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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닫힌 밀실에서 열린 광장으로 (요 20 : 24 – 29 / 느 8 : 1 – 12)

2025년 7월 6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F_Pzml3Nc5s?si=yGTD1mhDwEKKAKjm

▣ 들어가는 말

- 밀실의 교회 : 광장의 복음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은 1950~60년대의 소록도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입니다. 한센병 환자들의 수용소인 소록도에 새로 부임한 장원장은 이곳을 이상적인 자치 공동체, ‘천국’으로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이전의 원장이 시도했던 방식과는 다른 민주적 자치, 환자들의 자립, 그리고 개인 존중의 원칙을 세우며 새로운 행정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환자들은 장 원장의 이상을 의심하거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두려워하거나, 혹은 무관심하게 대합니다. 그들은 오히려 이전 원장들의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통치를 더 익숙하고 안정적이라고 여깁니다. 결국, 장 원장이 추구하는 천국은, 장 원장의 “당신들”을 위한 천국, 즉 그의 이상일 뿐, 주민들의 욕구나 감정, 역사적 맥락과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그의 이상은 타자의 삶과 경험에 대한 무지, 일방적인 구원자적 시선이라는 한계를 드러냅니다. 소설은 장 원장의 이상이 실현되는 모습보다는, 그 이상이 타자와의 단절 속에서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곳이 정말 그들의 천국인가. 아니면… 나의 천국인가.”

이 장원장의 독백은 오늘날 우리 교회를 향한 것이 되고 있습니다. 자신들만이 진리를 소유하고 있고, 자신들만이 구원을 독점하고 있다고 믿으며, 세계를 향해 독선적이고 오만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상과는 달리, 교회는 세계에서 전혀 매력적이지 않습니다. 자신들만의 천국을 만들고 자신들만의 선민의식 속에서 점점 더 고립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점점 ‘밀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선포하셨던 ‘광장’이 아니라, 정해진 교리 안에서만 말할 수 있고, 신앙인들만 편히 숨 쉴 수 있는 닫힌 공간이 되어버렸습니다. 너무나 뼈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왜 교회는 밀실이 되었는가?

오늘날 교회는 종종 세상 속의 광장이 아니라,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근 밀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복음은 열린 공간에서 선포되어야 할 진리인데, 우리는 그 진리를 우리만의 언어, 우리만의 경계 안에 가두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착각, 우리만이 옳다는 교리적 독점, 그리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 진리를 ‘소유’하려는 교회

신학자 폴 틸리히는 말합니다. “믿음은 진리에 대해 열려 있는 용기이다.” 오늘날 교회는 종종 진리를 ‘완성된 문장’ ‘종결된 결론’으로 만들고, 그 바깥의 말과 질문은 위험하거나 이단적이라 판단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교리라는 이름의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하나님이 진정한 신이라면 교회 안에만 갇혀 있지 않을 것입니다. 진리를 완전히 알 수 있고,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신을 우리 안에 가두고 독점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은 것 아닐까요. 우리가 정말 신을 좇는 것인지, 우리의 생각을 신이라 믿는 것인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신앙 안에서 의심과 질문이 허락되지 않을 때, 그 신앙은 ‘믿음’이 아니라 ‘억압’이 됩니다.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질문할 수 없고, 의심할 수 없다면, 그들은 이유 없는 죄책감 속에서 침묵당합니다. 예수께서는 도마에게 손을 내밀어 보이셨습니다. 의심을 꾸짖지 않으시고, 진리로 초대하셨습니다.

- 타자에 대한 두려움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말한다. '너는 나를 죽이지 말라.’” 철학자 레비나스의 말입니다. 이 말은 단지 생명을 해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타자의 얼굴은 하나님의 요구라는 것입니다. 성경책이 아니라 타자의 얼굴이야말로 우리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낯선 사람, 다른 정치 성향, 다름에 대해 불안해하고, 우리와 다른 삶의 조건을 가진 사람들을 불편해하고 배제하려 합니다. 심지어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기도 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 스스로 자신 없고 두렵기에 문을 열어 기쁘게 맞이할 수 없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모여서 ‘우리끼리’의 ‘우리만’의 안전한 밀실을 만들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와 다른 존재들이 설 자리를 잃는 순간, 교회는 더 이상 복음의 광장이 아니라, 부패한 밀실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 밀실에서 광장으로

- 밀실 속의 인간

도마는 ‘밀실’ 속의 인간입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지 못한 채, 공동체와 떨어져 혼자 남아 있습니다. 그의 밀실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상실의 충격, 공포와 상처, 부활 소식을 믿지 못하는 회의와 고립의 상징입니다. 여기서 밀실은 의심의 공간, 자기보호의 공간, 타자와 단절된 내면의 폐쇄된 공간입니다. 믿음이 없는 게 아니라, 상처받은 믿음입니다.

예수께서는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지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고 손가락을 그 자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요 20:25) 도마의 이 말은 오늘날 교회가 가장 불편해하는 말 중 하나입니다. “나는 믿지 못하겠다.” 하지만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를 꾸짖지 않으시고, 그의 질문과 의심을 품고, 응답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요 20:27) 예수님의 공동체는 의심을 허용하고, 질문을 환영하며, 상처를 보여주는 광장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도 마땅히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그 고립된 인간, 밀실에 갇힌 도마를 향해 예수는 닫힌 문을 열고 ‘밀실’로 들어옵니다.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도마를 비난하지 않고, 그의 의심에 손과 옆구리로 응답하십니다. 밀실 속에 있는 도마를 밖으로 불러낸 것이 아니라, 밀실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신앙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밀실 안에서, 의심과 두려움과 상처 속에서 시작된다는 역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도마는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예수의 상처를 보고 그는 깨닫습니다. 밀실의 침묵에서 광장의 고백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론적 신앙 고백입니다. 그 고백은 내면의 닫힌 문을 여는 순간입니다. 도마는 이제 더 이상 숨어 있는 자가 아니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을 위한 증인’으로 변화됩니다. 밀실 속 고립된 상처받은 의심하는 자에서 광장에 서는 신앙의 증인으로의 전환된 것이지요.

- 말씀은 광장에서 울린다

“그달 첫날은 너희에게 쉬는 날이 될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레 23:24) 7월 1일은 나팔절입니다. 영적 성찰과 회개의 시간을 시작하는 날이지요. 나팔을 불어 백성들에게 회개할 것을 명하는 날입니다. 그날부터 10일을 “두려움의 열흘”이라 부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철저히 고백하며 회개하는 시간입니다. 7월 10일은 ‘속죄일’이고, 1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날이지요. 백성 전체와 대제사장 자신을 위한 속죄 제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15일부터 21일까지 초막절을 보냅니다. 초막절은 광야 40년 동안 초막에서 생활한 것을 기억하며, 가을의 수확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기간입니다.

“일곱째 달 초하루에…” 의도적으로 시간(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팔절과 속죄일로 이어지는 회개의 시간과 초막절, 즉 기쁨의 절기 사이의 시간인데, 영적 전환, 존재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간은 말씀을 통해 인간의 죄성을 깨닫고, 이후에 하나님과 화해와 공동체의 회복을 준비하는 중간 지점, 전환점이라는 말이지요. 바벨론 포로 시대를 지나며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와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렸습니다. 존재의 망각은 곧 말씀의 망각인 것이지요. 시점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한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회복이 아니라 존재와 역사의 방향성을 다시금 하나님 중심으로 재정비하는 사건이지요.

아울러 장소, “수문 앞 광장”은 예루살렘 성의 동쪽,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공공의 공간입니다. 말씀의 낭독이 성전 안이 아니라 ‘광장’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제사장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백성의 것이며, 공적 담론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폐쇄적이고 특권화된 종교 시스템이 아니라, 모든 사람—남녀노소,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자—에게 열려 있는 신앙 공동체를 지향함을 의미합니다. 광장은 타자와의 조우가 이루어지는 장소이자, 말씀이 폐쇄된 공동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구현되어야 할 보편 진리임을 드러냅니다.

- 광장의 신앙

신앙은 밀실의 은밀한 고백도 필요하지만, 공동체와 더불어 듣고, 해석하고, 함께 반응하는 광장 안에서 자라납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느 8:8) 말씀은 해석되어야 하며, 함께 이해될 때 의미가 있습니다. ‘신앙의 소통성’을 강조합니다. 말씀은 교회만의 언어, 신앙인만의 언어, 나만의 언어가 아닌, 타자와 함께 나누는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밀실은 혼자만의 신앙 언어를 만들 위험이 있지만, 광장은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 믿음을 모두의 것으로 만듭니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느 8:9) 백성들은 말씀 앞에서 함께 웁니다. 다시 말해 감정의 공감이 일어난 것입니다. 광장은 공감의 자리입니다. 신앙은 개인의 내면에서만 일어나는 고백이 아니라, 공동의 공감, 집단적 돌이킴과 갱신의 순간입니다. 진정한 신앙의 변화는 밀실에서 울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함께 울고, 함께 일어나는 광장의 경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이것이야말로 신앙인들의 진정한 기쁨, 진정한 행복, 진정한 힘입니다. 모두와 함께 나누는 삶, 함께 울고 함께 웃는 더불어 사는 삶이 성경이 말하는 신앙인의 모습 아닐까요.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1~32) 모세의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고백은 함께 먹고 나누는 기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진리, 신의 말씀은 함께 나누는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만의 천국, 우리만을 위한 구원을 지향하는 삶이 어찌 예수의 길일 수 있을까요.

나 홀로의 신앙에서 벗어나십시오. 오늘날 신앙은 너무 ‘밀실화’되고 있습니다. 혼자 유튜브로 예배드리고, 혼자 말씀을 읽고, 혼자 울고, 혼자 괜찮아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지금 광장에서 말씀을 듣고 있는가?” “너의 눈물은 공동체와 함께 흐르고 있는가?” “말씀의 기쁨이 누군가와 나눠지고 있는가?”

- 광장이 죽은 곳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주인공 이명준은 남한과 북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체제 속 어디에도 참된 자유와 진리의 ‘광장’이 없다고 절망합니다. “광장이 죽은 곳, 이게 남한이 아닙니까? 광장은 비어있습니다.” 이명준은 남한 사회의 현실을 ‘광장’이라 부르기조차 어려운 상황으로 봅니다. 정치 광장에는 부정과 탐욕, 배신이 난무하고, 경제의 광장에는 훔친 물건들이 넘쳐나며, 문화의 광장에는 허위와 거짓, 헛소리만 가득하다고 비판합니다. 겉보기에는 자유로운 광장이 열려 있는 듯 보이지만, 이명준이 비판한 것은 허위로 가득 찬 공공의 장(場)이며, 진정한 소통이나 화합의 장은 존재하지 않는 “텅 빈 광장”이었던 것이지요. “저는 살고 싶었던 겁니다. 보람 있게 청춘을 불태우고 싶었습니다. 정말 삶다운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남녘에 있을 때, 아무리 둘러보아도 제가 보람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광장은 아무 데도 없었어요. 아니, 있긴 해도 그건 너무나 더럽고 처참한 광장이었습니다.”

그는 광장을 찾아 북으로 향했지만, 남한은 개인의 자유만 강조하는 공동체가 사라진 “밀실”이었고, 북한은 전체주의로 통제된 또 다른 “밀실”이었습니다. “사상의 자유는 없었다. 이곳의 언어는 구호였고, 생각은 명령이었다.” “그의 입에서는 혁명, 계급, 당의 이름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다니! 이건 내 말이 아니야.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 북한 체제에 익숙해지며 자신의 언어마저 체제의 언어로 점령당한 자신을 자각하게 됩니다. “그는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건 옳지 않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의 내면과 사유의 주체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울러 북한 주민들과 지내면서 그들과 진정한 인간적인 교감도 연대감도 느끼지 못하지요. 결국, 그곳에서도 인간으로서 공감하고 살아 숨 쉬는 공간, 광장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동무는 어느 쪽으로 가겠소?” “중립국” 이명준은 결국, 남과 북 어디도 선택하지 않고 제삼국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인도로 가는 배에서 바다에 몸을 던지고 말지요. 그는 참된 공동체, 말할 수 있는 공간, 존재가 드러나는 광장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 풍문에 만족지 않고 현장을 찾아갈 때 우리는 운명을 만납니다. 운명을 만나는 자리를 광장이라고 합시다.” 책 서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진실을 말할 수 없는 공동체, 마음을 나눌 수 없는 세계, 진정한 자신이 될 수 없는 곳에서 인간은 삶의 의미, 운명을 만날 수 없습니다. 삶이 아닌 생존이 있을 뿐이지요.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떤지요. 자신의 언어를 가질 수 있고, 표현할 수 있고, 자유롭게 질문하고 답할 수 있고, 타인의 허물을 기다려줄 수 있는, 모두가 함께 나아가는 광장인가요? 밀실인가요? 교회는 삶의 의미, 운명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인가요. 더욱더 깊은 밀실의 자리일 뿐인가요. 이명준의 죽음은 한 개인의 절망뿐 아니라, 공동체가 광장 되기를 포기했을 때 벌어지는 영적인 가난, 파산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지요.

▣ 나가는 말

중세의 교회는 진리를 독점했습니다. “라틴어는 신성한 언어이기에, 평신도의 오해와 이단 방지를 위해 사제가 해석해야 한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성경을 해석할 권한을 성직자와 교황청에서만 소유했습니다. 평신도는 성서를 잘못 해석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교회가 성서를 통제한 것은 단지 성서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교권 유지와 권력 독점의 핵심 기제였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교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의 것이다.” 루터의 주장입니다. 진리는 밀실이 아니라 광장에서 진리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 외침에 밀실의 추악한 거짓과 탐욕이 허물어져 내리지요.

예수의 삶의 자리는 밀실이 아닌 광장이었습니다. 성전이 아니라 사람들과 마주한 자리였습니다. 갈릴리 바닷가, 베다니 마을, 수가성 우물가, 이방 여인의 집, 그리고 도마의 의심이 있는 그 다락방까지. 그곳은 모두 하나님의 진리가 머문 광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독점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기반입니다. 교회만을 위한 기반이 아니지요. 사랑과 정의, 평화는 모든 존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교만을 뒷받침하는 교리가 아닙니다.

『논어』 이인편, “君子和而不同,小人同而不和” 공자의 말입니다.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 소인은 동이불화(同而不和).” 진정한 공동체는 서로 다르되 조화를 이루지만, 얕은 공동체는 겉보기에는 같아도 참된 화합이 없습니다. 교회가 ‘다름’을 두려워하고, ‘동일함’만을 강요한다면, 우리는 밀실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서로 다른 우리가 함께 머무는 ‘광장’을 세웁니다. 교회가 신앙의 ‘동일함’만을 강요할 때, 광장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밀실의 획일성만 남게 됩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다시 광장이 되어야 합니다. 닫힌 밀실에서 나와, 질문이 허용되고, 말씀이 낭독되며, 사랑과 대화가 오가는 열린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곳에서야말로, 우리는 이명준이 찾지 못했던 ‘진짜 광장’,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나라의 공간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진리입니다. 의심과 질문이 있고, 타자가 있고, 말씀이 있고, 기쁨과 눈물의 공감이 있는 자리입니다. 그곳에서야말로 우리는 이명준이 끝내 찾지 못했던 ‘진짜 광장’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주님,

우리 공동체가 다시 광장이 되게 하소서.

밀실에서 나와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게 하시고,

질문이 허용되고, 의심이 품어지며,

진리가 열려 있는 대화의 장이 되게 하소서.

‘광장은 없다.’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명준의 침묵을 기억하게 하시고,

오늘 우리 교회가 그 침묵을 깨는 새로운 광장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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