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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다윗과 예루살렘 성전

다윗과 예루살렘 성전

삼하 7:1-14(), 성령강림후 여덟째 주일, 2015719

 

1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2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3 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 4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6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까지 집에 살지 아니하고 장막과 성막 안에서 다녔나니 7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8 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와 같이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9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원수를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땅에서 위대한 자들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 10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그를 심고 그를 거주하게 하고 다시 옮기지 못하게 하며 악한 종류로 전과 같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게 하여 11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예수님에게 붙어 다니는 호칭 중의 하나는 다윗의 자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다윗을 빼놓고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왕조가 바로 다윗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성계를 빼놓고 조선의 역사를 설명할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은 아닙니다. 초대 왕은 사울입니다. 사울은 불행하게도 자기 아들들에게 왕위를 넘겨줄 수 없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 자신과 큰 아들 요나단이 같은 날 전사했습니다. 당시에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서 망명을 떠났다가 이스라엘의 남쪽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습니다. 사울과 요나단이 죽은 다음에 다윗은 자신의 거점 지역인 유대에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 내용이 삼하 2장에 나옵니다. 얼마 후에 사울의 또 다른 아들인 이스보셋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에는 사울이 살아있을 때 그 수하에서 활동하던 아브넬 장군이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이스보셋의 이스라엘과 다윗의 유다는 오랫동안 전쟁을 했고, 그 와중에 이스라엘의 국력이 쇠퇴합니다. 이스라엘의 실권을 쥐고 있던 아브넬 장군이 다윗의 요압 장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이스라엘 왕 이스보셋은 신하에게 살해당합니다. 다윗의 정적이 모두 제거된 것입니다. 이후로 다윗은 통일왕국의 유일한 왕이 되었습니다. 삼하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라를 통일한 다윗은 세 가지 프로젝트를 구상했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 성() 정복입니다. 당시까지 여부스 족이 살고 있던 예루살렘은 천연요새이기도 하고, 이스라엘이 일종의 내전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삼하 5:6-12절 사이에 예루살렘 여부스 족과의 전쟁이 이야기가 간략하게 나옵니다. 워낙 산전수전 다 겪은 천하의 다윗인지라 예상보다 쉽게 예루살렘을 정복한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을 다윗 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했습니다. 두 번째 프로젝트는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오는 것입니다. 법궤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 세 가지를 담아두는 상자입니다. 세 가지는 십계명 돌판,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입니다. 나라가 통일되기 전에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법궤가 아비나답의 집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삼하 6:1절 이하에 따르면 다윗은 삼만 명의 일꾼(군사)들을 모아서 법궤를 가지러 갔다고 합니다. 단순히 법궤를 운송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필요한 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믿음이 뜨겁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거국적인 행사를 치른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행사(퍼포먼스)이기도 했습니다. 아직 다윗을 통일왕국의 왕으로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 여전히 사울 왕조에 직간접적으로 인연이 있는 사람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큰 세력을 떨치고 있던 여부스 족들을 다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세 번째 프로젝트는 성전건축입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에게 자기의 뜻을 삼하 7:2절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다윗은 법궤를 다윗 궁으로 가져오긴 했지만 법궤를 모셔둔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 원주민인 여부스 족이 제의 장소로 사용하던 곳에 안치했습니다. 소박한 형태로 꾸며진 성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단은 다윗의 생각을 좋게 보고 하나님이 왕과 함께 계시니까 왕의 생각대로 하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나단은 하나님으로부터 다른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내용이 삼하 7:5-17절에 비교적 상세하게 나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짓는다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이 다윗의 집을 지어주었다는 게 모든 사태의 핵심입니다. 목동이었던 다윗을 데려다가 왕이 되게 하고, 주변의 적대자들을 제거해주신 이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이제 다윗은 천수를 누리고 죽게 될 것이고, 그 후손들이 대대로 왕조의 전통을 이어갈 것입니다. 성전 건축은 다윗이 아니라 그 아들인 솔로몬이 감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다윗에게 전하라고 나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다윗이 원했지만 그가 아니라 그의 아들 솔로몬에 의해서 건축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훗날 역대기 기자는 다윗이 전쟁에서 사람을 너무 많이 죽였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합니다(대상 28:3). 이런 설명이 객관적으로 얼마나 옳은지는 우리가 알 길이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입장들이 서로 충돌했다는 사실입니다. 한쪽에서는 성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필요 없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성전건축이 엄청난 작업이고, 거기서 벌어지는 문제가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첨예하게 대립할 수 있습니다. 요즘에도 교회당 건축 문제가 일어날 때 서로 의견을 달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루살렘 성전 건축은 절대적인 욕구였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조상 아브라함 시대부터 늘 떠돌이생활을 했습니다. 이집트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았고,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40년 동안 유목생활을 했고, 가나안에 들어와서도 원주민들과 계속해서 다퉜습니다. 자신들도 떳떳하게 땅과 집을 소유하고, 왕조를 세우고, 문명생활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일이 어느 정도 해결되면 당연히 화려하고 웅장한 종교건물을 갖고 싶어집니다. 이런 건물은 정치와 종교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다윗에게도 구미가 당기는 사업이었습니다.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 이후로 인류는 시대를 막론하고 거대 건축물에 대한 욕망을 실현했습니다. 더 이상 홍수로 망하는 걸 피해보려고 바벨탑을 쌓은 것처럼 거대 건축물을 통해서 인간은 자기구원을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피라미드 건축을 통해서 영생불사를 꿈꾸었습니다. 중국의 만리장성도 비슷합니다. 전쟁을 막아서 평화롭게 살겠다는 표면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거대 건축물에 대한 욕망이 거기서 작동됩니다. 욕망 실현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쏟게 됩니다. 피라미드와 만리장성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물자가 들어갔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지 생각해보십시오. 광기에 가까운 욕망이 없으면 이런 일은 수행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짓겠다는 이스라엘 민족의 꿈에도 이런 종교적 욕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전을 통해서 자신들이 하나님을 온전하게 소유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기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머물러 계신 것처럼 보일 정도로 장엄하고 화려하게 건축해야만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성전과 제사 중심의 신앙을 거부하는 전통도 있었습니다. 주로 선지자들입니다. 66: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이 구절과 비슷한 내용의 구절은 성경에 수없이 많습니다. 말씀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건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50:13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성전 제사에서 바치는 동물 고기와 피를 필요로 하지 않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구약성서는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창조자입니다. 세상 곳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은 화려한 성전이라는 공간 안에 머물러 있는 분이 아니고, 또한 제사 행위에서 바쳐진 고기를 잡숫는 분이 아닙니다.

 

성전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선지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성전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전은 필수입니다.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장소가 없다면 제사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제한시키고 독점하려는 시도입니다. 성전은 거룩한 곳이고, 성전 밖은 세속적인 곳이라는 성속이원론으로 하나님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가두는 것입니다. 이런 시도는 결국 성전 절대주의로 발전합니다. 모두가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려야 하고, 성전세를 내야 합니다. 성전이 일종의 권력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성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이미 오늘 설교 본문에도 배경으로 깔려 있습니다. 7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지손과 더불어 다니는 모든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령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하나님이 성전을 지으라고 말한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성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짚은 것처럼 결국 예루살렘 성전 건축의 책임은 다윗이 아니라 솔로몬에게 이전되었습니다. 일종의 역사가들인 성서기자들은 성전 건축에 누구의 이름을 붙일 것인지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 건물과 제사 제도는 이스라엘의 현실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지만, 성전은 그것 자체가 우상이 될 염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에서 성전의 우상화는 반복되었습니다. 다윗은 그런 위험한 일을 시도할 만큼 영적 시각이 무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자기실현의 욕망이 강렬했던, 그래서 말년에 우상숭배에 떨어져 나라를 말아먹은 솔로몬에게 맞춤합니다. 지난 인류 역사에 나타난 거대 건축물은 다 솔로몬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현대 역사도 비슷합니다. 정치인들이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서 무모하게 토목사업을 벌이기도 하고, 필요 이상의 큰 건축물을 만듭니다. 교회 건축도 비슷한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가 자기목회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교회 건축을 밀어붙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과 삶 전체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이자 체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저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서 감히 다른 사람은 엄두를 내지 못할 거사를 행하셨습니다. 그 사건을 네 복음서가 다 전합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신 예수님은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21: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일이 빌미가 되어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절대화하는 이스라엘의 고위층들과 더 이상 함께 갈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십자가 처형이라는 운명에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이은 초기 기독교인들도 역시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유대교 체제로부터 축출 당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아주 초기에 제자들이 여전히 성전을 출입하고 있었지만 오래되지 않아 금지되었습니다.

 

신약공동체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성전 개념을 받아들였습니다. 일정한 장소와 특정한 건물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 자체를 성전으로 보았습니다. 가끔 어떤 기독교인들은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기독교에는 건물로서의 성전은 없습니다. 오늘 제2 독서인 엡 2:21,2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위 구절을 잘 보십시오.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라고 했으며,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과정으로서의 성전입니다. 지금 여기서 완성된 성전은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신자들도 새로 들어왔다가 나가기도 하고, 서로의 신앙적인 연대도 늘 변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런 과정이 주 안에서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종교 동호모임이 아닙니다. 아주 구체적인 어떤 이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예수입니다. 위 구절을 다시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주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나감으로서 성전이 되어가는 중입니다.

 

만약 믿는 사람들이 성전이라면 교회당 자체도 필요 없다는 말이냐, 하고 궁금하게 생각하시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당, 또는 예배당은 필요합니다. 교회당은 그야말로 예배를 드리는 장소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천사처럼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존재들이라고 한다면 예배처소가 필요 없겠지만 땀과 피로 된 몸으로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예배 공간은 필요합니다. 성전과 교회당의 차이는 분명합니다. 성전은 공간적인 차별을 전제하는 개념입니다. 한 장소만을 거룩한 곳으로 여깁니다. 교회당은 그런 개념이 개입될 소지가 전혀 없습니다. 교회당만이 아니라 모든 세상이 거룩한 곳입니다. 거룩한 사람들이 모인 곳은 다 거룩합니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한국교회가 앞 다퉈 따라가고 있는 성지순례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한 번도 성지순례를 다녀오지 않아서 그런 이벤트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대충 들어서는 압니다.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지역과 초기 기독교 역사와 연관된 지역을 순례하는 것이겠지요. 공부도 되고 은혜도 받겠지요. 모르긴 해도 성지 순례는 한국교회 신자들이 세계에서 제일 많이 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성지라 이름붙인 장소가 다 관광객들을 끄는 상품이 되었을 겁니다.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는 장소도 많습니다. 기독교의 발생지를 한번 둘러본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겠지만, 그 지역을 특별히 성지로 여기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입니다.

 

솔로몬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예루살렘 성전은 여러 번에 걸쳐서 불에 타고 약탈당하고 허물어졌다가 복구되었고,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된 다음에, 통곡의 벽만 남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예루살렘 성전으로 인해서 오히려 여러 민족과 종교 사이에 다툼만 많아졌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전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서 벌어진 역사의 불행입니다. 만약에 그곳에 성전이 없었다면 오히려 평화로운 지역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화려한 건물의 절대화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건물과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 신비한 방식(사랑)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지금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비밀스럽게 참된 성전으로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아멘.

사무엘하 7:1-14(전)
https://youtu.be/EspSYu7yjR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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