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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너도 내 마음처럼 진실하냐 (왕하 10 : 15 - 31, 렘 35 : 1 - 11)

2024년 8월 4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Jsfp20JZGQo

▣ 들어가는 말

- 욘 포세, 『샤이닝』

작년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욘 포세의 작품 『샤이닝』은 파이넨셜 타임즈 선정 2023 최고의 책으로 꼽혔습니다. 설교를 작성하며 모니터만 들여다보다가 단숨에 읽은 책입니다. 그 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차를 타고 벗어났다. 기분이 좋았다. 움직이니 기분이 좋았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다. 단지 나는 운전을 할 뿐이었다. 나를 덮친 것은 지루함이었다. 평소 지루함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내가 지루함에 압도당한 것이다. 내가 하려고 한 어떤 일들도 내게 기쁨을 주지 못했다.” 주인공은 무작정 차를 운전해서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달렸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인적이 없는 작은 숲길에 들어서 차가 길바닥에 처박혀서 멈추고 나서야 정신을 차립니다.

“나는 차에 앉아 있었다. 그렇다, 나는 지금 여기 있다. 나는 지금 여기 앉아 있다. 문득 공허감이 나를 덮쳤다. 마치 지루함이 공허함으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두려움일지 몰랐으니…” 자신을 압도했던 지루함은 이제 공허함으로, 두려움으로 바뀝니다. 이 장면이 우리 인생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라 여겨졌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지만, 별다른 생각 없이 사람을 만나고, 일하고, 눈앞에 일어나는 일들을 처리하며 닥치는 대로 분주히 달려온 인생. 그 인생이 멈춘 후에야 비로소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 아닐까요.

“나는 어디로 가려 했을까, 그저 사람들이 있는 곳, 내게 필요한 이런저런 것을 살 수 있는 곳…” “나는 가만히 서서 차를 바라보았고, 차는 그 자리에 서서 멍청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멍청하게 바라본 건 차가 아니라 나였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는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왔던 것일까,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전혀 없었다.” 그저 우리는 순간마다 사람들에게로, 필요한 것을 향해서 달려갑니다. 그런데 막상 되돌아보면,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그리 열심히 달려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지루함 때문이었을까요. 얼마든지 다른 길로 갈 기회는 많았는데 말이지요.

그는 자동차에서 내려, 도움을 청하기 위해 눈으로 뒤덮인 숲속으로 난 길로 나아갑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 신앙은 어떤 의미인가

오늘 우리에게 종교, 신앙은 어떤 의미일까요? 주인공처럼 삶에서 다양한 길을 만나게 될 때, 그때마다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좌회전, 우회전하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아무도 없는 숲길을 향해 무작정 달려가는 게 아니라,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떤 길이 바른길인지’ ‘잘 가고 있는지’ 등을 물으며 숙고하며 가려는 태도 아닐까요.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슐라이어마허의 『종교론』은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들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그가 활동했던 18세기는 이성과 과학을 중시하며 종교적 믿음을 비판하는 경향이 강했던 계몽주의 시대였습니다. 이성과 과학으로 무장하고 종교를 멸시하고 무시하는 소위 지성인들을 향해, 종교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려 합니다. 그는 종교를 “절대 의존의 감정”으로 정의합니다. 종교는 이성이나 과학과는 다른 영역에 속하며, 교리나 윤리적 규범이 아니라 주관적 직관과 감정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종교는 단지 미신이나 무지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적 부분이라는 탁월한 통찰을 제시합니다. 신학과 철학에 지대한 공헌을 남겼습니다.

신앙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설명해낼 수 있는 과학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울러 단지 선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도덕이나 윤리의 문제도 아닙니다. 슐라이어마허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 존재의 근원/토대를 형성하고 있는 말 그대로 “절대적인 의존 감정”입니다. 지금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이 경험하고 느꼈던, 삶을 완전히 바꾸었던 ‘그 무엇’인 것이지요.

 

▣ 레갑 사람들

- 왕국의 끝

오늘 다루려고 하는 레갑 사람들 이야기는 예레미야 35장에 나오는데,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받은 신탁 내용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레미야 34장은 유다의 마지막이자 20대 왕인 시드기야 시대(주전 588~587)의 신탁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35장은 18대 왕 여호야김 시대의 사건과 신탁을 서술하고 있지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는 시점은 시드기야 왕 때인데, 메시지에 등장하는 사건은 여호야김 왕 때에 있었던 일이라는 것이지요. 멸망을 앞둔 시드기야 왕과 유다를 향해 과거에 있었던 이야기를 소환해와서 애끓는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레갑 사람들의 이야기는 유다 왕 여호야김(주전 609~598) 때입니다. 열왕기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원래 이름은 ‘엘리아김’인데 이집트 왕 느고가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꾸고 동생 여호아하스를 대신해 왕으로 삼습니다. 이집트에 조공을 바치며 섬기고 있었지요. 이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이집트를 물리치고 유다를 포함한 많은 지역을 장악하면서 바벨론을 섬기게 됩니다. 그런데, 여호야김이 바벨론에 반역을 하고, 이에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를 공격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레갑 자손을 여호와의 성전의 한 방으로 데리고 가서 포도주를 권하라는 명령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지요.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를 공격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동안 레갑 족속은 예루살렘에 피난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도 유다 광야에서 유목민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다 적군이 몰려오자 성안으로 피신을 한 것이지요. 예레미야가 ‘레갑 족속의 모든 집안’의 전 무리를 성전의 한 방으로 데려온 것으로 보아 이들의 수효가 많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렘35:2)

- 레갑의 아들 요나답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포도주를 권했는데, 이때 레갑 족속은 예레미야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선조 요나답이 명하였다는 말을 세 번이나 되풀이하여 강조하면서 포도주 마시기를 거부합니다.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권유를 뿌리치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불순종하는 유다 백성에게 순종의 본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들에게 경건 생활의 규례를 제정해준 영적 지도자로 언급되고 있는 레갑의 아들 요나답은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여호나답이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 예후 시대에 살았던 사람으로 예후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후(왕하9:1-10) 사마리아 성에 입성할 때 “내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과 같이 네 마음도 그러하냐?”고 묻는 예후에게 “그러하옵나이다” 대답하고 예후의 종교개혁에 합류하여 예후와 함께 아합에게 속한 자들을 진멸하고,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모두 죽였던 예후의 혁명 동지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후의 개혁이 온전치 못함을 보고서 이스라엘의 타락과 부패, 그리고 멸망을 내다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자손들에게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평생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유언을 남기지요.(렘35:6-7) 이후로 레갑 족속은 농경지역인 가나안에서도 광야 유목생활을 하며 하나님에 대한 절제와 근신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렘35:16)

 

▣ 예후 대 요나답

- 예후의 개혁

예후는 최악의 왕 아합의 가문을 무너뜨리고 북이스라엘의 왕이 된 인물입니다.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해 그에게 기름을 붓고 해야 할 일들을 명령합니다.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왕하9:7) “여호와의 종들과 선지자들의 피 값을 이세벨에게 갚아주라” “아합 가문에 속한 모든 남자는 멸절하라” “이세벨의 시체를 개들이 먹도록 해서 누구도 장사할 사람이 없도록 하라”… 하나님의 진노가 아합의 가문에 쏟아지고, 이 진노의 도구로 삼은 것이 바로 예후입니다.

역사적 사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성경은 예후의 혁명을 신의 섭리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직접 아합 가문을 심판하기 위해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철저하게 아합 가문을 멸절시킵니다. 아합에게 빌붙어 있던 귀족들과 제사장들을 모조리 처단합니다. 그리고 아합이 섬기던 바알을 철저히 무너뜨리고 바알의 선지자들과 섬기는 자들을 모조리 처단합니다.

그렇게 개혁의 깃발 아래, 국가적 분위기를 쇄신하고 종교개혁을 이루어냅니다. 아합의 가문을 멸절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기에, 하나님은 예후에게 이스라엘의 왕위를 4대 동안 지속시키겠다 약속해 줍니다. 이는 북이스라엘 왕가 가운데 가장 긴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그의 개혁에는 부족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던 제단은 그대로 남겨둡니다.

-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그러한 개혁의 과정에서 예후는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을 만납니다. “나와 손을 잡자”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함께 혁신과 쇄신에 전념합니다.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예후의 개혁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그는 아합의 가문을 멸절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합과 연합했던 유다의 왕 아하시야마저 죽여 버립니다. 또한,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철저히 가려내서 모조리 죽이고 바알의 목상을 헐고 바알 신당을 변소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의 말처럼 그의 열정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북이스라엘 초대 왕 여로보암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갈 필요가 없도록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영토 내에 상당수의 가나안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이스라엘 백성과 융화시킬 목적도 있었던 것이지요. 형식적으로는 여호와를 섬기지만 내용적으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게 되는 길을 열어 놓게 되어, 종교적 혼합주의를 도입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예후의 개혁이 철저하고 근본적이었다면, 벧엘과 단의 제단도 무너뜨려야 했습니다. 그 제단이 나라를 튼튼히 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는 데에는 유익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분명 명백한 우상숭배였고 개혁의 대상이었습니다.

- 여호나답의 개혁

예후의 개혁에 동참했던 여호나답은 예후와 같은 개혁자가 나타나자 기꺼이 그와 손을 잡고 하나님을 향한 개혁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됩니다. 그는 철저히 바알을 무너뜨리고 여호와를 높이기 위해 노력합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철저히 가려내서 모조리 몰살시키는 굉장한 개혁의 전과를 올립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얼마나 감격했을까요? 전국의 하나님을 반대하는 자들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크심과 거룩하심을 드러내게 되었을 때 그가 느꼈을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 했던 예후는 그가 바라던 이상적인 다윗과 같은 훌륭한 성군이 아니었습니다. 예후는 개혁을 마무리 짓지 못했습니다. 아니 하지 않았습니다. 북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생겨나면서부터 내려온 뿌리 깊은 전통, 벧엘과 단의 우상은 무너뜨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잘못 건드리는 날에는 국론이 분열되고 개혁에 동조하던 사람들에게조차 지탄받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후는 어쩌면 나중에 하자고,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내겠다고 여호나답에게 말했을지도 모르지요.

결국, 예후의 개혁에 대한 열정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절망, 구토… 그는 홀연히 정치판에서 사라집니다. 그리도 순전하게 보였던 예후의 결말을 보면서 그는 정치에 희망을 잃어버리게 되었겠지요. 예후와 손을 잡고 그는 북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 수 있다고 믿었으나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질 나라를 세우고 싶었지만, 그의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는 조용히 물러납니다. 예후와 함께 개혁을 주도했기에 그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높은 지위와 자리가 보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야인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는 자손들에게 애타는 유언을 내립니다. “결코, 높은 곳에 마음을 두지 말아라. 절대로 포도주를 마시지 말아서 정신을 흐트러뜨리지 말아라. 집을 짓지도 갖지도 말아라. 소유에 집착하지 말아라. 파종도 하지 말아라. 한곳에 정착하지 말아라. 이 세상에 어떠한 미련도 두지 말아라. 평생 장막에 살아라. 평생을 어디에도 안주하지 말고 유목민으로 떠돌이로 살아라.”

자손들에게 이 명령은 너무나 끔찍하고 잔인한 명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꿈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조상이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그들은 얼마나 오래 한곳에 정착하는 꿈, 그래서 안전하고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을 꿈꿔왔었던가 말입니다. 그것은 민족 전체의 꿈, 소망, 간절한 바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자손들에게 그러한 당부(명령)를 해야만 했을까요?

 

▣ 나가는 말

- 성공과 실패

이 사건을 통해서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잘 섬기면 성공하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후의 정치적 성공과 요나답의 순진한 실패를 통해 무엇이 진정한 성공이고 실패인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삶을 통해 우리가 정말로 이루려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삶에서 길을 잃는가? 정말로 중요한 ‘그 무엇’을 놓치게 될 때, 우리는 길을 잃게 되는 것 아닐까요.

어쩌면 예후는 성공의 길을 향해 나아갔고, 요나답은 처음부터 이룰 수 없는 것을 꿈꾸었는지 모릅니다. 이 이야기는 삶에서 무엇을 이루었나 아니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여호나답에게 있어 이 세상에서의 풍요와 안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으로 하면 ‘여호와를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식 표현으로 해보자면 ‘인간성을 잃지 않는 것’ ‘나답게 사는 것’ 즈음이 될 것입니다. 풍요와 번영, 성공과 안정을 위해 인간성을 포기하는 수많은 이들을 봅니다. 성경은(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 백성들에게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풍요와 번영, 성공과 안정을 향해 달려온 결과가 무엇이냐? 나라의 멸망과 비통과 돌이킬 수 없는 절망과 구토가 아니냐? 말입니다.

- 결국, 마음이다.

레갑은 야곱의 후손이 아니라 모세의 장인이 속한 겐 족속의 후손이며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땅으로 온 후로 계속해서 유목민의 생활을 유지합니다. 레갑 자손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이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는 게 아니라,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성서적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산다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물질적인 가치로 평가되고 있는 오늘의 세계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대체 어떻게 살아야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되이 살지 않았음을 깨닫게 될까요? “산다는 것은 그토록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진정한 삶이 아닌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고백했던 소로우의 말처럼, 어떻게 우리는 타인들의 시선이나 물질적 가치로 평가받는 삶이 아닌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나답지 못한 것에 대해 기꺼이 저항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사람들의 기대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이 세상적 가치에 묶여있지 않는 진정으로 내가 되는 삶, 나다운 삶,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잘못 살았구나’ 후회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어떤 삶을 꿈꾸십니까?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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