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하는 인간(2)
창 3:8-19
출산과 노동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후에 야훼 하나님이 인간에게 징벌을 내렸습니다. 먼저 이브
에게는 출산의 고생이 주어졌습니다. 그렇다면 타락 이전에는 출산의 고생이 없었다는
말이 되는데, 약간 이상하긴 합니다.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서 생각한다면 타락 이전
에는 출산 행위 자체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인간 복제 기술을 통해서 출산의
고통을 받지 않는 시대가 온다는 것은 곧 새 땅과 새 하늘이 시작되었다는 증거일까요?
이브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징벌은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오히려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이미 아내들이 남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
을 뿐만 아니라 훨씬 큰 힘을 행사한다는 것을 보면, 타락 이후의 이 현실이 시나브로
정리되어 가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아담에게도 매우 혹독한 징벌을 내리셨습니다.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살리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
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17,18절). 선악과를 따먹는 즉시 죽어야만 했
던 아담이 비록 노동의 강도는 높아졌지만 그래도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만 해도 하나님
의 은총이긴 합니다만, 에덴 동산의 삶과 비교할 때 이제 아담의 삶은 견뎌내기 힘들 정
도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어쨌든지 이브와 아담에게 내린 야훼 하나님의 징벌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내용적
인 면에서는 결국 똑같습니다. 출산이나 노동이나 모두 생명의 본질에 속한 것이라는 점
에서 그렇습니다. 출산이 없으면 지구상에 있다가 사라진 수많은 동물들처럼 인간도 사
라질 것이며, 노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설화 형식을 빌려서 이 문제를
해명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의 삶에 대한 매우 정확한 통찰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지만 이브와 아담은 여전히 출산과 노동을 통해서 생명을 지속해나갈 수 있었습니
다. 다만 그 두 행위에는 엄청난 수고가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만약 인간이 출산과 노동
을 포기하거나 또는 그것에 따르는 고생을 감내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자신의 본질을 외
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창세기와 같은 고대 문서의 이러한 가르침을 가볍
게 여기고 자신들이 생산해내는 기술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볼 때 과학적인 지식이 짧았던 고대인들의 통찰은 우리에게 더 이상 설득력이 없는 걸까
요?
땅의 저주
창세기 기자는 아담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인
땅은 원래 아름답습니다. 모세의 전승에 의하면 땅은 거룩합니다. 그 땅은 하나님에게
속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기자는 이 땅이 이미 저주를 받았다고 고발합니다. 창세기 4
장으로 넘어가면서 아벨의 피로 얼룩진 땅은 또 다시 저주를 받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카인을 이렇게 다그치십니다. "네가 아무리 애써 땅을 갈아도 이 땅은 더 이상 소출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창 4:12). 3천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창세기 기자는 땅이 저
주를 받았다고 연달아서 고발하고 있습니까? 어떤 엄청난 사건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아
무런 영농 기술도 없이 순전히 인간의 노동력만으로 농사를 지어야 했던 그들에게 이 땅
은 무언가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가시덤불과 엉겅퀴
를 내는 땅과의 싸움에서 그들이 감당해야할 생존의 무게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입에 풀칠하는 것조차 보장되지 않은 현실 속에서 땅이 저주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
연스럽습니다.
오늘 우리의 눈에 땅은 어떻게 보입니까? 그냥 우리가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여전히
꽃이 피고, 논밭 농사가 되고, 과일이 열리니까 풍요로운 땅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심층
적으로 이 땅은 또다시 저주받은 곳으로 변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땅의 산성화라든가,
갯벌의 훼손이라든가, 고속도로 및 고속철 공사로 인한 산과 강의 맥이 끊기는 일, 인간
의 몸에 축적되는 독성, 그로 인한 정자 수의 감소 등등, 먹고살며 소비하고 즐기는 일
에 마음을 빼앗긴 현대인들이 실감하지는 못하지만 이 땅은 신음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혹은 우리가 모르는 사시에 더 큰 일들이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전문
가들의 경고대로 이 생태계는 어느 상태까지는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되지만 그 고비에 이
르게 되면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해체된다고 합니다. 앞으로 10년 후가 그 고
비일지, 아니면 20년 후일지 모르지만 이 땅은 그렇게 병들어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
니다.
다른 한편으로 생존의 위기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주변에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저주받은 땅을 생각하게 됩니다. 끼니를 걱정하는 분들이 아니라면 땅
이 저주받았다는 창세기 기자의 증언이 별로 심각하게 들리지 않겠지만, 우리 주변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며
칠 전 밤 열 한시가 넘어 교회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 천호 아파트를 나서고 있는데, 허
름한 옷을 입은 어떤 여자가 아파트의 분리 수거대 앞에서 종이를 챙겨 리어카에 싣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부슬비가 약간 뿌리는 그 늦은 시각에 폐지를 수집하고 있는 사람이
라면 끼니 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겠지요. 이 늦은 시간에 이걸 모아서 어디로
갖고 가느냐고 물으니까 귀찮다는 듯이 아무 대답이 없더군요. 하양 시내에는 그렇게 살
아가는 사람이 남녀 각각 두 명씩 4명 정도 됩니다. 북한 주민들이나 동남 아시아, 그리
고 아프리카까지 지역을 넓혀서 본다면 땅은 여전히 저주받은 상태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담 죄는?
성서 기자는 땅이 저주받는 것은 '아담 때문'이라고 합니다. 야훼 하나님이 먹지 말
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아담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토대인 땅까지 저주를
받았습니다. 성서 기자의 직관은 아주 정확합니다. 인간이 자연보다 잘난 척 하지만 실
제로는 인간 때문에 땅은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만약 인간이 없었다면 땅이 저주받을
일이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여기서 아담이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진지하게 생
각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성서의 진술을 상투적으로 해석하거나 또는 핵심을 놓치고 변
죽만 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개의 기독교 신자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이야기를
읽고 흡사 동화책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고 생각하
고 맙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아주 옛날,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처럼 여깁니
다. 아니면 그것을 실존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원죄와 연결시킬 뿐입니다. 아담과 이브의
죄가 우리에게까지 전달된다는 뜻으로 해석해서 늘 이런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합
니다. 이 사건이 바로 그런 것일까요? 우리를 숙명적으로 죄에 묶어두기 위해서 창세기
기자는 아담의 죄와 하나님의 징벌과 땅의 저주를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아담
이 야훼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는 말씀의 리얼리티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질문해야만 합
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자이십니다. 그분은 바로 생명
의 영이신 성령이기도 하십니다. 따라서 생명의 영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말은 곧 아담이 생명의 길을 따르지 않고 역행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땅이 저주를 받
게 된 이유는 곧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이 생명의 목소리를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노장 식으로 표현한다면 도와 자연의 소리를 듣지 않고 인위적이고 의도적으로, 인간 중
심적으로 판단하고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서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이 창세기 기자의 진술을 조금 더 구체적
으로 이해하려면 생명이 무엇인지, 또는 생명의 영에게 불순종했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아야 하는데, 여기서 우리의 어려움은 하나님을 생명의 영이라고 표현할 때의 그 '생
명'이 무엇인지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어쩌면 생명을 아는 것이 곧 하나
님을 아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생명은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내용입니
다. 저는 그것을 직접 설명하기보다는 거꾸로 반생명적 현상의 하나를 통해서 간접적으
로 접근하려고 합니다.
오늘 이 시대에 가장 반(反)생명적인 현상은 곧 소비 중심의 삶입니다. 사람이 생명
을 누리려고 하는 모든 소비 행위들이 결국은 생명을 파괴하는 쪽으로 진행된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이긴 하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물론 인간이 육신을 갖고 살고 있으며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이상 소비는 어쩔 수 없습니다. 밥도 먹어야 하고 다시 배설해야하고, 학
교도 운영해야 하기 때문에 소비는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오늘 현대의 도시 사회가 저지
르고 있는 소비는 약간의 과소비를 지나서 근본적으로 소비 지향적 특성을 보이고 있습
니다. 어쩌면 "누가 누가 소비를 잘하나?" 경쟁을 벌이듯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화장품과 양주 소비가 제일 심하다거나, 고급 아파트에 입주하면서 내장재를
몽땅 갈아치운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돈들이 많기는 많은 모양이다" 하고 그냥 지나쳐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교육의 과소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자기 자식에게
만은 특별 교육을 제공하고 싶어하는 부모의 마음이야 이해할 수 있지만 교육 마저 소비
의 수단으로 변하고 있는 이 시대 정신의 반생명성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설
교를 작성하고 있는 이 시간에(5월21일, 밤 10시 반쯤) 가톨릭 대학교 학생들이 축제 마
지막 이벤트로 불꽃놀이를 하는지 폭탄 터지는 듯한 소리가 하양을 흔들어 놓습니다. 예
비 지성인들인 대학생들이 한 순간의 불꽃놀이를 위해서, 또는 유명 사회자를 초청하면
서 수백 만원 씩 소비하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도 젊은이
들의 낭만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예쁘게 보이고 싶은 여성들의 심리를 그렇게 빈정대려
는 것도 아닙니다. 그 몇 가지 현상 자체보다는 이 시대가 날이 갈수록 소비 중심적 패
러다임으로 빠져드는 것을 쓸데없이 걱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대의
소비 지향적 삶은 결코 생명을 인간을 살리는 게 아니라 병들게 하고, 더 나아가서 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생명의 목소리를 거역한 아담의 죄는 오늘날 우리에게
소비 지향적 삶의 태도와 똑같습니다. 오늘 기독교인들 중에서 소비 지향성이 죄라는 사
실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오늘의 시대가 얼마나 소비 지향적인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한 마디만 덧
붙이겠습니다. 지상 목표인 경제 발전을 위해서 소비의 극대화를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집단은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비교적 진보적 입장을 보이고 있는 민주노동당마저 이런 틀
에서 별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지난 대선 때 권영길 씨는 "여러분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멘트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번 총선을 즈음해서도 그들은 노동
자들의 수입이 많아져야 소비가 늘어나고, 소비가 늘어나면 공장이 잘 돌아간다는 논리
를 폈습니다. 부의 재분배라는 미시적 구조에서는 이들의 말이 타당하지만 결국 이들도
이 시대의 소비 지향적 구조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은총으로서의 노동
아담의 죄로 인해 저주받은 땅이 곧 인간이 살아가야 할 현실이라고 성서는 말합니
다. 고대 사회는 말 그대로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살았습니다." 땅은 인간이 먹을 수 없
는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냅니다. 인류의 역사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의 흔적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노예처럼 평생 중노동을 하면서 살지 않기 위해서, 그리
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제거하기 위해서 그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상상 부분에서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소와 말의 힘을 빌려서 고생을 약간은 면하게 되었고, 경우에 따
라서는 노예를 이용하거나 머슴을 두고 편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자연과학이
발전한 이후에는 기계의 힘에 의해서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상당히 자유로워졌습니다. 더
구나 자본의 축적되는 과정에서 자본과 부가 인간을 먹여 살리는 구실을 하게 되었습니
다. 그런 방식으로 지금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산다는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인간이 바꾸어놓은 이 세계 질서가 과연 구원의 길입니까? 오히려 고대
와는 다른 방식으로 땅이 저주를 받게 되었고, 노동의 소외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합
니다.
저는 지금 전문가도 아니면서 인간과 경제와 노동의 관계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성
서의 가르침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저주받은 땅에서 살아야하기 때문에 죽도록
노동해야 먹고산다는 말씀이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징벌 같지만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
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데카르트의 표현처럼 인간은 사유함
으로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여성 신학자 도로테 죌레의 표현대로 인간은 사랑하고 노동
함으로써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노동하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마 대개의 사람들은 노동함으로 인간이 된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해
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니, 본질이니, 하는 말은 귀에 와 닿지 않고
다른 사람들처럼 좋은 집에서 온갖 것을 갖추어놓고 마음껏 소비하며 사는 게 소원이라
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성서의 가르침이 옳다고 생각합
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소비 지향적인 삶의 구조에서 벗어
나서 '죽도록 고생하면서' 먹고사는 길밖에 인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말씀이 너무 비관적으로 들리십니까? 숙명주의입니까? 이 풍요와 소비의 시대
와 어울리지 않는 비현실적인 외침인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산다는 성서기자의 진술은 매우 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지구에서 다른 사람과 더
불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소비 지향성으로부터 존재
지향성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모두가 고생해서 먹고사는 데 만족하는 삶의
태도를 유지하기만 한다면 이 지구는 충분한 먹거리와 입을거리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가 좀 가난해지더라도 다른 나라 사람들과 더불어서 생존해야 한
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국가 간의 분쟁은 대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지금 이라크에서 벌
어지는 야만스러운 폭력의 뿌리는 자신들만 풍요롭게 살아야겠다는 미국의 패권주의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쩌면 인류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국가
와 국가 사이에서 이렇게 살다가 모두 망하는 길을 가게 될 것 같습니다.
이제 생산과 소비의 악순환 속에서 삶의 의미를 훼손시킬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가시
덤불과 엉겅퀴를 만들어내고, 계속해서 땅을 저주받게 만드는 이 야만스러운 문명의 시
대에서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가 맡은 선교적 사명은 명백합니다. 더 이상 경제 발전을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가난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사는
것이 징벌이 아니라 은총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선포해야 합니다. 소비가 아니라 노동이
야말로 인간이 되는 길이며, 더구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교회의 선교적 구조 안에
담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오늘 함께 예배를 드리는 작은 교회와 자연학교가 모범적이라고 생각
됩니다. 작고 가난하기 때문에 과소비 할 여력도 없습니다. 실제로 노동의 구원론적 지
평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저주받은 땅을 살려내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는 점에서
생명 지향적 선교 공동체로서 '딱'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고단한 길인지 모르지만
이미 이런 길에서 종말론적 구원의 신비를 발견한 분들의 공동체이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휘파람을 불며 이 길을 가고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2004.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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