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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막 1 : 21 ~ 28)

▣ 들어가는 말

- 기적을 믿는가? / 기적이란 무엇인가?

제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성지순례를 다녀온 한 할배가 있습니다. 평생 좋은 일 한 번 해본 적 없는 염소도둑인 친구가 성지순례를 다녀왔으니 ‘친구에게 줄 선물(성물)은 가져왔겠지’ 다그칩니다. 그러자 오늘 밤에 신부님을 모시고 좋은 음식을 가지고 함께 오라고, 귀한 성물을 가지고 왔다고 일러줍니다. 그리고는 자기 집 벌레 먹은 문설주에서 쌀알 크기만큼 나무를 떼어 내서 보드라운 천으로 싸 둡니다. 저녁이 되자 친구가 신부님과 함께 포도주와 생선구이를 가지고 오지요. 신부님은 스톨을 꺼내 입고 축복을 하고 성물을 건네주는 의식을 거창하게 치릅니다.

친구는 그 나뭇조각에다 엎드려 절을 하고 끈으로 묶어 목에다 걸고 다닙니다. 그날부터 그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됩니다. 산으로 들어가 독립무장 투쟁에 참여하고 겁 없이 총탄의 소나기 속을 누비고 다니지요. 목에 주님의 거룩한 십자가를 매고 있으니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만사는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믿음이 있습니까? 그럼 낡은 문설주에서 떼어 낸 나뭇조각도 성물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나요? 그럼 거룩한 십자가도 그런 사람에겐 문설주나 다름이 없습니다.”

기적이 무엇일까요? 진짜 기적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믿는 믿음과 그것을 통한 삶의 변화가 아닐까요? 그전까지는 아무 상관이 없던 사람이 어느 날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사람으로 변하는 것, 매일 보아도 어떤 감흥도 없던 들풀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이게 되는 것, 이기심으로 가득하던 삶이 어느새 세상과 이웃을 위해 작은 것 하나라도 내어주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 미움과 증오로 가득하던 마음에 어느새 연민과 안타까움이 생겨날 때… 이런 것이 진정한 기적 아닐까요? 무의미와 무가치와 혼돈 가운데 있던 삶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으로 바뀌는 것이 진정한 기적 아닐까요?

 

 

▣ 마가복음

- 복음의 시작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본문은 마가복음입니다. 마가복음은 네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최초의 복음서’입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복음서의 참고 자료가 됩니다. 1장 1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이렇게 처음 복음서는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 즉, 구원자(메시아)라는 사실을 전제하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시작이라”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알케”인데, 이는 ‘시작’ ‘기원’ ‘근원’ ‘토대’ 등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시간적 의미로 시작, 처음일 수도 있지만, 존재론적으로는 근본, 근원, 토대 등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 이야기의 처음이자, 예수 복음의 근본 본질이라는 선언입니다. 예수의 이야기, 예수의 복음이 점점 시간이 흘러가면서 잊혀질 위기에 처하자 마가는 예수의 이야기를 기록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한 예수 복음의 시작, 근본, 본질이 무엇인지를 기록하겠다는 것이지요.

 

- 독특한 서술 방식

마가복음은 당시의 글쓰기 방식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문학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기록도 아니고, 전기적인 기록도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학자들은 어떻게 이런 식의 글쓰기 방식을 가지게 되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다가 이것이 “아리탈로지” 즉, 당시 그리스(헬라)의 문화권에서 통용되던 영웅신화의 양식과 닮았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웅신화는 “집단 인격의 중심축”으로서, 영웅신화의 모방을 통해서 그 집단 구성원들로 집단 인격에 참여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영웅은 개인이 따라야 할 이상적 자아의 원형인 것이지요. 당시 문화 속에서 사람들이 따르고 추구해야 할 일종의 교과서, 모범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마가는 예수의 이야기를 이러한 영웅신화 양식으로 서술함으로써 예수를 교회라고 하는 집단의 이상적 모델로, 개인에게는 이상적 자아의 원형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형을 반복함으로써, 예수의 삶이 믿는 자들 속에서 다시 재현되기를 바랐던 것이지요. 그리고 마가는 예수를 ‘믿는다’라는 표현보다는 ‘따른다’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합니다. 단지 화석화되어 있는 어떤 위대하고 화려한 이미지가 아니라 삶 속에서 따르고 좇아야 할 실천의 대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그렇게 따라야 할 이상적 인간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그리스의 위대한 영웅들처럼, 오히려 그보다 우월한 영웅으로 그리기 위해 예수를 더욱 ‘신화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 기적 이야기

마가복음은 복음서 가운데 가장 분량이 짧습니다. 그렇지만 모두 17~18개의 기적 이야기가 나오고 이는 전체 분량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양입니다. 마가는 왜 이렇게 많은 기적 이야기로 예수 이야기를 채웠을까요? 예수에 관한 ‘최초의 복음서’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분명 무엇인가 깊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주려 할 때,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일까요? 자신에게 가장 인상 깊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을 가장 강조해야 할까요? 예수의 삶의 본질을 무엇으로 생각했을까요?

이런 식으로 마가의 의도가 무엇일지를 생각해보면, 분명 마가에게 예수의 기적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나름대로 예수 복음의 근본과 본질을 전하겠다고 생각한 그가, 기적 이야기를 그리도 많이 포함한 것은 분명 뜻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것이 영웅신화라고 하는 문학적 형식을 빌린 때문이기도 할 것이지만, 무엇인가 특별한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마가의 복음서 기록 의도에 관한 이해를 염두에 두고서 오늘 본문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제자를 부르시다.

성서해석에 있어서 먼저 전후 문맥을 살펴보는 것은 해석의 기본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 이전의 이야기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최초의 복음서는 예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세례요한의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이것도 재미있지요. 생각해 볼 여지가 많지만, 일단 다음으로 남겨두기로 하겠습니다.

예수의 첫 번째 선포는 1장 15절,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메시지를 첫 선포로 기록한 것은 아마 예수 메시지의 중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어부들인 첫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이어지는데,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 네 사람이 처음으로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물과 배, 부모와 고향을 버리고 예수를 따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네 사람의 어부에게 “회개와 믿음”을 촉구하셨고, 이에 어부들은 “버림과 따름”으로 응답한다는 내용입니다.

바로 다음으로 이어지는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쫓아내는, ‘마가복음 최초의 기적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갈릴리의 어부들과 가버나움의 회당의 사람들을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는 의도적으로 이 두 이야기를 교차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지요.

소위 ‘이방의 갈릴리’(사9:1)라고 불리는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섞여 사는, 정통 유대인의 입장에는 좀 상스럽고 세속적인 타락한 땅 갈릴리에서, 그것도 가난하고 무지한 어부들이 예수의 가르침(선포)에 어떻게 응답하고 반응하는지를 보여주고, 바로 이어서 거룩한 회당에서 예수의 선포를 받는 이들은 어떻게 응답하고 반응하는지를 대조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 회당에서 귀신 축출

오늘 회당이 있는 곳은 가버나움입니다. 가버나움은 ‘위로의 동네’라는 뜻입니다. 위로의 동네에서, 거룩한 안식일에, 거룩한 회당에서 오늘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라는 표현이 있는데, 정작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내용은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신 핵심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앞선 이야기(제자를 부르심)에서 유추해보면, 아마 회당에서도 “회개와 믿음”을 촉구하셨을 것입니다. 똑같은 메시지에 어부들과는 달리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응답했느냐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라는 표현을 나옵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이것도 참 흥미롭습니다. 위로가 가득한 땅에, 거룩한 시간, 거룩한 장소에 귀신들린 사람이 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너무 생뚱맞은 것입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존재입니다. 회당에 귀신들린 자가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되는 것이지요.

그것도 예수의 첫 번째 기적 이야기를 귀신 축출 이야기로 기록했다는 것도, 그곳이 다름 아닌 회당이었다는 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활동 전체를 개략적으로 설명/요약한 부분이 세 곳 있습니다. 일명 ‘마가 요약’이라고 부릅니다. 1:32~39, 3:7~12, 6:53~56.이 그것입니다.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1:34) 결국, 예수 삶의 요약은 “병자 치유, 귀신 축출” “말씀전파, 귀신 축출”로 볼 수 있습니다.

제자 12명을 세울 때(3:14~15)도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이런 구절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귀신 축출은 예수 활동의 뼈대입니다. 동시에 제자들에게 위임된 중요한 사역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그리스도인들도 귀신 축출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귀신을 쫓아내고 있나요?^^

 

- 귀신을 쫓아내다!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참 난감한 주제로 보입니다. 예전엔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났고 직간접적으로 경험을 하기도 했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 귀신을 쫓아내라니… 또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는 꺼려집니다. 귀신 축출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기적 이야기는 이제 다루기가 참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믿는다 할 수도 없고, 믿지 않는다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 나가는 말

- 새 교훈이로다

예수의 가르침과 귀신 축출 사건에 사람들은 “교훈에 놀라니” “다 놀라” 여기에 교훈은 가르침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예수의 가르침에 모든 사람이 놀랐다. 충격받았다는 것인데, 정작 그 가르침의 내용이 없습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귀신 축출 사건은 말 그대로 ‘사건’인데, ‘교훈’ ‘가르침’으로 표현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린 예수의 가르침을 형상화/상징화/신화화한 것이 귀신 축출 사건입니다. 즉, 예수의 설교, 예수의 가르침을 기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요. 기적 자체가 설교요. 가르침입니다. 마 8 :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마가복음을 원자료로 사용한 마태야말로 마가복음의 진정한 해석자입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는 마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귀신 축출을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귀신 축출을 가르침(말씀)이 일으킨 인간 내면의 변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란, 하나님의 영 대신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죄에 종노릇하는 삶을 일컬어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막7:20~23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위로의 땅에서 거룩한 장소와 시간에… ‘거룩’이라는 겉모습 속에 감추어 있는 더러운 영, 가식과 위선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마 23: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은 누구인가요?

 

-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회개하고 믿으라는 주님의 선포에 가난한 어부들은 기꺼이 그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지만, 회당의 점잖은 이들은, 이 세계의 가치와 이기심과 악한 생각에 사로잡힌 이들은 거부합니다. 저항합니다.

 

“부르짖었다” “예수여, 우리를 어떻게 하시렵니까?”(새 번역)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개역 성경)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려는 것입니까?”(공동 번역)

 

헬라어 원문은 “티헤민 카이 소이”인데, “무엇(누구)인가? / 우리에게 / 그리고 / 당신에게?”라는 말입니다. 동사가 생략되어 있고 주어가 없는 문장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누구인가?” “우리는 당신에게 누구인가?”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우리’라는 표현을 보면, 더러운 영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더러운 영들은 자기들을 쫓아내 주이려고 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거룩한 영이 더러운 영과 공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압니다. 교언영색입니다. 위선과 가식을 드러냅니다. ‘나사렛 예수여’ 촌놈 예수야, 시골뜨기 예수야라는 표현입니다. 경멸적 어투입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알지만, 예수의 가르침을 따를 의지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를 촌놈으로, 요즘 같은 세상에 무슨 정의니, 사랑이니, 평화니… 그런 순진한 이야기를 하느냐고 비웃습니다. 겉으로는 교회를 다니고, 번지르르한 모양과 외양을 지녔으나, 그 거룩한 곳에 앉아서 우리는 누구보다 예수를 조롱하고, 예수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부 네 명을 제자로 부르시고 회당으로 가서 예수가 하는 일을 보여주려는 마가의 의도가 보입니다. ‘너희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지만, 사람들에게는 버리지 못하는 더러운 영이 내면에 도사리고 있다. 그 욕심을 극복하지 않고는 결코 버릴 수 없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 회개할 수 없다. 따를 수 없다.’ 마가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만이 우리의 더러운 영(귀신)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힘이 아니라, 거룩함이 더러움을 씻을 수 있습니다. 머리로만 아는 것과 ‘버림과 따름’은 다릅니다. 따름없는 앎은 불가능합니다. 예수께서 명령합니다. “잠잠하고 나오라” 추상같은 명령입니다. 이 주님의 명령이 오늘 우리에게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그 말씀이 살아서 운행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기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경련을 일으키고”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스파랏소”인데, 이는 ‘잡아당겨서 찢다’라는 뜻입니다. 예수의 부름 앞에 우리의 저항은 너무나 격렬합니다. 큰소리를 지르고, 마치 우리의 육체를 찢어버리듯 하는 엄청난 고통과 저항 끝에 더러운 영은 우리를 떠나갑니다. 세상적 가치를 버리지 않으려 악다구니를 쓰는 인간의 모습, 바로 나의 모습을 봅니다. 엄청난 내적 갈등을 겪습니다. “영을 따라 사느냐?” “육을 따라 사느냐?” “거룩한 신의 부름을 좇아 살 것인가?” “이 세계의 욕망을 좇으며 살 것인가?”

엄청난 도전이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예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삶이 변화하는 사건을 귀신이 쫓겨나가는 기적으로 마가는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어찜이냐?”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명령하고 더러운 영은 복종합니다. 내적 혁명이 일어납니다. 우리를 이끄는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이고, 이것이 회개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기적이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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