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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누가 내 어머니인가?

mms://wm-001.cafe24.com/dbia/070513.MP32007.05.13. 요 19:25-27
누가 내 어머니인가?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지난 주일은 어린이 주일로, 오늘은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부모와 자녀들의 관계는 이렇게 특별한 절기를 지키기보다는 바른 신앙과 최소한의 상식만으로도 얼마든지 원만하게 주어질 수 있기 때문에 어린이 주일이니 어버이 주일이니 하며 지킨다는 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절기가 한국사회에 안에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고, 기독교 신앙의 차원에서도 그런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이런 절기를 마다할 이유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어버이 주일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바로 그 순간에 애제자인 요한에게 어머니의 노후를 부탁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유언입니다. 누구나 죽음에 임박해서는 가장 절실하고 정직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유언은 법적인 효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슴 깊은 곳에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염려가 자리하고 있다는 이야기로 새길 수 있는 사건은 어버이 주일의 성서본문으로 안성맞춤인 것 같습니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본문에 의지해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효자가 되어야 한다고 설교할 것 같군요. 본문이 과연 그것을 말하는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효자와 효녀로 살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어른을 공경해야하는지 성서말씀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서른 세 살의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고 있습니다. 성서와 기독교 초기 문헌에서 예수님이 결혼했다는 말을 발견할 수 없는 걸 보면 그가 결혼하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그런 그가 지금 죽음 직전에 처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처형 장면을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은 상상할 수 있겠지요? 그 당시에 가장 처참한 사형제도였습니다. 우리의 옛 조선시대와 비교하자면 능지처참(陵遲處斬)에 해당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있고 그 밑에서 로마병사들이 예수님의 옷가지를 나눠가졌습니다. 유대의 한 젊은이는 무고한 죽음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그 순간에 또 다른 젊은이들은 작은 이익을 챙기고 있습니다. 이런 장면은 비극인가요, 희극인가요? 그러나 이상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 늘 일어나니까요.
요한은 이런 끔찍스러운 장면에 이어서 새로운 장면을 전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 그리고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출신 마리아였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의 저자이며 예수의 제자인 요한입니다. 그 이외의 인물들이 더 있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이렇게 중요한 장면에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빠졌다는 게 이상하긴 합니다. 그는 지금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자책감으로 어디로 숨어버렸는지요.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제자 요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요한의 부연설명에 따르면 그 이후로 그 제자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여기까지인데, 그 뒤로 이어지는 말씀을 연결해서 읽어야만 본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흐름이 중요하니까요. 28-30절에서 예수님은 두 마디 말씀을 더 하십니다. 하나는 “목마르다.”이며 다른 하나는 “이제 다 이루어졌다.”입니다. 그 말씀 후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31절 이하의 설명은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체를 처리하는 내용입니다.
여러분은 요한이 전하는 이런 일련의 보도를 읽으면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시나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유언입니다. 목마르다는 말씀은 육체적인 고통에서 나오는 비명입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운명에서 일어난 인류구원의 성취에 대한 증언이며 고백입니다. 전자가 예수님의 인성을 그대로 노출한다면, 후자는 신성을 가리킵니다. 이 두 마디 말씀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정체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요한복음 신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이야기는 조금 이상합니다. 어머니를 제자인 요한에게 부탁하는 일이 예수님에게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예수님의 메시아적 삶이 종결되는 그 순간에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말씀이었을까요? 아마 어떤 분들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셨지만 육신적으로 마리아의 아들이기 때문에 죽는 마당에 어머니의 노후를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요.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효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언급은 메시아의 죽음이라는 그 사건의 무게에 비추어 지나치게 가볍고, 안이해 보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누구이기에 절체절명의 이 순간에 중심인물로 등장하나요? 성서는 그녀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만, 로마 가톨릭교회는 마리아 승천일을 지킬 정도로 마리아 숭배의 경향이 강합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신학의 자료로 인용됩니다. 신학자들 중에 마리아는 바로 로마가톨릭교회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따라가려면 신학석사 학위 공부로도 부족할 겁니다. 우리는 너무 깊숙이 발을 들이지 말고 성서가 말하는 범위 안에서 예수와 마리아와의 관계를 필요한 것만큼 조금 짚으면 됩니다. 질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정체를 알았을까요?
이에 대한 복음서의 설명은 조금씩 다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마리아가 예수를 임신하던 순간부터 무언가 특별한 것을 인식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마가복음 3:20-35절의 말씀은 이런 상황이 아주 복잡하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호숫가에서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있을 때 예수의 친척들이 그를 붙들러 나섰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친척에는 예수의 형제들과 어머니 마리아도 포함됩니다. 그들도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귀신들렸다고 주장하고 다니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의 가족들이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마가복음 3:31절에 따르면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이 들어가 계신 집밖에서 예수를 불러달라고 사람을 들여보냈습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시면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막 3:35)
아들이 염려되어 찾아온 어머니를 뛰어나가 맞아들이지는 못할망정 누가 내 어머니이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바로 형제이고 어머니이다, 하고 말씀하실 게 뭡니까? 이런 장면을 보고 예수님은 인정머리가 없다거나 불효자라고 말하면 곤란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심정을 가진 분이라고 한다면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서가 그런 가족관계에 대해서 가타부타 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증언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사랑과 효도 같은 문제는 성서의 주제가 아니라 그 시대의 관습이고 가치이고 도덕률입니다. 그런 도덕률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서는 어디서나 강조된 것들입니다. 유교적인 가치가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한민족에게는 훨씬 중요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일반적인 도덕률을 반대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무조건 추종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주일공동예배의 설교에 자녀사랑, 효도, 민족주의 같은 것을 주제로 설교할 수 없습니다. 설교는 예수님에게 발생한 하나님 나라를 주제로 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도 역시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의 효심을 가리키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케리그마입니다. 성서텍스트의 이런 깊이를 포착하려면 여러분이 본문을 조금 더 포괄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했습니다. 원칙적으로만 본다면 큰 아들인 예수가 죽으면 그의 동생들이 어머니의 노후를 떠맡아야만 했습니다. 사도행전과 바울의 몇몇 편지에 의하면 예수님에게는 분명히 동생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동생들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지 않고 제자에게 부탁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도대체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님에게서 어머니를 부탁받은 ‘사랑하는 제자’ 요한입니다. 그는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들었을 겁니다. 다른 복음서에 이 사건이 나오지 않는다는 건 이 사건이 요한공동체의 고유한 전승이라는 뜻입니다. 요한은 지금 자기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를 향해서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바로 요한의 어머니이며, 더 나아가서 교회 공동체에 속한 모든 지체들의 어머니입니다. 그녀는 육신의 어머니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신앙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이제 혈육보다는 신앙이 우선하는 공동체가 된 셈입니다. 바로 여기에 앞서 마가복음에서 인용한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형제이며 어머니라고 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중에 하신 다른 말씀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친구, 형제, 부모를 미워하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이나 식구가 원수라는 말씀도 새로운 차원의 가족개념을 가리킵니다. 혹시 이런 말씀을 들으시고 가족을 해체하거나 자신의 불효를 합리화하시는 분들은 없으시겠지요? 제 말씀은 상식적 도덕과 신앙의 본질을 혼동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제 두 딸이 하루빨리 저의 보호로부터 독립하기를 바랍니다. 경제적인 독립은 나중에 한다고 하더라도 정신적으로 우선 독립하기를 바랍니다. 정신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하는 건 어떤 면으로 보아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설령 불효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독립적으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어버이날에 두 딸들이 선물은커녕 작은 꽃 한 송이도 없었고, “고맙습니다.” 는 인사나 문자도 없었기에 섭섭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두 딸 모두 제 각각 바쁜 탓에 깜빡하고 어버이날을 놓쳤겠지요. 앞으로 계속해서 놓친다고 해서 섭섭할 건 전혀 없습니다. 그 아이들이 독립된 인격체로 건강하게 살아가기만 한다면,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해서 살아가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최선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교회 공동체는 인류 미래를 열어 가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가족 개념의 혼란기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지금 혈연 중심의 가족 개념은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미 대가족제가 허물어진지는 오래되었고, 싱글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사회에서 혈연의 가치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처럼 여전히 막강하게 작용합니다. 지난 몇 주간에 걸쳐서 한화그룹의 대표인 김승연 씨가 폭력혐의로 구설수에 오르내리더니 급기야 재벌총수로는 최초로 구속 수감되었습니다. 술집 종업원에게 얻어맞은 아들을 위해서 조폭을 동원하면서까지 대신 앙갚음을 했다고 합니다. 코미디 같은 사건이지만 한국사회가 여전히 혈연중심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입니다. 사실은 아들이나 사위에게 교회를 세습하는 것도 비슷한 현상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핏줄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거기에 묶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그 중심에 둔 공동체입니다. 만약 교회 안에 하나님 나라가 명실상부하게 확보될 수 있다면 지나친 혈연중심주의나 또는 가족 해체로 인해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교회가 지금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매진하고 천착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만약 교회가 계추모임이나 친선단체처럼 끼리 집단으로 머물러 버린다면 그건 또 하나의 혈연 중심주의로 떨어졌다는 의미이겠지요. 현재 극에 달하고 있는 교파주의, 개교회주의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아서 효도하라고 설교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건 상식입니다. 그건 여러분이 각자 처한 위치에서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우리는 근본적인 의미의 가족관계가 무엇이며, 앞으로 어떠해야하는지 질문해야합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형제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혈연중심의 가족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가족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까? 샘터교회에 속한 교우들이 온전히 하나님 나라에 의존해서 살아갈 때 그것이 가능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여러분은 바로 저의 어머니이십니다.
요한복음 19: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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