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깨어 기도하라!
눅 21:25~36, 대림절 첫째 주일, 2021년 11월28일
오늘 설교 본문인 눅 21:25~36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첫째는 25~28절로 “인자가 오는 때”에 벌어질 징조에 관한 이야기이고, 둘째는 29~33절로 “무화과나무의 비유”이며, 셋째는 34~38절로 “깨어 있으라.”라는 권고입니다. 세 이야기가 서로 연결됩니다. 인자가 오는 때는 우주 차원에서 대혼란이 발생합니다. 해와 달과 별에 이상한 징조가 나타나고 대중은 극심한 불안에 휩싸입니다. 대격변의 순간입니다. 무화과나무에 잎이 나고 무성해지는 걸 보면 계절을 알 수 있듯이 우주 차원에서 벌어지는 혼란도 오늘날의 기후변화처럼 그 징조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정신을 차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대혼란과 대재난이 일어나는 때에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요약한 겁니다.
이 세 이야기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날”(헬, ἡμέρα/ 영, day)입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시절의 사람들은 그런 “날”을 의식하면서 살았습니다. 그 “날”에 관한 이야기는 오늘 설교 본문이 시작하기 전인 눅 21:5절부터 나옵니다. 눅 21:11절은 이렇습니다.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눅 21:22~23절에는 명시적으로 “헤메라”라는 명사가 나옵니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오늘 설교 본문에 나오는 세 가지 이야기가 모두 이 “날”과 연관됩니다.
묵시적 대재난
신학 공부에 관심이 많은 분은 눅 21장의 내용이 후기 유대교의 특징인 묵시 사상이라는 사실을 눈치챘을 겁니다. 마 24장과 막 13장도 비슷한 내용을 다룹니다. 이런 묵시 사상을 현대인들은 뜬구름처럼 여깁니다. 우주와 자연에 대한 지식이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이라서 해와 달과 별들의 이상한 징조를 말하고, 구름 타고 오는 인자를 말하는 것이라면서, 묵시 사상을 유치한 동화 정도로 여기는 겁니다. 그건 착각입니다. 2천 년 전 성서를 기록한 사람은 오늘 우리보다 훨씬 더 성숙합니다. 우리는 온갖 지식에 기대서 세상을 표면적으로만 대하지만 그들은 세상의 중심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요즘 우리는 오늘 설교 본문이 말하는 그런 파멸적인 ‘날’을 현실로 경험합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리라고는 그 어떤 전문가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자연과학이 자연을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을 것으로, 즉 일종의 과학만능주의로 세상을 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인간 중심주의가 자리합니다. 근대주의 이후로 인간 지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산업화로 인해서 물질적 풍요가 가능해졌습니다. 많이 먹고 마시고 소비합니다. 육류만 해도 그렇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소고기를 먹는 날은 일 년에 며칠 되지 않았습니다. 소고기 장조림은 부잣집 자녀들의 도시락 반찬이었습니다. 요즘은 육류를 너무 많이 먹어서 오히려 건강을 해칠 지경입니다. 유럽과 북미 부자나라 사람들의 소고기 소비를 조금만 줄여도 세계 식량 문제는 대부분 해결된다고 합니다. 육식 중심의 식문화에 맞추려고 목축업을 산업의 차원에서 처리하다 보니 소, 돼지, 닭을 공장식으로 키울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 특징은 바이러스가 좋아하는 숙주의 밀집화입니다. 적당한 선에서 바이러스와 공생하려면 사람만이 아니라 가축의 밀집도도 낮춰야 하는 게 아닐는지요. 그러려면 일단 육류 소비를 줄여야겠지요. 소와 돼지와 닭을 먹더라도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생명체이니 미안한 마음으로 먹어야지 ‘먹방’ 프로그램에서 보듯이 게임 하듯 먹으니까 공장식 축산업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런 근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바이러스 재난은 끝나지 않을 겁니다. 지금의 위기를 넘기더라도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더 큰 위기가 다시 찾아옵니다. 언젠가는 현생 인류가 대부분 멸절하고 인간 문명과 격리된 일부 소수족만 살아남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의 우리가 원래 아주 오래전 대부분 유인원이 멸절한 빙하기 때 겨우 살아남은 그런 소수종족의 후예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해와 달과 별들이 이상한 조짐을 보이고 민심이 사나워지고, 오늘의 현상으로 바꾸면 인수공통 역병이 돈다는 묵시적 사유는 허황한 게 아니라 지구에서 벌어지는 가장 확실한 현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대재난이 닥치기 전에는 그런 현상과 무관한 듯이 사는 이유는 사람들이 개인의 일상에 과몰입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세상살이에서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는 일이 중요하니까 그런 일상의 질서가 해체되는 그 “날”을 실감하기 어렵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힘든 겁니다. 도박에 완전히 빠진 사람은 자식이 아프다는 말을 들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묵시적 대재난은 인류 전체의 차원만이 아니라 개인의 운명에서 피할 수 없는 엄중한 실존입니다. 우리는 어떤 ‘날’이 되면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이 흔들리는 걸 경험하고, 세상이 어두워지는 걸 느낄 겁니다. 더는 걷지도 못하고 편안하게 숨 쉬지도 못하고 어제 일도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고, 마음이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겉으로 쌩쌩한 사람들만 돌아다니니까 모두가 그런 줄 알지만, 실제로는 크고 작은 묵시적 대재난을 우리가 모두 이미 여기 일상에서 겪고 있습니다.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서 그걸 실감하지 못하거나 막연하게 느낄 뿐입니다. 34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정신이 팔리는 대상이 이 구절에 세 가지로 나옵니다. 방탕은 무언가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태도입니다. 루터 성경은 게걸스럽게 먹는다는 뜻의 fressen으로 번역했습니다. 술 취함은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현상입니다. 생활의 염려도 방탕이나 술 취함이나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합니다. 마음이 둔하게 되면 ‘그 날’이 갑자기 덫처럼 닥칩니다. 여러분도 일상에서 그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대학교에 입학한 게 엊그제 같은데 금방 졸업하게 됩니다. 졸업하는 순간이 오면 그 졸업이 덫처럼 갑자기 닥치는 겁니다. 스무 살이었다가 언젠가 서른 살이 되고, 갑자기 마흔 살이 되고 쉰 살, 예순 살, 칠십 살이 됩니다. 인생살이에서 졸업할 순간이 덫처럼 순식간에 다가옵니다.
세상은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에 떨어지도록 우리를 부추깁니다. 어린아이들에게 건강에 나쁜 간식을 파는 겁니다. 옆을 볼 수 없도록 특수 안대를 가린 경주마처럼 무조건 앞만 향해서 달리라고 합니다. 그런 속도전이 우리의 일상을 완벽하게 장악하니 우리의 마음이 둔하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마음을 사랑이나 안식으로 바꿔도 됩니다. 세상의 요구에 매달리다 보니 사랑의 감수성이 무뎌집니다. 참된 평화와 안식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사십니까? 세월과 더불어서 마음이 예민해집니까, 둔해집니까? 묵시적 대재난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 ‘날’이 가까이 온다는 사실이 현실로 느껴집니까? 여전히 거리가 멀게 생각됩니까?
깨어 있음이란?
이 대목에서 누가복음을 기록한 이가 전해준 예수님의 말씀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이 2천 년 전 예수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만이 아니라 21세기 오늘 우리에게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삶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공동번역 성경이 더 정확하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앞으로 닥쳐올 이 모든 일을 피하여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닥쳐올 모든 일을 우리가 피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도 불의의 사고나 코로나19 대재난이나 늙음과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여기서 피한다는 말은 그런 묵시적 대재난을 당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거기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길은 “인자 앞에 서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자는 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의 번역입니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인자’는 죽을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을 가리키기도 하고, 마지막 때 심판의 전권을 행사할 인물을 가리킵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을 가리킬 때 저 용어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생명 심판자이기에 예수님과 인자를 동일시한 것입니다. 인자 앞에 선다는 말은 예수님 앞에 서는 게 바로 묵시적 대재난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입니다.
인자이신 예수님 앞에 서려면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깨어 있다는 말과 기도한다는 말은 같은 차원에 속합니다. 깨어 있을 때만 기도를 기도답게 드릴 수 있고, 기도를 드릴 때만 깨어 있는 삶입니다. 깨어 있으라거나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을 수없이 듣고 신앙생활을 했기에 우리는 그게 무슨 뜻인지 대충은 압니다. 저는 중학교 1학년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거의 교회 중심으로만 살았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거의 교회에서 살았습니다. 저만이 아니라 당시 교회 학생회 임원들은 다 그렇게 지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신학대학교에 들어갔으니까 교회 안에서 평생 맴돌면서 산 겁니다. 늘 깨어서 기도한다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신학생만이 아니라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청년들은 주일이 되면 온종일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새벽기도회부터 시작해서 주일 밤 성가대나 주일학교 교사나 청년회 임원 기도회를 끝으로 주일 활동이 끝납니다. 교회만 맴도는 방식의 삶이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닙니다. 각자 사는 방식이 다르니까 이 문제도 하나의 기준만으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일주일에 교회는 몇 번이나 오는지, 기도는 몇 번이나 드리는지, 성경은 얼마나 자주 읽는지가 핵심이 아니라 ‘깨어 있는 삶’을 사는지가 핵심입니다. 늘 할렐루야와 아멘을 입에 달고 살아도 깨어 있지 못한 사람이 있고, 겉으로는 별로 종교적인 표시가 보이지 않아도 실제로는 영혼이 명민하게 깨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깨어 있다는 게 실제로 무슨 뜻일까요? 가장 일반적인 차원에서 대답한다면 지금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진지하게 묻고 대답을 찾으면서 그 문제를 항상 생각하는 겁니다. 지루하고 재미없을까요? 길게 남은 분도 있고 얼마 남지 않은 분도 있습니다. 길게 남았다고 해서 안심해도 좋은 건 아니고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서 불안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차이라는 게 너무나 미미해서 크게 가치를 부여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주 짧은 인생을 삽니다. 무슨 방법으로도 그 인생의 길이를 늘일 수 없습니다. 끝나는 순간이 바로 눈앞에 닥쳤다는 사실을 추상적으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들 겁니다. 사람들은 그걸 다 알고 있다고 말할지 모르겠군요. 그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 없으니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알고 있는 사람으로 살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아는 게 아니라 모르는 겁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인생살이를 버텨내다가 곧 떠나야 할 우리는 모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착한 사람은 착한 대로 불쌍하고 못된 사람은 못된 대로 불쌍합니다. 늙은 사람은 늙은 대로 불쌍하고 젊은 사람은 젊은 대로 불쌍합니다. 간혹 독불장군처럼, 공격적으로 사는 사람을 봅니다.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말만 하기에도 짧은 인생살이에서 왜 저토록 화를 내고 매도하고 혐오하고 짜증을 내는지 안타깝고 불쌍해집니다. 그가 만약에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세월이 남아있는지를 또렷하게 인식한다면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을 겁니다. 살아가면서 시시비비를 따지고 책임을 묻는 게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따지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상대방에게 연민을 느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우리도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드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깨어 있다는 말은 곧 인간 실존이 얼마나 불쌍한지를 생생하게 느끼고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깨어 있음의 길?
어떻게 깨어 있을 수 있을까요? 저는 두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오늘 성경 본문이 주는 대답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 신앙 전체에서 얻을 수 있는 대답입니다. 첫 번째 대답은 앞에서 인용한 34절에 이미 나왔습니다.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지는 데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둔해진다는 것은 깨어 있는 것과 반대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깨어 있으려면 마음을 둔하게 만드는 삶의 태도를 버려야겠지요. 게걸스럽게 먹는다고 묘사할 수밖에 없는 방탕함과 어딘가에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술 취함과 세상살이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나야만 우리가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즉 왜 사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생각합니다. 그렇게 깨어 있는 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둔하게 하는 요소들이 매우 매혹적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본 사람은 그게 무엇인지 잘 아실 겁니다. 너무 재미있는 겁니다. 그런 재미에 머무르면 갑자기 그 ‘날’이 덫같이 임하는 걸 경험하고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대답은, 이게 바로 제가 드리고 싶은 대답인데, 하나님 안에서 자기 인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깨어서 기도한다는 말 자체가 하나님 안에서 자기 인생을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안이 아니라면 삶은 추상으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반대로 생각합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이야말로 추상이고, 자신들의 세상이야말로 실체라고 말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실체는 돈과 명예와 권력과 지식과 예술 등등입니다. 그런 것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믿는 사람은 거기에 자기 운명을 걸면 됩니다. 그런 것들과 함께 그들의 운명이 결정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이 영원한 생명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운명에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될 수 있는지에 최대의 관심을 기울이면서 삽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거나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가 되는 길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길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다른 방식으로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인생살이에서 이름을 떨치고 싶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까? 우리는 모두 후자를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예수는 2천 년 전 인간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이를 우리는 초림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 그분은 마지막 ‘그 날’에 다시 오실 겁니다. 이를 우리는 재림이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이미 여기 우리의 삶에 함께하십니다. 이를 우리는 임재라고 말합니다. 대림절 첫 주일을 맞아 우리 모두 그분의 초림을 기억하고,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그분의 임재를 현재 경험함으로써 늘 깨어 기도하는 사람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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