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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다윗과 임마누엘 (삼하 5:1-5, 9-10)

다윗과 임마누엘

삼하 5:1-5, 9-10, 성령강림 후 일곱째 주일, 201878

 

1.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2.전에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하신 분은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네가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3.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라 4.다윗이 나이가 삼십 세에 왕위에 올라 사십 년 동안 다스렸으되 5.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9.다윗이 그 산성에 살면서 다윗 성이라 이름하고 다윗이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으니라 10.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다윗은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만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다윗에 관한 크고 작은 일화도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소년 다윗과 프로 격투사 골리앗의 싸움입니다.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세력이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과의 대결을 가리켜 보통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대하소설의 주인공으로 다루어도 손색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평범한 목동으로 살던 소년이 한 나라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냥 왕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정통 왕조의 시조였습니다.

저는 다윗을 생각할 때 만감이 교차합니다. 짠하다는 표현이 어울립니다. 겉으로만 보면 영웅 설화에 나올 정도로 다이내믹한 인생을 살았지만, 내면적으로 보면 불행한 인생이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지 말고 천직인 목동으로 살았으면 훨씬 더 행복하게 인생을 살았을 겁니다. 그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다윗은 어쩌다가 불타는 야망에 휩싸이게 되었고, 온갖 수모를 겪고, 골육상잔이라 할 수 있는 왕자의 난도 목격했으며, 아들에게 배신당하기도 하고, 참척의 고통도 겪었습니다. 본처인 미갈과는 평생 불화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밧세바와의 관계가 불거진 것으로 보입니다. 밧세바를 통해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이스라엘을 분열시킨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다윗 왕조의 설립

오늘 설교 본문인 삼하 5:1절 이하에는 다윗 왕조가 설립되는 순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다윗의 본거지인 헤브론에 모였다고 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아직 강력한 왕권이 확립되기 전이라서 일종의 부족 공동체라 할 지파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12지파는 크게 봐서 남쪽 지역에 속한 지파가 있고, 북쪽에 속한 지파가 있었습니다. 남쪽 지파와 북쪽 지파가 보이게 보이지 않게 대립했습니다. 지정학적으로 차이가 있으니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헤브론은 남쪽 지파에 속한 성읍이었습니다. 한반도와 비교하면 헤브론은 대구나 부산에 해당됩니다. 북쪽 지파 사람들은 다윗이 처음 등장할 때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이 파송한 장군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사울과 다윗은 왕권 투쟁을 벌이는 관계로 변했습니다. 사울은 공인받은 왕이었고, 다윗은 부마이면서 왕의 경호를 맡은 책임자였습니다. 장인과 사위가 왕권 투쟁을 벌인다는 게 이상해보입니다. 성경은 사울의 시기심이 그런 싸움의 원인이라고 말합니다만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속사정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 세월이 상당 기간 진행되다가 사울과 세자인 요나단은 블레셋과의 전쟁 중에서 함께 전사했습니다. 이제 다윗의 경쟁자는 없어진 겁니다. 당시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은 이런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윗 장군이 머물고 있는 헤브론에 모여서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들의 제안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과 우리는 원래 친척관계였으니 더 이상 반목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우리의 왕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이어서 왕 즉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삼하 5:3절이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 그들과 언약을 맺으매 그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라.

 

왕이 되었다고 하지만 다윗의 리더십이 처음부터 공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북쪽 지파들은 기회가 생기면 다시 다윗을 거부할 수 있었고, 가나안에는 원주민들이 여전히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상식적으로만 본다면 다윗 왕조가 지속되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왕이 된 다음에 다윗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예루살렘 정복입니다. 당시에 예루살렘은 가나안에서 가장 큰 성읍인데, 여부스라는 이방종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어떤 종족도 예루살렘을 여부스 사람들에게서 빼앗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이 천혜의 요새였기 때문입니다. 뛰어난 장군이었던 다윗은 예루살렘을 결국 정복하고, 그곳을 다윗 성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전체 지파를 대표하는 왕이 된지 7년 반만의 일입니다. 다윗은 헤브론을 떠나서 예루살렘, 즉 다윗 성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남북 지파 전체를 실질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기반이 잡힌 겁니다.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 남쪽과 북쪽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동안 북쪽 지파를 통치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곤 했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33년 동안 왕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다시 계산하면 서른 살에 왕이 되었고, 서른일곱 살에 예루살렘을 정복했으며, 70살에 죽었습니다.

 

성 쌓기

다윗 왕조 초기에 벌어진 일에 대한 평가를 성경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두 구절로 요약합니다. 하나는 삼하 5:9절이고, 다른 하나는 10절입니다. 먼저 9절을 읽겠습니다.

 

다윗이 그 산성에 살면서 다윗 성이라 이름하고 다윗이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으니라.

 

예루살렘을 손에 넣은 다윗은 거대한 토목공사를 벌여서 예루살렘 성을 더 멋지고 더 튼튼하게 만들었습니다. 예루살렘을 공격하면서 알게 된 약점도 보완했을 겁니다. 나중에는 왕궁도 세웠습니다. 예루살렘 성전만은 건축하지 못했습니다. 다윗 성으로 불리게 된 예루살렘은 그 뒤로 수천 년 동안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은 세 종파, 즉 유대교와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성지라 불릴 정도로 중요한 도시입니다. 그 초석을 다윗이 다졌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일을 당연히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겁니다. 별 볼일 없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부러울 것이 없는 강력한 도시를 세웠으니까요.

성을 쌓았다는 표현이 다윗의 치적을 높이 평가하는 듯이 보이지만 제가 보기에 저 구절의 이면에는 전혀 다른 평가가 숨어 있을지 모릅니다. 다윗은 이제 명실상부 성주가 되었습니다. 성주는 성벽으로 차단된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성채가 자신을 지켜주고 자신의 권위를 높이지만 자신의 자유를 가로막기도 합니다. 성경은 위압적이고 화려한 성과 도시를 전반적으로 비판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런 것을 통해서 교만해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한 적이 있습니다. ‘주께서 성읍을 돌무더기로 만드시며 견고한 성읍을 황폐하게 하시며 외인의 궁성을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사 영원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셨다.’(25:2). 성 쌓기를 일단 시작하면 그걸 반복해야만 합니다. 주변에서 성을 허물려는 세력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의 삶 역시 유형무형의 성 쌓기입니다. 성주처럼 사는 것을 최상의 삶이라고 여깁니다. 제가 사는 원당 마을에 와 보신 분들은 느꼈겠지만 그 동네에서 우리 집은 성채처럼 보입니다. 의도하지 않았던 일인데 어쩌다보니 집 위치도 그렇고 크기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주변의 집이 다 옛날 허름한 집이기 때문입니다. 동네 분들 보기가 민망한데도, 그분들은 오히려 동네가 밝아졌다고 좋아하긴 합니다. 요즘 대도시의 아파트는 성을 방불합니다. 이름을 아예 캐슬로 붙인 아파트가 있을 정도입니다. 성주가 되거나 귀족이 되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현대인의 모든 삶의 과정은 성 쌓기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행복할까요?

다윗은 원래 목동이었습니다. 목동이었던 다윗과 성주로서의 다윗을 비교해보십시오.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의 인생을 선택하겠습니까? 권력과 돈과 쾌락과 문명은 성주에게 모이지만 하늘과 별과 구름과 새들은 목동에게 모입니다. 성주는 성을 지키는 일에 몰두하지만 목동은 양을 지키는 일에 몰두합니다. 양을 지킨다기보다는 양의 친구로 사는 겁니다. 성주는 끊임없이 성벽을 높이 쌓고 수리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성 안과 밖을 철저하게 분리시킵니다. 성주는 망대를 세워서 성 밖을 살피게 합니다. 성벽과 망대를 아무리 높이 쌓아도 성주는 불안과 걱정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목동도 물론 밤에 양을 지켜야하니 피곤하고 걱정도 되겠지만 성주의 염려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여러분 중에서 혹시 주식 값 때문에 불안한 분, 또는 집값 때문에 불안한 분은 없으신가요?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한 불안과 걱정은 인지상정입니다. 다만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만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말 형편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저의 눈에는 다윗이 성채에 갇힘으로써 목동 시절 삶의 중심으로 삼았던 자연과의 소통이나 일체감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뜻으로 본문이 읽힙니다.

성 쌓기를 포기한 채 살아갈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 아니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지금 우리가 당장 유목민이 되거나 농사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스펙과 연봉과 집과 학력 같은 것을 무시하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산다 하더라도 일단 성 쌓기의 본질적인 한계를 직시하고 그것의 절대화인 우상숭배에서 벗어나는 노력만은 계속 경주해야합니다. 그런 노력도 쉽지는 않습니다. 그걸 뚫어볼 수 있는 영적인 시각이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시대정신으로부터 학습의 과정을 거쳐서 형성되는 세계관 안에 갇혀서 지냅니다. 그게 고정되면 다른 게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왕의 권력을 맛본 사람은 목동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거와 같습니다. 정치과 경제 권력은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을 만큼 매혹적입니다.

 

임마누엘의 실체

다윗 왕조 초기에 대한 성경기자의 두 번째 평가는 삼하 5:10절에 나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다윗이 점점 강성해졌다는 말은 그의 권력 기반이 탄탄해졌다는 뜻입니다. 그의 나이 40세 전후에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강력한 왕권을 수립한 것입니다. 다윗 왕권은 한번 수립했다고 해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걸 유지하려면 지금까지의 노력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또 운도 따라야 합니다. 다윗이 점점 강성해졌다는 말은 다윗 개인의 권력 기반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국력이 신장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이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할 수 있는 나라로 발전한 거와 같습니다. 이로 인해서 모든 지파 사람들이 다윗을 중심으로 결속될 수 있었습니다.

성경기자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이라는 코멘트를 달았습니다. 이런 논리는 일단 신앙적으로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람과 나라의 모든 흥망성쇠를 하나님의 뜻과 연결해서 판단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복을 받을 것이며, 함께 하지 않으시면 화를 입는다고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위기를 극복하려면 하나님께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말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일종의 승리주의로 오용되면 곤란합니다. 미국의 백악관은 이런 승리주의를 기독교 신앙으로 덧칠하곤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뜻의 히브리어는 임마누엘입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이 단어를 한 인물에게 부여했습니다. 그 인물은 예수입니다. 예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면서 마태복음은 사 7:14절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이 함께 했다는 말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이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에서 강력한 세력을 얻지 못했습니다. 승리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십자가 처형의 운명에서 그를 지켜줄 사람들도 주변에 없었습니다. 예수의 운명을 통해서 우리는 임마누엘의 신앙이 다윗 왕조의 국가 이데올로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설교를 시작하면서 다윗의 운명을 생각하면 짠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천직인 목동으로 사는 게 훨씬 나앗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도 있겠지요. 이왕 한번 살다가 죽는 인생인데 목동보다는 왕이 훨씬 낫다고 말입니다. 대한민국에 정치지망생들이 많은 걸 보면 그게 인간의 본성인가 봅니다. 저는 시편을 노래하는 목동으로서의 다윗이 훨씬 풍요로운 인생을 살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자기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변의 여러 가지 사건들과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습니다. 만약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을 못마땅해 하지 않았다면, 이새가 아들 일곱 명을 사무엘에게 소개할 때 양을 돌보던 다윗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면,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길 정도로 돌물매질을 잘하지 못했다면, 다윗이 사울의 부마가 되지 않았다면, 사울의 정신이 오락가락하지 않고 다윗의 악기 연주 실력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의 권력의지가 강력했다면 ... 다윗의 실제 운명은 달라졌을 겁니다. 많은 우연한 일들이 맞물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믿음이 좋고 정치력이 뛰어난 영웅의 자리에 올라섰습니다. 그가 행복한 삶을 살았는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별로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역사의 역설입니다. 한 민족도 그렇고 개인도 그렇습니다. 다윗의 경우에는 예수가 그의 후손으로 오게 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인생은 어떤 과정에 놓여 있습니까? 왕권 투쟁의 한복판에 있는지, 어느 정도 안정된 상태에 있는지, 성을 더 높이 쌓으려고 애를 쓰는 중인지, 모든 과정을 끝내고 인생을 정리하거나 뭔가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중인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왕이 되었다고 해서 행복한 것도 아니고, 목동으로 산다고 해서 불행한 것도 분명히 아닙니다. 저보고 선택하라면 당연히 양을 돌보면서 시를 쓰는 목동입니다. 어떤 선택을 했든지, 그리고 어떤 선택을 받았든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삶, 즉 임마누엘의 삶입니다. 다윗의 인생에서 나름 최선이었으나 모호했던 임마누엘의 삶이 예수님의 운명에서 현실이 되었다고 믿기에 저는 오늘도 예수님의 운명에 가까이 가려고 최선을 다하는 중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기대합니다. 아멘.

사무엘하 5:1-5, 9-10
https://youtu.be/kGlBE9xsK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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