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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달리다굼' 말씀하시다 (막 5:21-24, 35-43)

달리다굼말씀하시다

5:21-24, 35-43, 성령강림후 다섯째 주일, 2015628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메르스 사태로 대한민국이 한 달 이상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진정 국면에 들어섰나 했더니 산발적으로 확진자가 나오는 중입니다. 한국을 찾는 외국 관광객의 숫자가 크게 줄었고,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도 큰 어려움에 처했다고 합니다. 메르스로 인해서 삼십 명 이상이 생명을 잃었고, 지금도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환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사태가 속히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가장 힘든 사람들은 아마 생사의 기로에 처해있는 환자의 가족일 겁니다. 지푸라기라고 잡고 싶은 심정이겠지요.

 

야이로의 딸

5장에 이런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어떤 사람이 나옵니다. 그는 회당장인 야이로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담임 목사 쯤 됩니다. 그의 딸이 위독한 상태입니다. 이 아이가 무남독녀인지, 무슨 병이 걸렸는지, 병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에 대해서 성경 본문은 아무 말이 없습니다. 매우 위중한 병에 걸린 것만은 분명해보입니다. 야이로는 갈릴리 호숫가에 머물고 있던 예수님을 찾아와서 발아래 엎드린 채 이렇게 말합니다.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짧은 이 한 마디에 많은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2천 년 전 인간 평균 수명은 사십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유아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야이로의 딸은 열두 살이었습니다. 고대 유대사회에서는 여자들에게 배란이 시작되는 그 나이부터 결혼이 가능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는 조혼이 대세였습니다. 워낙 사망률이 높아서 가능한 아이를 많이 낳아야만 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다 키운 딸을 잃을지 모른다는 걱정으로 치료에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았을 겁니다. 이 이야기의 중간인 막 5:25-34절에 잠시 다른 이야기가 끼어듭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자가 예수님을 통해서 치료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여자의 상황에 대해서 막 5:26절은 이렇게 전합니다.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야이로의 딸도 이와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본문이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야이로의 모든 식구들은 병든 딸로 인해서 딱한 처지에 빠졌습니다. 딸의 어머니는 아버지 야이로보다 마음이 더 아프지 않았겠습니까. 오라비가 있었다면 오라비의 심정으로 슬픔이 컸겠지요. 야이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변 친구나 이웃들이 그에게 예수님을 한번 찾아가보라고 조언했을지도 모릅니다. 야이로는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께 매달리는 심정으로 찾아와서 딸이 구원을 받아 살게해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한 겁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열두 해 혈루증 앓는 여자 문제로 지체하게 되었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가는 중에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야이로에게 이미 당신 딸이 죽었으니 예수님을 집으로 오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에 야이로의 마음은 무너졌겠지요. 그 말을 옆에서 들은 예수님은 예상외의 말씀을 야이로에게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고 발걸음을 재촉해서 야이로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초상집의 상황이 어땠을지는 여러분이 상상할 수 있습니다. 회당장의 집이니까 동네 모든 사람들이 모였을 겁니다. 함께 떠들고, 울었습니다. 야이로의 집은 이미 초상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거기 모였던 사람들은 그 말을 비웃었습니다. 당연한 반응입니다. 아이의 숨이 멈추고 심장도 멈췄는데 잔다고 하니,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다 내보낸 다음 아이의 부모와 제자 세 명만 데리고 죽은 아이가 누워있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장면에 대한 설명인 41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달리다굼은 당시 예수님을 비롯해서 모든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입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헬라어를 쓰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친절하게 번역까지 달아놓았습니다. 예수님이 달리다굼이라는 말씀을 하신 뒤에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죽었다고 여겼던 아이가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 놀라고 놀랐다고 합니다.

 

비밀 당부

이 이야기를 읽고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각자 다르겠지요. 우선은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을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런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사실 난감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말 자체는 믿기 힘듭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상식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즘에도 죽음 직전의 가사상태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나는 일은 흔하지 않지만 없지도 않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호흡과 맥박이 일시적으로 멈췄다가 예수님이 손을 잡는 순간에 마치 유능한 한의사에 의해서 막혔던 혈관이 지압을 통해서 풀리듯이 다시 움직이게 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된 거라면 야이로의 딸 이야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렇지만 본문은 야이로의 딸이 분명히 죽었다가 살아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경기자들은 선의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마가복음 기자가 없는 이야기를 꾸며냈다고 보면 안 됩니다. 저는 지금 설교자로서 곤란한 입장에 처했습니다. 성경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와 야이로의 딸 사건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그런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이럴 때는 마가복음 기자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전하고 싶어 했는지를 살펴보는 게 중요합니다. 만약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가 살았다는 사실 자체가 본문의 핵심이라면 오늘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어도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게 여전히 신비의 영역이기 때문에 지금의 자연과학적인 근거만으로 야이로의 딸 이야기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기자의 관심이 거기에 있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생각을 다르게 해야 합니다. 다시 질문합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마가복음 기자가 사태의 진행을 전달한 뒤에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달았다는 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데 단서가 됩니다. 42b절에서 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놀랐다.’고 합니다. 놀랐다는 말을 두 번에 걸쳐서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마가복음을 비롯한 모든 복음서 기자들의 집필 목적입니다. 열두 살 여자 아이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그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다른 이야기도 다 이 사실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놀라워했다는 코멘트에 이어지는 43절의 말씀에서 이를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못하게 하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이게 이상합니다. 보통이라면 이런 일들은 널리 알려야 합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이며, 예수가 메시아라는 증거가 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비밀로 하라고 당부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이런 일들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당시 영적으로 위대한 인물들에게는 가끔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엘리야와 엘리사 전승에도 죽은 아이를 살린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에게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소문이 퍼지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런 선지자 정도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8:27절에 따르면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실제로 세례요한, 또는 엘리야나 여러 선지자 중의 하나로 여겼습니다. 둘째는 신학적인 차원인데, 야이로의 딸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전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만 이 이야기가 의미가 있지 그것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간단히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고, 또 죽었다가 사는 일이 반복된다면 이것이야말로 희극과 같은 일이 되고 맙니다.

 

이제 본문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죽은 아이에게 달리다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부활의 주님에 의해서 모든 사람들이 크게 놀랄만한 일들이 일어났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입니다. 마가복음 기자를 비롯해서 여러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에 몰입했습니다. 이런 신앙 경험에 근거해서 당시 유대교의 압박을 견뎌냈고, 로마정치의 박해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신앙 경험의 전통을 이어가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마가복음 기자를 비롯해서 초기 제자들과 같은 수준의 신앙 경험이 없거나 불분명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 앞에서 놀라는 일이 없습니다. 죽은 아이를 향한 달리다굼이라는 말을 허황하게 듣고 있을 뿐입니다. 모든 삶이 밋밋하게 경험될 뿐입니다. 어떻게 이런 문제를 해결해서 그들과 동일한 신앙의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마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그 신앙 경험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게 최선입니다. 이를 위해서 제가 여러분에게 설교하는 중입니다.

 

달리다굼

야이로의 딸이 처한 운명을 다시 보십시오. 야이로는 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온갖 수고를 다 기울였습니다. 치료 중에 차도를 보일 때도 있었겠지요. 그러면 본인은 물론이고 모든 가족이 기뻤을 겁니다. 결국에는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되어 숨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게 우리의 운명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보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은 잠시 효력을 보이는 순간도 있지만 결국에는 헛수고입니다. 우리 모두는 관에 누워야 할 순간을 기다릴 뿐입니다. 사냥개에서 쫓겨 다급해진 꿩이 수풀이나 눈 더미 속에 머리를 파묻고 그 현실을 외면하는 것처럼 이런 운명을 외면한다고 해서 이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런 말씀이 불편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자꾸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냐, 그렇기 때문에라도 살아있는 동안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야겠다는 거 아니냐, 하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 옳습니다. 병으로 평생 고생하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야 하고, 또는 가난에 찌들어서 사는 것보다는 여유롭게 살아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다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죽음의 절대 운명을 외면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외면하면 역설적으로 이 현실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놓칠 뿐만 아니라 온갖 것으로 삶을 소비하게 됩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신앙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죽어 누워있는 아이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사람들은 아마 그럴듯한 초상을 치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전문적으로 곡하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삼일, 또는 오일동안 곡을 하게 해야 합니다. 결혼도 하지 못하고 죽었으니까 수의는 혼례 복장보다 더 화려하게 만들어 입혀야 합니다. 먹을거리도 차고 넘치게 준비해서 손님들을 잘 대접해야 합니다. 꽃상여를 특별한 것으로 주문하고, 무덤도 고급스럽게 만들어야 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죽은 영혼이 위로를 받겠다 싶을 정도로 정성스럽게 장례를 치를 수 있습니다.

 

저는 가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합니다. 우리 삶의 과정이 바로 초상집에서 벌어지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말입니다. 울고, 웃고, 떠들고, 먹고, 마시고, 취해야 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온갖 준비를 도에 넘치게 합니다.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고, 화해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딸이 죽은 야이로의 집에서 벌어졌던 그 초상 준비가 우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을 많이 기울여도 죽음이라는 현실만은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체념한 채 작은 위로에 머물 뿐입니다. ‘아이가 죽은 게 아니라 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비웃더라.’는 본문의 묘사처럼 크고 작은 냉소가 우리 삶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그런 냉소를 위장하기 위해서 행복한 조건을 찾는데 과도하게 매달립니다.

 

야이로의 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호화로운 장례 절차가 아니라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살아나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은 소녀가 죽기 전까지 그걸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죽은 다음에는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죽어야 할 인간의 운명을 당연하다는 듯이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운명을 거슬러서 행동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으로 만사가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똑똑하고 이지적이고 실증적인 사고방식에 빠져 있는 그들은 이런 점에서 숙명주의자입니다. 그 초상집에서 오직 한분, 예수님만이 그 운명을 거슬러 말씀하셨습니다.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이라고 외치셨습니다. 이 단어를 좀더 원어에 맞도록 발음하면 탈리다 쿰!’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는 숙명주의, 냉소주의를 거스른 생명 선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야이로의 딸처럼 아파서 누워있든지, 또는 이미 죽어 누워 있는 거와 다를 게 없습니다. 아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곧 그렇게 될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모양이 조금 개량되는 게 아닙니다. 약간 덜 아프거나 덜 외로운 게 아닙니다. 보란 듯이 더 호화로운 장례를 치르는 게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야이로의 딸처럼 일어나 걷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 부활의 능력이 곧 달리다굼이라는 말씀으로 선포되었습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선포가 우리에게 실현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놀라운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멘.

마가복음 5:21-24, 35-43
https://youtu.be/OfBetSKS9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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