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7(사 40:1-11)
오늘 우리가 설교의 본문으로 읽은 이사야서 40:1-11절의 저자로 알려진 제2 이사야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당한 기원전 587년 이후부터 바벨론 제국이 붕괴되던 기원전 539년 사이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그가 활동하던 시절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때였습니다. 다윗과 솔로몬 왕조가 무너졌고,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민중은 바벨론의 식민통치를 받았고, 유대의 많은 지도자들은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바벨론 제국으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제국의 권위 앞에서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들의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위로하라!
그들을 향해서 제2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 시작은 “위로하라.”입니다. 두 번 반복한 건 강조한다는 뜻이겠지요. 어떻게 위로를 합니까? 힘들지만 힘을 내십시오, 해서 위로를 받는 건 아닙니다. 절망의 상황이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려주어야만 위로가 됩니다. 지금 유대인 포로들과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고향의 유대인들에게 유일하고 절대적인 희망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아직은 그런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희망을 노래하지 못했습니다. 이사야는 이런 상황에 놓인 유대인들을 향해서 구체적인 희망을 제시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미 노역의 때가 끝났고 죄악이 용서받았으며, 벌을 배나 받았다고 말입니다. 모든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면 이제 다른 것도 원상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들이 돌아갈 수 있도록 길을 내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그 길은 바로 여호와의 길입니다. 유대인들의 귀환을 여호와의 행차와 같다고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제2 이사야는 이런 말씀을 받고 당황스러웠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은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가는 혹세무민하는 자라는 말을 들을지도 몰랐으니까요. 바벨론은 여전히 기세등등하고, 자기 민족 유대인은 무기력합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심정을 6a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예언자의 영적 상황이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을 외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외칠 말씀이 없습니다. 상황이 여전히 암담합니다. 칼 바르트는 설교자의 실존을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말씀을 전해야만 한다고 말입니다. 오늘 한국의 상황에서 말씀을 선포해야 할 설교자들도 똑같은 딜레마를 겪고 있는 건 아닐는지요.
오늘 본문은 그 상황을 풀과 꽃으로 비유해서 설명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꽃처럼 잠시 피었다가 시들어버린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디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기 힘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실망할만한 일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도, 이사야가 무엇을 외쳐야 할지 모르겠다는 그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너나없이 우리는 모두 풀과 꽃입니다. 북풍이 불기 시작하면 꽃이 떨어지고 낙엽이 지듯이 우리의 노력이라는 게 기껏해야 한철 반짝하다 맙니다. 우리는 그런 일들을 지난 세계 역사와 한민족의 역사에서도 반복해서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꽃이나 풀과는 다른 힘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창조와 생명의 종말론적 능력입니다. 그 능력의 주관자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 능력 자체가 하나님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리는 것이 곧 예언자들의 신탁(神託) 사건입니다. 지금 이사야는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고 뒤로 물러섰다가 말씀 앞에 다시 나설 수 있었습니다. 시인이 언어의 힘에 사로잡히듯이 이사야는 지금 ‘외치는 자’의 소리에 다시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을 보라
그 소리는 이제 훨씬 강도가 높은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고 외칩니다. 이 표현은 다음과 같이도 번역이 가능합니다. “보라, 너희의 하나님이 오신다.” 하나님이 오신다니요.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것은 예언자들의 영적 상상력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그의 통치를 그만큼 절절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위로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사야에게 다시 “하나님을 보라.”고 외치라는 말씀이 왔습니다. 이 두 명령은 인간의 실존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초월하는 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실존은 위로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위로는 사람에게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꽃과 풀입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있지만, 사람이나 꽃이나 피조물이라는 점에서는 매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이야말로 그 실존으로부터 넘어서며, 동시에 그 실존을 감싸 안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참된 위로를 얻으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본다는 사실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 기독교인들 중에서 이 사실을 한편으로는 모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면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람만을 보려고 합니다. 그게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는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이미 잘 알 것입니다. 신앙의 모든 관심들이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경배와 찬양’이나 ‘열린 예배’는 기존 예배의 형식주의를 극복하겠다는 취지로 시작했으나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아기까지 버린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청중끼리의 소통은 확장되었으나 성령과의 영적 공명은 그 질이 훨씬 떨어졌습니다. 기독교 상담과 심리학이 교회 행위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종교적 욕망을 만족시켜주는 것을 교회의 존재 목표로 삼고 있는 실정입니다. 설교도 대중주의(포퓰리즘)에 떨어졌습니다. 그것이 왜 문제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신앙행태는 일종의 종교적 나르시시즘(자기연민)입니다. 이런 방식의 신앙행태는 신자들을 끝없이 자기와 자기 가족과 자기 교회에만 집중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거친 세상에서 위로를 받고 살면 좋지 않냐,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방식으로 삶의 위로를 받을 수만 있다면 다행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위로받는 것처럼 착각할 뿐이지 실제로 위로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거짓 위로로 만족이 안 되니 더 강렬한 것을 요구합니다. 교회가 이벤트와 프로그램으로 작동된다는 것이 단적이 예입니다. 그것도 한 두 번이지 악순환이 반복되면 니체와 프로이트가 이미 지적했듯이 노이로제 증상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노이로제는 생명력의 고갈을 뜻합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사람에 대한 관심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닙니다.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교권과 율법주의의 병폐를 제가 모르기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결코 도구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제도나 이데올로기도 사람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이런 차원이라면 기독교 신앙은 늘 인간학적이어야 합니다. 인간의 실존적 삶의 깊이를 뚫어보지 않은 채 구원론적 설교를 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길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바로 그 인간구원이 어디로부터 시작하느냐,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곧 인간이 어디서 위로받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오늘 이사야는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을 보라.”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을 보라고 말입니다. 오늘 대림절 둘째 주일을 맞는 우리도 그와 똑같이 외쳐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보라.
이렇게 말은 하지만 여러분은 속으로 도대체 하나님을 본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할 겁니다. 속으로 대답해보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을 보았습니까? 이런 질문은 우리를 매우 불편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보았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못 보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어느 정도 신앙 경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보았다’고 할 정도로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못 보았다고 하면 신자로서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대개의 신자들은 어중간한 상태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성서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본 사람은 모두 죽는다고 가르칩니다. 죽어야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다고 한 모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20) 모세는 하나님이 지나간 다음에 그의 등만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마치 진딧물이 코끼리를 전체적으로 직관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만약 누가 실제로 하나님을 보았다거나 음성을 들은 것처럼 주장하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렇다면 오늘 이사야를 통해서 주신 이 말씀, 즉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는 말씀도 실제적인 게 아니라는 거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과의 관계인 신앙의 긴장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그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경험하고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가르침은 옳습니다. 서로 모순되는 말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 10a절 말씀을 보십시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하나님의 존재방식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자리가 바로 여기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지요? 여호와께서 강한 자로 임하시는 역사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의 하나님 경험이었습니다. 그 역사는 물론 바로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직접적인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분의 얼굴을 직접 보는 게 아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그런 경험이 예민한 사람들이 바로 구약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역사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느꼈습니다. 역사의 주인이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믿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역사의 주인이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는 힘 있는 사람이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눈에도 그렇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지금 미국이 세계의 역사를 지배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심지어 영어를 한국의 공용어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입니다. 자본이 우리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것 같습니다. 글로벌 경제 제제에서 이런 경향은 더 심해갑니다. 백년지대계라 할 교육도 기능인 생산만을 향해서 브레이크 없는 벤츠처럼 달려가고 있습니다. 역사는 힘 있는 사람들이 지배한다는 논리입니다.
이사야를 비롯한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명기 학파 등, 구약성서 전통에 서 있는 사람들은 역사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역사가 인간의 예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읽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너무 시시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는 이 세상의 선입관과 편견에 완전히 묶여버렸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볼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역사를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보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언자적 눈이 있는 사람만 그걸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하나님이 강한 팔로 다스리실 그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역사를 통해서 자기의 능력을 드러낼 하나님을 온전하게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나그네처럼 기다려야 합니다. 개인은 죽음까지 기다려야 하고, 인류는 세상의 종말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말에 가서 드러날 그 역사의 실체를, 그 통치를, 그 생명의 완성을 사람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선취의 방식으로 이미 완성시켰습니다. 한 인간을 통한 사건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걸 보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제2 이사야가 “보라!”고 선포한 바로 그 하나님이 지금 요한이 “보라!”고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분이십니다. 인류의 죄는 그 어떤 방식으로도 벗을 수 없는 멍에였습니다. 도덕과 윤리, 심지어 종교적 훈련을 통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인류의 죄를 그가 짊어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나락과 저주의 대상인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를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진정으로 위로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런 말이 너무 기독교적으로 정형화된 상투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상투적이지 않은 대답을 찾아보십시오. 인류와 세계를 구원할 다른 길을 제시해보십시오. 저는 이런 논쟁으로 설교의 마지막 시간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성서 기자들의 증언에 따라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십시오. 역사에서 강한 자로 임하실 자라고 이사야가 선포한 그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천년 전 오셨고, 임박한 종말에 우리에게 오실 바로 그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날이 오면 우리는 모두 참된 위로를 얻을 것입니다. 그 위로가 얼마나 거대하고 완전한지 우리는 그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고통과 시련과 허무와 절망이 마치 젊은 시절의 즐거운 에피소드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이런 때를 우리는 지금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기쁘고 설레는 일입니까? 이 기쁨과 설렘을 앞당겨 이웃과 나누며 대림절 둘째 주간을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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