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하나님 찬양
오늘 본문 이야기는 예수님이 ‘나인’이라는 마을로 들어가시는 중에 일어난 사건에 관한 보도입니다.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뒤따랐습니다. 그들이 마을 입구에 이르렀을 때 마침 마을에서 나오는 장례행렬을 만났습니다. 여러분은 그 장면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마을로 들어가는 예수님 일행과 공동묘지로 가기 위해 마을에서 나오는 장례행렬이 마주쳤습니다. 상여가 맨 앞에 있고, 그 뒤를 상주들과 조문객들이 따릅니다. 그런 일반적인 장례행렬은 흔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장례는 특별했습니다. 죽은 사람이 젊은이였습니다. 더구나 이 젊은이는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남편을 잃고 외아들에게 희망을 걸고 살던 여자가 아들을 잃었으니 이것보다 더 비극적인 상황은 없습니다. 성서기자가 이 여자의 심리상태를 묘사하지 않고 아주 간단히 사실 보도로 끝나지만 우리는 과부와 그 장례행렬에 함께 나선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없는 절망과 슬픔이 장마철의 먹구름처럼 그들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울지 마라!
예수님은 아들의 상여를 뒤따르고 있는 과부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울지 마라.” 하고 위로하셨습니다. 울지 말라니요? 도대체 이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슬플 때 사람은 울어야 합니다. 더구나 이 여자의 슬픔이 보통 슬픔인가요? 자식을 먼저 보내는 걸 참척(慘慽), 즉 참혹한 고통이라고 한답니다. 더구나 이 여자는 원래 남편을 잃은 적이 있으니,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을 버텨내는 길은 통곡밖에 없을 겁니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이 아들을 잃고 쓴 책이 <한 말씀만 하소서>입니다. 제 기억에 박완서 선생님도 병으로 남편을 잃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레지던트 훈련을 받은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습니다. 그는 참척의 고통을 겪었다고 하더군요. 일상의 무엇 하나 제대로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수녀원에 들어가서 몇 달을 지낸 후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왔다고 합니다.
울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말로 위로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마음으로 위로만 하겠다는 의미라면 실컷 울게 내버려두었을 겁니다. 울지 말라는 말씀은 이미 울지 말아야 할 어떤 상황을 전제합니다. 그 상황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죽은 외아들의 소생입니다.
예수님은 상여에 손을 대셨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시체가 담긴 관은 부정하기 때문에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에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웬 낯선 남자가 상여에 손을 대는 걸 이상하게 생각한 상여꾼들이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시체를 향해서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젊은이여, 일어나라.” 그러자 죽었던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장면에서 여러분의 생각은 아주 복잡할 것입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을까 하고 의심스러워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또는 그래, 바로 저거야, 죽은 사람도 살리실 분은 예수님밖에 없어, 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우리는 성서가 보도하고 있는 내용이 과학적으로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차원에서만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은 성서를 읽는데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성서가 말하려는 것은 물리학도 아니고 마술도 아닙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증언합니다. 특히 복음서는 예수님에게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통치와 구원행위를 증언합니다.
죽었던 사람이 소생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행위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바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보다 더 위대한 사건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다른 많은 고대 문서에도 죽었던 사람을 다시 살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인들에게도 그런 전승들이 제법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로 엘리야와 엘리사 전승과 연결됩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초자연적 능력을 행한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지난주일 설교 본문인 가르멜 산에서의 불 이야기를 비롯해서 엘리야와 연관된 수많은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있습니다. 왕상 17:17-24절에는 엘리야가 사렙다에 사는 어떤 과부의 죽었던 외아들을 살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왕하 4:18-37절에는 엘리야의 제자인 엘리사가 수넴에 사는 어떤 부인의 외아들을 살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세 이야기가 약간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신학적 착상은 비슷합니다. 세 이야기가 모두 여자들이 당한 극한의 슬픔을 배경으로 합니다. 고대시대에 여자가 외아들을 잃었다는 것은 자기 전체를 잃은 것과 똑같습니다. 이 세상을 버텨낼 수 없는 참혹한 비극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죽었던 외아들이 소생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지금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오죽이나 좋을까 하고 생각할 겁니다.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어린아이들과 젊은이들이 죽어 가는지 모릅니다. 소아암병동에 가보신 적이 있나요? 그렇게 죽은 아이들을 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간혹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이 있기는 합니다. 심지어 죽어 천당에 가서 본 것을 책으로 써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소문은 별로 믿을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들은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가사상태에 빠졌다가 다시 빠져나오거나, 또는 환상을 본 것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다시 현실의 삶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절대적 차원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에는 분명히 죽었던 젊은이가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는데, 당신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하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시겠군요. 당신은 성서를 믿지 않는 사람인가, 당신은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을 인정하지 않는 이신론자인가, 하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성서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성서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만 저는 성서가 말하려는 핵심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뱀을 쥐거나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것”(막 16:18)이라는 말씀을 사실로 믿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나인에 사는 과부의 아들이 죽어서 공동묘지로 가는 중간에 예수님을 만나서 다시 살아났다는 이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믿는 게 믿음이 아니라 바르게 믿는 게 믿음이니까요. 이건 성서를 의심하기 때문이 아니라 성서가 고대인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담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교회가 신학교 강의실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말이 나온 김에 이런 문제를 조금 더 설명해야겠군요. 2천 년 전 고대인들은 이 세계를 하늘과 땅과 지하라는 삼층의 구조로 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을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의학적인 지식도 없었습니다. 악성 피부병은 모두 문둥병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어려운 병들은 모두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잠간 기절했는지 아니면 진짜 죽었는지를 정확하게 분간하기도 힘들었습니다.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그런 일들은 자주 있었습니다. 아이가 숨이 끊어져서 죽은 줄 알고 날이 새면 화장터에 보내려고 윗목으로 밀어두었는데, 아침에 보니까 다시 살아난 일들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젊은이도 사실은 죽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죽은 것으로 알고 장사를 지내려다가 예수님이 그걸 발견해서 다시 살려낸 사건이라고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젊은이가 예수님을 통해서 다시 생명을 얻었으며, 이를 통해서 참척의 고통에 빠졌던 과부도 역시 생명을 얻은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고대인들이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자기들의 방식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성서를 읽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어린아이의 세계관으로 이 세계를 경험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두려움과 찬양
성서기자가 독자들에게 정작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성서는 다시 소생한 젊은이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고 하면서도 무슨 말을 했는지 설명하지 않고, 아들을 다시 건네받는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했는지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서기자가 그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16절에 보면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했다고 합니다. 그 찬양의 내용은 “우리 가운데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셨다.”거나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와 주셨다.”입니다. 메시아 찬양으로 안정맞춤의 노래입니다.
앞에서 저는 본문 사건이 구약의 엘리야와 엘리사 사건과 연결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엘리야가 중요합니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승천한 사람이며, 메시야가 오기 전에 미리 올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바로 엘리야의 초자연적 카리스마를 다시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구원통치가 바로 예수님에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경험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함께 한다는 사실을 경험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경험이 기쁨이라고 생각하시겠지요. 기쁨은 나중입니다. 기쁨 이전에 두려움이 먼저 옵니다. 모세도 두려워했고, 이사야도 두려워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의 부르심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너무 좋아서 껑충껑충 뛰었다고 말할 분들이 있겠지요. 뛰는 것도 두 번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맛본 사람은 두려워합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그 깊이를 우리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깊습니다. 그의 사랑도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습니다. 그의 구원행위도 우리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깊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깊이를 조금이라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은 이런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지구의 나이는 대략 45억년입니다. 아주 오랫동안 지구에는 생명이 없었습니다. 최초의 생명흔적은 35억 년 전입니다. 그런 세월이 30억 년쯤 흐른 뒤 5억4천2백만 전에 크고 작은 생명체들이 갑자기 폭발하듯이 지구에 출현했다고 합니다. 이 시기를 가리켜 캄브리아기라고 하는데, 고생대의 시작입니다. 그 뒤로 고생대를 포함해서 중생대와 신생대 등 많은 세월이 흐르는 뒤 신생대 끝인 3백만년 전에야 겨우 현재 인간의 선조라 할 유인원 호모에렉투스가 출현합니다. 제가 지금 잘 알지도 못하는 지질학과 생물학을 말씀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시간 앞에서 두렵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공포가 아니라 창조사건의 신비 앞에서 느끼는 아득함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두려움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에게서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행위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 두려움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멍청이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게으르고 무책임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이런 두려움은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이게 바로 이 세상의 공포와 신앙적인 두려움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통치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에서만 비로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자기 혼자 즐거워서 복음찬송을 부를 수는 있지만, 그건 자기 흥에 겨워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사람의 감정이 취해서 부르는 노래와 하나님의 구원통치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노래는 전혀 다릅니다. 앞의 노래에서는 자기가 중심이 되지만 뒤의 노래에서는 자기가 끝없이 작아집니다. 전자에서는 나의 즐거움, 나의 행복이 노래되지만, 후자는 하나님의 높으심과 능력이 노래됩니다. 이건 단순히 가사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노래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전자에는 사람의 감정이 고조되지만, 후자는 그것이 억제되고 영성이 풍요로워집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람들은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셨다고 찬양했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아와 같은 위대한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예언자 중의 한 사람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찾아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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