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4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hZIWuzBW_9Y?si=xfa_CwPU1XXgMLY8
▣ 들어가는 말
-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있을까요?
지난 주일 오후, 교회에서 송년 나눔을 하며 느낀 게 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같은 공간에서, 같은 예배를 드리며, 같은 교회라는 이름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같은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며 나름대로 비슷한 삶의 방향과 신앙을 추구하며,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여기며 살아왔을 텐데… 문득 깨닫게 된 사실은 우리는 서로의 삶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배려일 수도 있고, 성격 탓일 수도 있고,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지 주저하는 것일 수도, 두려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서로의 삶을 묻지 않았고,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거의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 순간 이런 의문이 생겼습니다. 신앙이란 본래 관계 맺기일 텐데, 관계에서 멀어지고 단절되며 추구하는 신앙은 너무 기이한 것 아닐까?
존 스타인벡, 『에덴의 동쪽』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난 잘 모르겠구나.” 애덤이 말했다. “너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겠어.”… “아버지가 물으시면 대답할게요.” 그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래, 나는 묻지 않았어. 너에 대해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지. 나는 네 할아버지만큼이나 나쁜 아버지다.”… “이제야 그분이 말한 뜻을 알겠어. 나는 네 할아버지와 똑같아. 그분은 나를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나 역시 지금껏 내 자식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어. 그게 바로 새뮤얼이 내게 일깨워 주고 싶어 했던 거란걸 이제야 알겠구나.”… “이제 네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 줄 수 있겠니?” “너도 알겠지만, 인간이 되는 데는 책임이 따르는 거야. 공기가 채우고 있는 공간에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단다. 너는 어떤 아이지?”
뭔가 어긋나고 있는 아들을 걱정하는 아버지 애덤이 뭔가를 깨닫는 장면입니다. 아들의 잘못된 모습만을 보았는데, 깨닫고 보니 한 번도 아들을 온전한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지요. 자신의 아버지가 자기에게 한 번도 묻지 않았듯, 자신도 아들을 향해 묻지 않았던 것이지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줄 수 있을까요?” 서로를 향해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같은 공간에 이렇게 있는 것은 물건이나 사물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은 의미는 아닐 테니 말입니다. 보석처럼 빛나는 존재를 향해 말을 걸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 신을 향해 가는 길
- 떠남
우리는 늘 하나님을 향해 가고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새해가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다시 하나님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의 삶의 터전을 떠나 신을 향해 멀리멀리 길을 떠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여기서 “떠나”와 “가라”의 어원적 의미를 살펴보면, ‘가라’는 ‘레크’인데, 성경에서 단순한 물리적 이동을 나타내는 동사가 아니라 삶의 방식, 태도, 존재의 방향을 가리키는 동사로 사용됩니다. ‘떠나’는 ‘르카’인데, ‘너에게로’ ‘너 자신을 향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종합해 보면, “너 자신에게로 가라” 혹은 “너의 참된 자리로 가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삶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다시 설정하라는 요청인 거지요. 이 점에서 아브라함에게 요구된 것은 ‘새로운 땅으로의 이주’가 아니라 잘못 놓여 있던 삶의 중심을 하나님 쪽으로 되돌려 놓는 회심(turning)에 가깝습니다. 성서의 언어로 말하면, 이는 ‘떠남’이라기보다 ‘귀환’의 성격을 띱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떠나야 할 대상들은 모두 ‘궁극적 신뢰의 대상’이었던 것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세 가지를 떠나라고 하십니다.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 이 셋은 고대 근동 사회에서 정체성, 안전, 미래 보장의 근거였습니다. 다시 말해, 이것들은 단순한 생활 기반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맡기고 의지하던 세계의 질서이지요. 성경적으로 볼 때, 이것은 ‘악한 것’을 떠나는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해 삶의 중심이 되어 버린 것에서부터 돌아서라는 요청이지요. 따라서 “떠나라”라는 말은 공간 이동이 아니라, 신뢰의 방향을 바꾸라는 요청, 곧 하나님께로 ‘되돌아오라’라는 부르심으로 읽힙니다.
결국, 하나님이 명령하신,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이라는 표현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목적지가 명확하다면 여행 또는 이주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목적지가 비어 있다면 관계의 재정립이 목적입니다. 아브라함의 여정에서 확정된 것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 여정은 어디에 도착하느냐보다 누구를 신뢰하며 걷느냐가 중심이 됩니다. 즉, 이 부르심은 ‘미래의 장소’로 가라는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을 삶의 기준점으로 다시 삼으라는 부르심, 곧 신에게로 돌아오는 여정, 삶의 방향 전환입니다.
- 탕자의 귀향
탕자의 비유에서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눅 15:17) 여기서 “스스로 돌이켜”라는 말을 원문에 가깝게 다시 해석하면, “그가 자기 자신에게로 와서”라는 의미가 됩니다. 영어로 보면 훨씬 더 쉽게 이해가 되는데, NRSV와 ESV에는 “But when he came to himself”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원어의 뜻을 훨씬 더 충실히 살려서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돌이키다’ ‘회개하다’ ‘후회하다’ 같은 도덕적, 종교적인 회개를 의미하는 동사는 전혀 사용되지 않습니다. 즉, 원문은 윤리적 판단이 아니라 존재론적 상태의 변화를 묘사합니다. 한글 번역은 이 장면이 회개의 장면임을 설명, 강조하기 위해 해석, 의역한 것이지요.
그러나 제가 이렇게 원어적 의미를 살펴본 이유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회개 이전에 ‘존재의 자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회개와 관련된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장면은 죄의 반성보다, 먼저 존재의 회복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적 회개는 ‘자기혐오’가 아니라 ‘자기 회복’에서 시작됩니다. “스스로 돌이켜”라는 한글 번역은 회개를 도덕적 각성으로 제한하고 맙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로 돌아와”라는 원문은 회개를 존재의 회복, 곧 상실된 자기 자신으로의 귀환으로 이해하게 하지요. 이 말은 회개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벌을 두려워하는 후회가 아니라, 잃어버린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 방향의 전환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을 살펴보면, 그림 속 탕자는 온전히 서 있지도 못합니다. 그는 거의 무너진 채, 아버지의 품에 몸을 맡기고 있습니다. 그의 발은 상처투성이고, 한쪽 신발은 벗겨져 있지요. 중요한 것은 ‘돌아왔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는 더 이상 스스로 세울 힘조차 없습니다. 이 그림은 말합니다. 귀향은 목적지에 도달한 승리자를 묘사한 장면이 아니라, 더 이상 떠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자리라고 말입니다. 그림의 중심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품입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회심은 전진의 장면이 아니라 항복의 장면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의 중심은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두 손입니다. 한 손은 단단하고, 다른 한 손은 부드럽습니다. 판단과 심판이 아니라, 사랑과 회복을 위한 손입니다.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에서 탕자의 비유가 말하는 또 하나의 거리가 있습니다. 탕자만이 아니라 형의 거리를 함께 보여 줍니다. 형은 집에 있었습니다. 떠난 적도 없고, 규범을 어긴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 관계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함께 살았지만, 함께 기뻐하지 못했고 곁에 있었지만, 마음은 멀어져 있었습니다. 이 그림은 묻습니다. “떠나있었던 이는 과연 누구였는가?” 그래서 이 맥락에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다시 길 위에 선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께 돌아오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서로에게 다시 다가가는 일이고, 타인의 삶을 다시 묻기 시작하는 것이며, 신앙을 관계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신앙은 혼자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얕아질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서로의 삶 안으로 들어가는 용기 속에서 자랍니다. 오늘 교회 안에서 가장 멀리 떠나 있는 사람은, 어쩌면 한 번도 교회를 떠난 적 없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 신께 가는 길은 나에게로 가는 길
야구를 참 좋아하는데요, 야구 경기를 보면 우리의 인생 여정과 닮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야구에서 홈을 밟기 위해서는, 득점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홈을 떠나야 합니다. 홈을 떠나는 것은 다시 홈으로 돌아오기 위해서이지요. 홈을 떠나 1루, 2루, 3루로 멀리멀리 떠나지만, 그것은 과정이지 목적지는 아닙니다. 홈을 잃어버리게 되면 득점을 할 수 없지요. 야구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사실은 홈에 머물러 있으면 절대 득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홈으로 돌아오기 위해 홈을 떠나야 한다는 재미있는 역설이지요. 신앙도 그렇습니다. 신을 향해 나아간다고 생각하며 달리지만, 자칫 처음의 자리를 잊어버리게 되면 끈 떨어진 연이 되고 맙니다. 신앙의 여정은 결국 우리를 ‘본래의 자리’,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 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오디세우스는 영광을 얻으러 떠난 인물입니다. 고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전쟁, 트로이 전쟁 승리의 주역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승리 이후의 이야기이지요.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수많은 유혹과 모험을 겪습니다. 그 이야기를 통해 호메로스가 진짜 말하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스 연합군 최고의 장군이자 전쟁에서는 ‘최고의 승리자’ 아가멤논은 집으로 돌아 가지만 아내인 클리타임네스트라에 의해 살해당하고 맙니다. 이에 비해 오디세우스는 긴 방황과 실패의 시간을 보낸 후 끝내 귀향에 성공합니다. 아내와 영지, 자기 이름을 되찾지요. 오디세우스는 영광을 찾아 떠났지만, 그의 진정한 목적은 정복이 아니라 귀향이었던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된 것이지요. 이를 통해 호메로스는 묻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진정한 승리인가?” 적을 무너뜨리는 것인가? 아니면 진짜 자기 자리를 찾는 것, 진짜 자기가 되는 것인가? 오디세우스의 서사는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돌아오지 못했다면 그는 영웅이 아니라 길 잃은 방랑자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신을 향한 우리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은 우리를 낯선 곳으로 이끄는 존재가 아니라, 진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존재입니다.
▣ 나가는 말
- 떠남이 아니라 돌아옴이다.
우리는 신앙을 하나님을 향해 점점 더 나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떠나있었고, 신앙은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탕자는 새로운 목적지를 찾지 않습니다. 그는 단 하나의 방향만을 선택합니다. 아버지께로. 그래서 ‘다시 길 위에 선다’라는 것은 더 멀리 가겠다는 결심이 아니라, 원래 있어야 할 자리의 방향을 다시 붙드는 일입니다.
- 공동체에서 멀어진 신앙
이제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말하면서, 정작 서로의 이름과 삶은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신앙을 고백하면서, 관계의 책임에서는 물러서 있지는 않은지. 관계에서 멀어진 신앙은 점점 삶에서 유리된 신앙이 됩니다. 그 신앙은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이 아니라 사유하는 대상으로 만들고, 이웃을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견뎌야 할 존재로 만듭니다. 그러나 복음은 다르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관계로 오신 분이시고, 신앙은 언제나 관계 안에서만 살아 있습니다.
신앙은 본래 관계의 언어입니다. 성경에서 신앙은 언제나 관계의 언어로 말해집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은 점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분리된 채, 개인의 내면이나 도덕적 성취, 혹은 종교적 습관으로 축소되어 왔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함께 예배를 드리지만 서로의 기쁨과 슬픔에는 무관한 공동체가 되었고, 같은 신앙고백을 하지만 서로의 삶에는 거의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관계에서 멀어진 신앙, 신앙이 관계에서 멀어질수록, 그것은 점점 기이한 모습을 띠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람의 이름과 얼굴은 점점 잊어버리고, 은혜를 말하면서 타인의 고통에는 둔감해지고, 순종을 말하면서 정작 함께 살아가는 책임은 회피하게 됩니다. 이것은 경건의 심화가 아니라, 삶으로부터 유리된 신앙의 왜곡입니다. 관계없는 신앙은 하나님을 ‘만나는 분’이 아니라 ‘사유하는 대상’으로 만들고, 이웃을 ‘함께 살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견뎌야 할 타자’로 만듭니다.
- 다시 길 위에 선다는 것의 참된 의미
그러므로 새해에 우리가 다시 길 위에 선다는 것은 더 많은 계획을 세우는 일이 아니라 더 경건해 보이는 목표를 세우는 일이 아니라 다시 서로에게 다가가는 일이며, 다시 하나님과 이웃 사이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신앙은 혼자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서툴러지면서도 서로의 삶을 묻기 시작할 때 자랍니다.
2026년의 첫 주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얼마나 멀리 갈 준비가 되었느냐?”가 아니라 “이제 돌아올 준비는 되었느냐?” 새해는 새로운 길을 만드는 시간이 아니라, 잃어버린 방향을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언제나 먼저 우리를 안고 계시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 자리로, 다시 길 위에 서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신앙은 관계 맺기입니다. 하나님과, 그리고 서로와. 관계에서 멀어지며 추구하는 신앙은 경건해 보일 수는 있어도, 복음적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관계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해의 신앙은 더 많이 아는 신앙이 아니라, 다시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하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그 자리가 우리가 다시 서야 할 참된 길 위의 자리일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길 위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다시 서로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겠다는 결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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