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9.7. (출 14:15-31)
신학적 주석
오늘 본문 출 19:19-31절은 구약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거의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도움으로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홍해를 건너는 장면입니다. 그 장면이 영화 <십계>에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든 팔을 홍해 쪽으로 향하자 바람이 불면서 바닷물을 양쪽으로 밀어냈습니다. 바다에 길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을 안전하게 지나고, 그 뒤를 따라오던 이집트 군사들은 다시 바닷물이 길을 덮자 모두 몰살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영화를 보신 분들은 이런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날 겁니다. 제 기억에는 어딘가 중요한 장면에서 박수를 친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바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성서가 보도하는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능력은 역시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런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도 믿음만 있다면 홍해와 같은 이 세상을 갈라서 복음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성서 이야기를 호기심으로 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모세의 지팡이에 관심을 더 갖기도 합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홍해를 치니 갈라진 것처럼 세상을 대적하려면 우리에게도 믿음의 지팡이가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이런 지팡이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부추기는 분들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지 홍해 이야기는 대다수 기독교인들에게 신앙을 강화하는데 아주 중요한 소재로 받아들여집니다. 여기에는 바로 홍해가 갈라졌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믿음이 작용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홍해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런 주장의 근거는 몇 가지가 됩니다. 가장 중요한 근거는 그 사건이 자연원리에 대한 우리의 상식과 배치된다는 것입니다. 바다가 갈라져서 수십만 명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물 벽을 쌓는 일은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보령에도 모세의 기적과 같은 일들이 자연적으로 일어나기는 합니다. 보령 앞바다에는 매달 보름과 그믐사리 때 넓이 10m, 길이 1.5km 되는 길이 열린다고 합니다. 이 두 현상을 똑같은 것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보령 앞바다는 정기적으로 갈라지는 사건이지만 홍해는 일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자연현상의 상식에 대해서 반대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한 분이기 때문에 원하기만 한다면 창조의 원리를, 즉 자연의 원리를 일시적으로 허물 수 있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이런 주장이 아주 깊은 신앙에서 나온 것 같지만 그렇게 논리적인 것은 못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실 때 초자연적인 능력을 행하신다고 한다면 굳이 홍해를 가르는 방식이 아니라 이집트를 이스라엘 사람들의 나라로 바꾸는 게 더 효율적인 방법이었을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사람을 하늘로 날게 해서 단번에 가나안 땅으로 옮겨놓으시는 게 더 좋았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무조건 앞세우는 건 결코 신앙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건 전지전능이 무슨 뜻인지를 깊이 아는 게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홍해 사건이 자연원리에 위배된다는 주장을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사실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습니다.
홍해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는 또 다른 근거는 성서비평적인 것입니다. 홍해를 가리키는 단어 ‘얌 숲’은 원래 갈대 바다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만약 이 단어를 갈대가 자라는 늪으로 번역할 수 있다면 분명히 홍해가 갈라지는 그런 멋진 장면은 사실과는 조금 거리가 멀게 됩니다. 그 단어가 실제의 홍해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였을 수도 있고, 홍해에서 더 북쪽으로 이어진 부분을 가리키는 단어였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것이었든지 영화 <십계>에 나오는 그런 초자연적 사건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성서 텍스트에 대한 이런 역사비평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말씀을 난도질하는 게 아니라 확실하게 믿는 것이고, 그래야만 우리의 신앙이 깊어진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런 주장에는 성서가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이니까 우리의 이성을 뛰어넘는다는 논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이 부분적으로 옳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옳지 못합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이런 논리에 따르면 사이비 이단들에 대해서도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도관이나 통일교는 너무 멀리 나간 이단이니 접어두고, 귀신론의 김기동 목사나 구원파의 박옥수 목사의 주장도 성경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는 것만 주장한다면 누가 옳은지 구분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서에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야기와 그것을 통해서 성서기자가 말하려는 메시지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양식으로 표현하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달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손가락만 보고 그것을 달로 믿으라고 닦달한다면 그건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이 가리키고 있는 달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행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민족은 둘입니다. 하나는 당연히 이스라엘 민족이고, 다른 하나는 이집트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탈출해서 도망가는 중이고, 이집트는 그들을 쫓아가는 중입니다. 이스라엘은 남자 장년만이 아니라 여자, 어린이, 노인들이 모두 포함된 집단이래서 도망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이집트는 최정예 기동부대로 구성되었습니다. 이집트의 기병이 이스라엘을 따라잡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본문 19,20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천사가 중간에 가로막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구름기둥이 그 중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양쪽이 서로 볼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이집트가 아무리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홍해 이야기는 이 뒤로 본격적으로 전개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유의해서 봐야 할 대목은 이 이야기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대상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이집트 민족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따라가면 이스라엘보다는 이집트 군대가 더 많이 등장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홍해 사건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기적으로 홍해를 건너게 하신다는 이야기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이집트를 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홍해 이야기는 하나님과 이집트 군대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이집트를 어떻게 다루시는가 하는 게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세 단계로 이집트 군대를 궤멸시키셨습니다.
첫 단계는 야훼께서 불과 구름기둥에서 이집트 군대를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도망가는 이스라엘과 쫓아가는 이집트 중간에 구름으로 담을 쳐서 일단 위급한 상황을 모면하게 한 다음에 야훼께서 밤새도록 거센 바람을 일으켜 바닷물을 뒤로 물러나게 하셨다고 합니다.(21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른 땅을 밟고 홍해를 건넜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뒤쫓아 왔습니다. 파라오의 말과 병거와 기병이 바다로 들어선 바로 그 순간에 야훼께서 불과 구름기둥에서 이집트를 내려다보시자 이집트 군대들이 갈팡질팡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처럼 눈이 있어서 이집트 사람들을 내려다본 것은 아니겠지요. 성서기자도 야훼 하나님이 내려다보았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이 그것에 대해서 이미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이집트 군대가 감당할 수 없는 충격과 두려움에 빠진 것만은 분명합니다. 마치 토네이도가 몰아치기 직전에 뉴올리언스 사람들이 경험한 것과 비슷하겠지요.
두 번째 단계는 야훼께서 이집트 군대의 병거 바퀴들을 얽어놓아 꼼짝도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병거는 그 당시의 최첨단 무기입니다. 주변의 작은 나라 백성들은 이집트 병거를 보면 큰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이 병거가 이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병거가 없으면 이집트 군대는 아무런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지금 독안의 든 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야훼가 바라본다는 두려움에 빠진데다가 실제로 병거까지 완전히 못쓰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이런 상황에서 얼마나 크게 두려워했을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버려두고 도망가자. 야훼께서 이스라엘 사람들 편이 되어 우리 이집트 군대를 치신다.”(출 14:25) 그들은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빠졌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바닷물을 제자리로 돌리는 것입니다. 모세가 야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팔을 뻗자 벽을 치고 있던 물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성서기자는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집트인들은 물결을 무릅쓰고 도망치려고 했으나, 야훼께서 이집트인들을 바다 속에 처넣으셨다. 물결이 도로 밀려오며 병거와 기병을 모두 삼켜버렸다. 이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따라 바다에 들어섰던 파라오의 군대는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였다.”(27,28절) 야훼 하나님의 완벽한 승리입니다.
여기서 이집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극적으로 묘사되는 반면에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싱거울 정도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밟고 걸어간 것밖에는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 군대와 싸울 생각도 없었고, 싸울 기회도 없었습니다. 아무런 말도 없었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았고, 뒤에서는 파라오의 군대가 쫓아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모세에게 입에 담지 못할 불평을 해대던 그들이 이렇게 중요한 장면에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그 장면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까요, 하고 야훼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행동지침도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팔을 뻗었을 뿐입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홍해 기적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사람은 전문적인 이야기꾼입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역할을 축소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행위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행위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의 외침은 하나님 앞에서의 항복 선언에 불과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홍해 이야기는 초자연적 기적에 관한 보도가 아닙니다. 홍해가 갈라졌다는 것은 이 이야기에서 핵심이 결코 아니라는 뜻입니다. 자연과 인간까지 야훼 하나님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가 핵심입니다.
두려움과 믿음
홍해가 갈라진 기적과 야훼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결국 똑같은 게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홍해 기적은 말하자면 손가락이고, 하나님의 구원 통치는 달입니다. 손가락에 호기심을 느끼는 사람은 결코 달을 볼 수 없듯이 홍해 기적에 마음을 두는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기적은 자꾸만 작아져야 하고,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더 커져야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만이 우리의 전체 삶을 완전하게 지배해야 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야겠습니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초능력자처럼 경험됩니다. 자기 아버지가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세고, 어머니가 가장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먹고 싶은 것과 갖고 싶은 것을 부모님이 모두 해결해줍니다. 그런 것이 자녀들에게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자녀들이 어른이 되면 부모와 다르게 관계를 맺습니다. 기적적인 일을 매개로 하는 게 아니라 인격을 매개로 관계를 맺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성숙 정도에 따라서 이렇게 달라질 수 있으며, 달라져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이 홍해 기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이야기의 결론인 31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께서 이집트인들을 치는 걸 보고 야훼를 두려워하며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게 결론입니다. 정확하게 보면 야훼와 그의 종 모세를 믿게 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모세는 야훼의 종일뿐이지 야훼와 버금가는 믿음의 대상이 결코 아닙니다. 성서기자의 관심은 홍해가 갈라진 것 자체가 아닙니다. 성서는 그 장면을 자세하게 묘사하지도 않았습니다. 결론 부분에서도 야훼께서 이집트인들을 치셨다고 했지 홍해를 갈랐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두 가지는 같은 사건을 말하기는 하지만, 성서기자가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는 분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 즉 두려움과 믿음이 바로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입니다.
홍해 전승이 말하는 그 두려움과 믿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어디서 이런 두려움과 믿음을 경험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바로 두려움이며,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구원자로 믿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저주스러운 방식으로 처형당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삶이 부정될 수 있다는 그 사실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배타적인 생명사건입니다. 그것은 바로 홍해 사건과 같습니다. 거기서 우리의 계획이나 성취와는 완전히 다른, 정말 이질적인 생명이 발생했습니다. 우리가 절대적인 것으로 믿고 있던 우리의 업적들이 마치 홍해 바다 속에 수장된 이집트 거병처럼 사라진다는 사실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여러분은 잘 알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두려움에 떨지는 마십시오. 이런 두려움, 즉 거룩한 두려움은 우리를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을 의존하게 만듭니다. 그런 의존성이 바로 믿음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놀라운 평화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로, 그래서 은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배타적인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에서만 평화와 자유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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