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타 쿰!
요빠에 ‘다비타’라는 여신도가 살고 있었는데, 그 이름은 그리스 말로 ‘도르가’라고 합니다. 다비타는 아람어겠지요. 그 당시 유대를 비롯한 근동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가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죽은 그 여자를 다락방에 눕히고 요빠에서 가까운 리다에 거처하고 있던 베드로를 불렀습니다. 요즘도 사람이 죽었을 때 목사를 부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베드로는 다락방으로 돌라가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뒤 기도를 드리고 누운 시체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비타, 일어나시오.” 그러자 이 여자가 눈을 뜨고 베드로를 바라보며 일어나 앉았다고 합니다. 놀라운 일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보면 조금 섬뜩한 일이기도 합니다. 죽었던 여자가 일어나서 자기 앞에 앉아 기도하고 있는 한 남자를 바라보는 장면을 생각해보세요. 베드로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다시 살아난 도르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소문이 요빠에 퍼지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도르가는 정말 죽었다가 살아난 것일까요? 각자의 생각에 따라서 서로 다를 겁니다. 믿음이 좋다고 자처하는 분들은 당연히 사실이라고 생각할 거고, 그렇지 못한 분들은 글쎄 잘 모르겠네, 할 것입니다. 조금 더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분들은 속으로 저런 일은 일어날 수 없어, 하고 말할지 모르겠군요. 도대체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는 지금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한 여자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그 이야기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이런 일들은 오늘도 일어날 수 있을까요?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다른 데서도 흔히 듣습니다. 요즘도 어떤 사람은 죽어서 천당을 보고 왔다고 선전하면서 다니기도 합니다. 교회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그런 소문들은 흔히 있습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을 관 속에 넣고 장례를 치르는 중에 관 속에서 소리가 나서 열어보니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들도 있습니다. 이런 소문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헛소문인지 분간하기는 힘듭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겉으로만 숨이 끊어졌지 실제로는 죽지 않은 사람을 잘못해서 죽은 것으로 알았다가 몇 시간, 또는 며칠 뒤에서 다시 숨을 쉴 수는 걸 보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으로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건도 그런 것과 비슷한 것이라는 말인가요? 이런 질문의 답을 찾으려면 무조건 “믿어, 안 믿어?” 하고 윽박지르지 말고 성서본문을 좀더 깊이 이성적으로 해석해야만 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진리라고 한다면 믿음만이 아니라 이성적으로도 설득이 가능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죽어 누워있는 이 여자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비타, 일어나시오.” 이 말을 아람어로 바꾸면 “다비타, 쿰”이 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 하신 말씀과 철자만 다르지 완전히 일치합니다.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 5:35절 이하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부모와 세 명의 제자를 데리고 아이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세 명의 제자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다 쿰”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뜻은 “소녀야, 어서 일어나거라.”였습니다. 그러자 그 당시 열 두 살이었던 이 소녀가 일어나서 걸어 다녔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베드로의 활약상을 담고 있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다비타, 일어나시오.” 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베드로가 아닙니다. 그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기껏 해봐야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에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말을 생략한 채 “다비타, 쿰”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사건은 독립적인 게 아니라 앞뒤의 사건과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앞에 나오는 사건을 보십시오. 32-35절에는 중풍에 걸린 애네아가 치유되는 사건이 짤막하게 보도됩니다. 베드로는 누워있는 그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자리를 걷고 일어나시오.” 그러자 애네아는 곧 일어났다고 합니다. 애네아에게 한 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비타에게 한 말에도 포함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누가는 이 두 사건이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다비타 이야기에서는 생략했을 뿐입니다. 애네아의 중풍병을 고치고 다비타를 살린 이는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애네아 이야기와 도르가 이야기는 그 뒤로 이어지는 로마 군대 백부장인 고르넬리오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누가는 지금 고르넬리오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애네아와 도르가 이야기를 서론적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몇 주일 전의 설교 주제가 되었던 고르넬리오 이야기는 이방인 선교라는 사도행전 전체 주제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바로 이 대목이 이방인 선교가 합법적으로 인정받게 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애네아, 도르가, 고르넬리오에 관한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한 가지 사실을 향하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복음이, 즉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유대인들을 넘어서 이방 세계로 뻗쳐나간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위의 설명이 어떤 분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설명보다는 도르가가 정말 죽었다가 살았는지, 그것을 빨리 알고 싶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도 베드로처럼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싶다고 생각할 겁니다. 성서를 읽으면서 불치병에 걸린 사람을 순식간에 고치거나 심지어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런 분은 성서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합니다. 물론 성서는 그런 현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기도합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16:17,18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따르게 될 것인데, 내 이름으로 마귀도 쫓아내고 여러 가지 기이한 언어로 말도 하고 뱀을 쥐거나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것이며 또 병자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이런 말씀에 근거해서 귀신을 쫓아내거나 병자를 치료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일들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런데 나는 아직 그들이 독을 마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똑같은 성경구절인데 왜 어떤 것은 그대로 믿고 어떤 것은 믿지 않는지 모르겠군요.
그들은 믿음은 좋을지 모르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성서의 기적 이야기는 고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통치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데서 벌어지는 어리석음입니다. 성서가 기록되던 2천 년 전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이 우주가 하늘과 땅과 땅속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늘에는 신이 살고, 땅에는 인간이 살고, 땅속에는 악한 영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태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바람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모든 병의 원인을 인간의 죄라고 보았고, 악성 피부병을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고대인들이 우주에 관한 지식이 짧기 때문에 우리보다 어리석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영적으로는 우리보다 훨씬 앞서면 앞섰지 못하지 않았습니다. 물질문명이 미개하기는 했지만 정신적으로는 매우 성숙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나 헬라의 철학자들, 그리고 동양의 장자나 노자 같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비록 과학적으로 아는 게 적어도 영적으로는 아는 게 많았습니다. 어쩌면 요즘도 5살짜리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영적으로 더 성숙할지 모릅니다. 그 아이들은 선입관이 없기 때문에 벌레들이나 꽃과도 나름으로 대화를 할 줄 압니다. 어른들은 항상 돈만 생각하고 자기 자신만 생각하지만 그 아이들은 모든 세계를 향해서 자기를 열어놓고 살아갑니다. 다만 고대인들의 과학문명이 미숙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성서를 기록하고 있는 사람이나 그것을 받아볼 사람들이나 모두 미숙한 고대인들의 세계관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하나님 나라를 고대인들의 관점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통치를 가장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건은 각종 질병의 치유, 축귀, 여러 종류의 초자연적 기적들, 그리고 특별한 경우에 죽은 자의 소생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죽은 자의 소생에 해당됩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히 베드로가 죽었던 도르가를 살렸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진술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죽은 자의 소생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누가 꾸며낸 거냐, 하고 반문할지 모르겠군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죽은 자의 소생은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병들거나 사고로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늙어 죽습니다. 다시 죽을 몸으로 소생하는 것은 그렇게 결정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성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말합니다. 즉 죽은 자의 소생에 관한 이야기는 그것 자체가 아니라 다른 사실을 전달하기 위한 통로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도르가 사건은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 베드로의 능력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며, 또한 도르가의 소생 사건 자체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의 종교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누가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그 당시 신화적 세계관에서 출현한 도르가의 소생이라는 전승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이 사건이 야이로의 딸 이야기와 거의 비슷한 구조로 진행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도르가를 살린 것도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입니다. 그 예수는 바로 앞에 나오는 애네나의 중풍병을 고치신 분이십니다. 그런 능력의 예수님은 이제 이방인에게 주님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은 우리는 바로 그 사실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구원 통치가 일어났다는 사실 말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났나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게 그거 아닌가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축귀, 병 치유, 기적사건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은 오늘의 현실 역사 앞에서 무기력합니다. 고대의 신화적 세계관에 머물러버림으로써 결국 탈역사주의에 빠져들고 맙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해서, 어떤 아이가 이미 중학생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유치원 아이처럼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실제로 기다린다면 문제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반해 고대의 신화에 마음을 두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통치와 일치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두는 사람은 역사 앞에서 책임적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주술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삶이 향상되는 것에 중심을 두고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정신병에 걸린 사람은 정신병원에 가는 게 좋습니다. 육체적인 병에 걸린 사람은 해당되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겠지요. 고대인들이 요즘의 의사들을 본다면 아마 신처럼 떠받을 겁니다. 우리는 2천 년 전과 전혀 다른 시대에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해야 할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언어로 하나님의 생명사건을 해명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즘도 여전히 도르가가 죽어 누워있는 다락방과 같은 현장이나 사건은 많습니다. 생명을 잃는 개인과 사회와 각종 집단들이 많습니다. 거의 60년 가까이 분단체제로 나뉘어 있는 한민족은 어떻습니까? 대학사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이들을 어떻게 살려내실까요? 특히 다비타 사건이 바로 이방인 선교의 길목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죽음으로 생명을 얻는 능력이 확보되어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선교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능력이 주어진다면 굳이 ‘총동원 주일’과 같은 이벤트를 벌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복음은 전파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주어졌을까요? 우리 개인과 샘터교회에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나가는 능력이 주어졌을까요? 그런 능력이 확 눈에 뜨이게 나타나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증거는 우리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내 삶에 생명의 영이 풍요로워지는지 아닌지 살펴보십시오. “다비타 쿰”은 곧 예수의 명령이며 위로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십시오. 다비타가 눈을 떴듯이 생명의 눈을 뜹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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