이 우리 안에 깃들어 사랑하며 살기를 소망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깊어지지 못한 설익은 모습으로 주님의 말씀을, 은혜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엄히 경고하신 주님의 뜻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본문의 마지막 구절이 우리 한국 교회의 새로운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도 바깥 광야에 머물러 계신 주님,

도시와 교회에서 계실 수 없어 밀려나고 쫓겨나는 주님을 보게 하소서.

주님, 죄인된 우리 영혼을 깨끗하게 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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