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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막 6 : 30 – 44)

▣ 들어가는 말

- 종교개혁 기념 주일

종교개혁은 16세기 유럽에서 마르틴 루터와 같은 종교 개혁자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비리를 비판하며 시작된 일련의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운동입니다. 오늘은 그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주일(507주년)입니다. 500년이나 지난 종교개혁은 오늘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종교개혁은 단순히 종교적인 변화에 그치지 않고 세계사에 깊은 영향을 미친 중요한 사건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있습니다. 먼저, 종교적으로는 가톨릭교회와 개신교로 분열되어 개신교는 다양한 종파들이 형성되었습니다. 둘째, “오직 성경” “오직 믿음”이라는 슬로건을 통해 개인의 믿음과 성경의 권위를 강조했습니다. 그로 인해 자유와 개성을 강조하는 근대사상의 발전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셋째, 종교개혁은 교회의 권위뿐 아니라 세속적 권위에도 도전하는 결과를 가져와 시민의 권리와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넷째, 루터는 모든 사람이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따라 교육과 문해력의 확산을 촉진하였습니다. 다섯째, 가톨릭교회도 트렌트 공의회를 통해 내부 개혁이 이루어집니다. 마지막으로, 신구종교 갈등으로 30년 전쟁 등 종교전쟁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유럽 정치와 국제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근대 국제관계의 기틀이 마련되지요.

- 오늘 우리의 종교개혁

종교개혁에 관해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오늘 한국교회에도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할 필요를 느끼곤 합니다. 어쩌면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이젠 희망이 없는 듯 느껴지기조차 합니다. 우리 사회에 교회는 어떠한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듯합니다. 쓰다 버린 휴지 조각 마냥 사람들에게 어떤 관심도 받지 못하고 외면당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사람들에게 밟히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지는 존재. 교회가 어떤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희망도, 기대도,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조차 없어져 버린 걸까요. 자조 섞인 허탈한 한숨만 깊어집니다. 종교개혁의 5대 강령인 오직 성경,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은 오늘 우리 시대에 오직 과학, 오직 돈, 오직 나의 행복만으로 바뀐 걸까요. 오늘 그리스도인으로, 종교개혁의 정신을 되새기며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 오병이어를 어떻게 볼 것인가?

- 세례 요한이 죽다!

오늘 본문의 시작,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라는 말은 제자들이 흩어져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6장 7절의 제자 파송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오병이어 사건을 “사도들이 모여”라는 말로 시작한다는 것은, 오병이어 사건이 제자 파송과 연관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니 제자 파송 사건과 오병이어 사건을 관련성을 가지고 읽어야(해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30절의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에서 제자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은 파송 기사의 마지막 부분, 12~13절에 “회개하라 전파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병자를 고친 것”이 되겠지요.

그런데 오병이어 사건과 파송 사건 사이에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참수당해 죽는 이야기를 끼워 넣습니다. 두 사건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면 바로 이어서 배치를 하면 될 것인데, 그 사이에 뭔가를 끼워 넣었다는 것은 의도가 있는 것이지요. 헤롯이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것을 비판하자 요한을 참수합니다. 헤롯의 불의를 비판하며 회개를 촉구한 것이 죽음을 자초했다는 것입니다. 마가는 예수와 제자들이 활동한 시대가 그런 시대였고, 그런 시대에 “회개하라” 전파했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14절에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이 구절의 의미가 이제 보이시죠. 제자들이 곳곳에 다니며 회개하라고 떠들고 다니니 헤롯에게, 세상에 드러난 것이고 이는 곧 세례 요한과 같이 죽음이 시시각각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지요.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밴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16절) 다시 죽여야겠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오병이어 사건의 시대적인 배경이고, 이 사건을 해석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제자들과 예수가 다시 만나 그간 있었던 일들을 보고하고는 자리는 상당히 엄중하고 예사롭지 않은 자리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제자들의 보고를 듣고 예수는 제자들에게 명합니다. 고생이 많았으니 좀 쉬라거나 사람들이 오지 않는 곳에 가서 좀 여유를 갖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헤롯이 요한을 죽였듯이, 이제 우리 모두의 목숨을 노리고 있으니 잠시 피해 있으라는 말이지요. 그것도 “따로”라는 표현을 보면, 몰려다니지 말고 각각 흩어져서 한적한 곳으로 오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명령할 수밖에 없는 긴급한 정치적인 상황이 그 배경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지요.

- “사도들”

30절에서 사용된 “사도들”이라는 표현은 마가복음에서 이곳에서만 쓰입니다. “제자들”이라는 말 대신에 굳이 사도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앞서 언급했듯이 여기서 사도들은 7절의 제자 파송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보냅니다. “모여”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했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칩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모인 것이지요. 그리고 특이한 점은 파송할 때는 “제자”라고 했는데, 모였을 때는 “사도”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마가복음 전체에서 이곳에서만 굳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마가는 소위 “사도”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뭔가 메시지를 주려는 것 같습니다. 사도라는 표현은 예수의 활동 시대에는 쓰이지 않던 용어입니다. 초대교회의 용어지요. 예수의 직제자 열둘과 그들이 인정한 특별한 사람만이 사도라 불립니다. 바울과 관련해서 끊임없이 ‘사도권 논쟁’(사도 자격 있나)이 따라다녔던 이유입니다. 그만큼 사도의 권위는 초대교회에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수가 늘어가고 지역적으로도 확장되어 가는 시점에서, 사도라는 권위는 교회 주도권 싸움에서 절대적이었던 것이지요. 열두 제자들을 주축으로 형성된 예루살렘 교회가 매우 배타적 특권으로 이 사도의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초대교회 내의 다른 공동체들이 그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을 수 있다고 짐작해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교회의 연합과 일치 등을 위해 필연적 과정이기도 합니다.

예수가 떠난 지 한 세대가 지난 이후, 초대교회의 권력투쟁의 모습을 보면서 마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래서였을까요.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제자들을 표현할 때, 사도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저 제자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하지요. 제자들을 묘사할 때에도 예수가 누구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모습이나, 예수를 배반하고 모두 도망쳐버리거나 하는 등 ‘믿음 없는 자들’로 표현하지요. 이는 예수를 제대로 따르지 못한 자들이었다는 마가의 속 깊은 저항이 내재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곳에서만 유독 사도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마가 당시의 초대교회에서 사도라고 불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뭔가 할 말이 있다는 것으로 읽힙니다.

- “가르치시더라”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그곳에 달려와” 제자들이 그렇게 비밀리에 한적한 곳(광야)으로 갔는데, 백성들은 그런 상황을 눈치채고 자신들도 그리고 모여온 것이지요. 로마인들 이방인들은 모르지만, 가난한 유대 백성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는 것이지요. 주님도 도착해서 보니, “큰 무리를 보시고”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불쌍히 여기사” “가르치시더라” 그들의 처지가 남의 일 같지 않게 여겨진 것이지요. 오죽하면 이럴까요. 백성들의 삶의 허기(배고픔)가 예수의 마음을 울립니다. “목자 없는 양 같음”은 그 시대의 마지막 예언자 요한의 죽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백성들에게 요한은 목자와 같은 존재였는데, 그가 죽임을 당했으니 지도자를 잃은 백성들의 모습이 목자를 잃어버린 가련한 양들로 보이는 것이지요. 그 가난하고 불쌍한 양들에게 이제 자신이 목자가 되어줘야 합니다. 그런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예수는 가르침을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연민(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가르침과 연관되고, 나아가 그 가르침이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이어진다면,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의 연민과 연관이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가르치시더라”라는 표현이야말로 오병이어 기적해석에 있어 키워드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는 예수께서 “큰 무리를 가르치신 것을 형상화/상징화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큰 무리를 가르치신 것을 먹이신 사건으로 묘사한 것이지요.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막5:43) 죽었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후에 예수가 하신 말씀입니다. 그 이야기에서 죽었던 소녀는 유대 민중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먹을 것을 주라는 말은 민중에게 먹을 것, 즉 ‘가르침’을 주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지요. 마가에게 먹이는 일은 곧 가르치는 일이요, 가르치는 일은 곧 먹이는 일입니다. 그러니 34절에서 큰 무리를 보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말씀과 37절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명령은 서로 맞닿아 있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으로 보면, 이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어떻게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느냐는 질문은 필요치 않습니다. 억지로 믿으라고 하거나, 주님의 능력은 한이 없다 하거나 하지 않아도 되지요. 이 이야기에서 떡은 이제 떡이 아니라 가르침이요, 그 가르침을 나누는 것이 오병이어 기적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본문에서 사도라 불리는 제자들은 큰 무리를 먹이는 일에 무력하기만 합니다.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36절) 이것이 제자들이 내놓은 방안입니다. 12~13절에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회개하라고 설교하며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던 그때의 모습과는 너무 거리가 멉니다. 그때는 무리를 가르치기 위해 그들을 찾아 나섰는데, 지금은 오히려 모여든 무리를 해산시킬 생각이나 하고 있습니다. 무리를 먹어야 할 임무가 자기들에게 위임되어 있음을 망각하고 무리가 스스로 사 먹게 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의 명령은 그 먹이는 일이야말로 사도들, 제자들의 임무이고 사명이라는 선언일 텐데, “우리가 사다 먹일까요?” 되묻습니다. 자신의 존재도, 사명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 혹은 반항심마저 느껴집니다.

예수를 따르던 과거의 제자들이 사도가 된 후에는 이런 꼴이 되었다는 마가의 준엄한 비판 아닐까요. 그 메시지는 마가가 속해 있는 당시 초대교회 사도들을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자들을 제자라고 부르지 않고 의도적으로 사도라고 부른 이유입니다.

“이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떠난 후 시간이 많이 지난 초대교회의 상황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요. 모여든 무리는 많은데 먹을 것이 없는 초대교회의 현실을 폭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의 보내심을 받아 행하고 가르쳤던 제자들이 이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망각하고 있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무리를 보내… 사 먹게 하옵소서.” 이러고서도 너희가 예수의 사도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러면서 교권 다툼이나 일삼고 있는 교회의 모습에 대한 통렬한 비판입니다. “목자 잃은 양”과 같은 이들이 목자를 찾아 광야까지 왔는데, 먹을 것을 주지 못한다는 말이냐. 각자도생하라는 말이냐. 너희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 “불쌍히 여기는 마음”마저 없이, 자신들의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는 너 자신을 보라는 말입니다.

 

▣ 오병이어를 다시 생각하다.

- 들을 귀 있는 자

종교개혁은 단순한 교회 내의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종교의 개혁은 곧 세계의 개혁, 변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모습을 생각해보면, 진정한 개혁 사회의 변혁은 교회를 통해 일어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 어떤 개혁도 완전할 수는 없으나, 그 개혁을 이루어내는 중심에, 근원에 온전한 정신, 태도, 사랑…이 있지 않다면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의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근원적 도전에 직면해있습니다. 건전한 가치관이 실종되었고, 지구 전체가 환경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으며, 종교와 정치, 사법, 교육 등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진정한 개혁이 필요할 때라는 데에 모두가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힘도 능력도 의지도 실종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과 성령을 통해 그분의 나라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눅12:32) 결국, 성경의 말씀을 전 실존으로 받아들이는 이, 진정으로 신의 말씀으로 듣는 이를 통해 개혁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4:23)

-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그 준엄한 명령 앞에, “사서 줄까요?”라는 끔찍한 답변밖에 할 줄 모르는 사도와 교회와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사도행전 3: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행3:6) 베드로의 신앙이 우리에겐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눈먼 신앙, 눈먼 삶에는 “없는 돈”만 보입니다. “있는 떡”은 보이지 않습니다. 없는 것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부끄러운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놀라운 주님의 물음입니다. 가능성을 생각하며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눈을 돌리게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에게 있는 것은 무엇이냐 묻습니다. 너희에게는 이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다는 선언입니다.

마가에게 떡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는 어떤 의미일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오늘 본문의 핵심은 가르침입니다. 육체적인 먹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과 정신을 일깨우는 가르침이 본질이라는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다섯 개의 떡을 모세 오경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무리를 푸른 풀밭에 앉게 하신 것은 그들을 목자를 잃은 양으로 보셨기에 양 떼를 푸른 풀밭에 앉힌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가 무엇이냐에 대한 해석의 핵심은 “불쌍히 여기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자기 손에 쥔 것을 하늘로부터 받은 것으로 여기는 모습 아닐까요. 그래서 가진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이것이 마땅한 우리의 태도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태도일 때,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도 가지게 되지 않을까요.

앞서 살펴보았듯이 주님의 가르침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떡을 떼어” “주게 하시고” 이것이 목자를 잃은 양 떼를 보는 목자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에서 우리는 소유를 떼어/쪼개어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의 마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떡을 쪼개고 부수는 마음입니다. 복음은 율법보다 차원이 높은 마음의 법 아닐까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그런 나눔의 마음씨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곧 성령 아닐까요. 이런 마음씨를 갖지 못했으니, 예수를 믿는다면서 오히려 고약한 심보를 보이는 것 아닌가요.

제 먹을 떡을 쪼개고, 제 소유를 부서뜨리는 마음이 우리가 배워야 할 예수의 마음입니다.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고” 제자들에게 떡을 주신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나누어 먹고도 남을 수 있는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서, 제자들과 무리들 사이에서, 무리들과 또 다른 무리들 사이에 이러한 주고 받는 나눔의 은혜가 있었기에 “다 배불리 먹고” 모두가 영적 풍요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열두 바구니

남은 열두 바구니는 무엇일까요. 왜 열둘일까요. 제자들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그 누구보다 제자들에게 배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먹이는 자의 행복, 배움, 성숙이 아닐까요. 받아먹기만 하는 자는 죽어도 깨닫지 못할. 베풂의 기쁨, 나눔의 기쁨 말입니다. 제자,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 땅에서 보냄받은 자의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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