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gkVLBC1D6JM&t=4094s
▣ 들어가는 말
- 인간과 벌레
개인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고 결핵으로 40에 목숨을 잃었지만, 20세기 위대한 천재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변신』은 인간 존재의 본질과 인간소외에 대한 깊은 통찰을 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그레고르는 아침에 일어나서 자신이 한 마리 갑충으로 변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모습 때문에 직장에도 가지 못하고 가족들에게도 점점 고립되고 멀어지다가 결국 방에서 목숨을 잃습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이루어진 단편소설입니다.
이 소설에서 그레고르는 사회와 가족에서 철저히 소외당합니다. 이는 현대인이 겪는 깊은 인간소외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가족의 기대, 역할과 책임 등 가족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겉모습은 벌레가 되었지만, 생각과 마음은 여전히 인간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줍니다.
우리 인간은 ‘사이에 끼인 존재’ 같습니다. 해야 할 일과 사람과의 관계 사이에서, 다양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무거운 책임과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 사이에서, 돈과 양심 사이에서, 탐욕과 베풂 사이에서, 심지어 사람이 될지, 짐승이 될지 사이에서… 그 사이에서 끝없이 갈등하며 사는 존재 말입니다. 정말이지 고달픈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존재이다. 그가 어느 길을 가거나 자유다. 그러나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인생은 B와 D 사이의 C이다.” 샤르트르의 말입니다. B는 birth, D는 death, C는 choice. 결국,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무수히 많은 선택이 있고 인간은 그 선택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지요.
- 둘 사이에서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왕상 18:21) 언제나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머뭇거리는 못난 백성들을 향해 위대한 엘리야가 외칩니다. ‘언제까지 그럴 것이냐’고 말이지요. 제가 목사이다 보니 이런 말씀을 전하지만, ‘그럼 너는 온전히 하나님의 길을 가고 있느냐?’ 물으신다면 저 역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네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저와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비루하고 못난 모습이지요.
인간의 삶은 이렇듯 언제나 가운데 끼인 존재로 살고 있습니다. 직장(일)에서도, 가족에서도, 사람들 속에서도, 신앙생활에서마저도… 결단력 있게 하나를 선택해버리면 좋을 텐데, 우리는 늘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이쪽을 선택하고 난 후에도 다른 쪽으로 눈길이 가고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의 못난 모습입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프란츠 카프카의 사후 100주년 기념으로 나온 『우리가 길이라 부르는 망설임』이라는 책에 나오는 짧은 산문시 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너를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냐?
너의 마음의 안정을 잡아채는 것은 무엇이냐?
네 방문의 손잡이를 더듬는 것은 무엇이냐?
거리에서 너를 부르면서도
열린 문으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무엇이냐?
아아, 네가 방해하고 있는,
네가 그 마음의 안정을 잡아채고 있는,
네가 그 방문의 손잡이를 더듬고 있는,
네가 거리에서 부르면서도
그 열린 문을 통해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
바로 그 사람이다.
▣ 나봇의 포도원
- 역사적 상황
솔로몬 왕국이 남(유다)과 북(이스라엘)로 분열된 이후, 유다의 르호보암이 이집트 침공에 대비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은 자신의 왕국을 강화하기 위해 수도인 세겜을 강화하고 요새를 건설하고, 단과 벧엘에 성소를 세웁니다. 이후 북이스라엘이 강해지자, 유다의 아사 왕은 시리아의 벤하닷과 동맹하여 이스라엘을 침공합니다. 이로 인해 북이스라엘은 혼란에 빠지고 암살, 자살, 음모 등으로 왕들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극도의 혼란한 상태가 이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령관인 오므리가 권력투쟁에서 최고 실력자로 부상, 쿠데타로 왕위에 오릅니다.
신명기 사가는 그에게 가혹한 평가를 하지만 그는 대단한 정치력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왕조가 몰락한 후에도 앗시리아의 왕들이 북 왕국을 “오므리가의 땅”이라 불렀을 정도로 대단히 명성 있는 왕조를 창설한 것입니다. 그는 유다와 화해하고 왕가 사이의 통혼으로 협력을 더 공고하게 합니다. 요단 동편의 모압 족을 복속하고, 시리아와의 교역 활동을 통해 시리아의 침공을 막았고, 페니키아와 우호조약을 체결하여 국권을 튼튼히 합니다. 페니키아 왕의 딸 이세벨과 결혼으로 우호 관계는 절정에 달하지요. 아울러 무엇보다 사마리아를 건설, 수도로 삼습니다. 사마리아는 언덕의 가파른 경사 때문에 함락이 어려웠고 남북을 관통하는 대로에 위치해 전략적으로나 무역의 측면에서도 요지였습니다.
- 아합
그 위대한 왕의 아들이 아합입니다. 아합 왕은 남 유다를 비롯한 가나안 지역과 시리아 아람 지역에서 강력한 작은 제국주의 권력을 누립니다. 모압에게 어린양 십만 마리와 숫양 십만 마리가 생산하는 양털을 조공으로 받았습니다. 성서에 수도 사마리아의 아합 왕궁을 상아궁으로 표현한 것을 보면 굉장히 화려했다는 것이겠지요. 그것도 모자라 사마리아에서 북쪽으로 38km쯤 떨어진 이스르엘 평원에 별궁을 짓습니다. 이스르엘 평원은 땅이 비옥해 온갖 농산물이 생산되고 경치도 뛰어난 곳입니다.
- 나봇의 포도원
아합은 별궁에서 내려다보이는 좋은 땅을 눈에 담습니다. 왕은 별궁을 확장하고 별궁에 옆에 붙어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사들여 ‘채소밭’으로 꾸미려 합니다. 원문으로 보면 ‘식물원’ ‘정원’ 정도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포도원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넉넉하게 쳐주겠다고, 돈이 아니라 땅, 포도원을 원하면 더 기름지고 좋은 포도원으로 바꿔주겠다는 인심 좋은 제안을 합니다. 나봇은 ‘네 포도원을 팔라’는 아합 왕의 요구를 거부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잘못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볼 때, 아합왕의 제안은 불합리하지도 않고 이치에 맞습니다. 또한, 아합 왕은 북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지고 가장 큰 영토를 통치하는 왕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가운명이 걸린 두 차례의 전쟁을 큰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절체절명의 국가위기 속에서 시리아 아람 대군을 맞이해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니 왕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와 인기도 높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왕의 제안을 거부한다는 것은 미쳤거나 바보거나 이지요.
그러나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25: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 곧 네 소유가 된 기업의 땅에서 조상이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지니라.”(신19:14) 나봇은 팔 수가 없습니다. 뭐 그리 대단한 포도밭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밭이지만, 대대로 이어져 온 땅입니다. 조상들이 물려준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땅입니다. 절대로 이익이나 상황에 따라 처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충돌
아합 왕은 북이스라엘 왕들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왕입니다. 힘으로 포도원을 뺏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정당한 수단을 통해서 나봇의 포도원을 넘겨받으려고 합니다. 아마 앞선 두 차례의 전쟁에서 종교적인 신앙의 힘(하나님)으로 승리한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최대한 배려하고 양보해서 좋은 제안을 내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본인도 여호와에 대한 신앙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는지도요. 아무튼, 아합 왕은 나봇이 그를 향해 내뱉은 말 때문에 화가 나고 못마땅해서 궁으로 돌아옵니다. 침대에 누워 음식도 먹지 않고 끙끙 앓기만 합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자존심이 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아울러 신앙적인 갈등도 있었겠지요.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21:7) 군대 지휘관이었던 오므리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시 외국인들이 들어와 이스라엘의 직업 군인이 되고 최고 군사 지도자 위치에 오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므리’와 그의 아들 ‘아합’은 이스라엘식 이름이 아닙니다.(아랍식 작명법) 따라서 그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종교는 매우 성가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 종교적 색깔이 너무 짙어서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이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겠지요.
아합 왕의 왕비 이세벨은 페니키아 시돈 왕국의 공주로서 바알 신앙 선교사를 자처하며 북이스라엘로 시집을 왔습니다. 이제야말로 이세벨은 이스라엘의 신앙 행동법규들을 끝장낼 때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고대사회에서 토지를 포함한 국가의 모든 것은 왕의 소유입니다. 심지어 백성들의 생명마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그러니 아합 왕의 통치에 번번이 시비를 거는 이스라엘의 신앙과 전통을 마침내 무너뜨릴 때라고 여겼을 테지요.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 없이 사법 농단을 통해 끔찍한 살인을 하고 토지를 빼앗습니다. 거기에 도시의 장로들과 귀족들이 협력하지요. 오늘의 대한민국을 보는 것 같습니다. 나봇은 결국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라는 죄목으로 돌에 맞아 목숨을 잃습니다.
▣ 나가는 말
- 생명과 죽음의 대결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가 끊임없이 부딪치고 충돌하는 세계입니다. 생명과 죽음이 한 치 양보 없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세상입니다.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한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있나요? 삶과 죽음의 선택의 순간에 죽임이 아닌 삶을 선택하기 위한 기준. 사람이 되느냐, 짐승이 되느냐의 순간에 사람이 되기로 선택하는 기준 말입니다.
가난한 농부에 불과한 나봇은 당대에 가장 강력한 왕과 좋은 관계를 맺을 기회를 포기합니다. 오히려 왕의 눈 밖에 나고 자칫 목숨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상황을 자초합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명령은 수백 년 전의 일입니다. 아직도 그런 믿음을 지키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모두가 이익만을 좇는 세상입니다. 그냥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후하게 값을 치르겠다 합니다. 더 좋은 포도원을 주겠다 합니다. 그런데 그는 신념(신앙)을 버릴 수 없습니다. 신념의 세계, 믿음의 세계를 삽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모두가 돈에 굴복하는 세상입니다. 나라의 모든 것은 왕의 소유입니다. 따지고 보면 전부 자기의 것인데, 백번 양보해서 대가를 치르면서 달라고 하는데, 그것을 거부하다니요. 그것도 그 핑계가 하나님(신앙) 때문이라니요. 땅은 왕의 것, 내 것인데, 하나님 것이라니요.
- 아합은 누구인가
역사적인 사실은 아합은 북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를 이룬 왕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사가는 그를 매우 우유부단하고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고 늘 타인에게 의존하며, 문제가 생겼을 때 언제나 남 탓을 하는 아주 비겁하고 못난 사람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국가에 가뭄과 기근이 들었을 때도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왕상18:17) 엘리야의 탓으로 돌립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도륙했을 때에도,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왕상19:1) 문제의 해결을 왕비 이세벨에게 떠넘기고 있습니다. 아람(시리아) 왕 벤하닷이 침공해 왔을 때도,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같이 나와 내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왕상20:4)라며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해버리려 합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을 때도 승리감에 도취하여, “아합이 이르되 내가 이 조약으로 인해 당신을 놓으리라 하고 이에 더불어 조약을 맺고 그를 놓았더라”(왕상20:34) 다 잡은 고기를 놓아버리고 맙니다. 그 일로 선지자에게 책망을 받자, “왕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그의 왕궁으로 돌아가려고 사마리아에 이르니라.”(왕상20:43). 나봇이 포도원 판매를 거부했을 때에도,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하니”(왕상21:4)… 보고 있자니 천불이 납니다. ‘뭐 이런 인간이 있나.’ 싶습니다. 이러고도 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라 할 수 있을까요.
대체 그는 어떤 인간이었을까요. 당시의 국제적인 정세, 국내적인 화합, 종교적 갈등의 문제 등 너무나 많은 문제로 인해 생각이 많아서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왕이니, 함부로 쉽게 이리저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요. 혹은 그냥 마음 약한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진 평범한 남자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정말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던 사람이었을까요.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그는 정말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싶은데, 이세벨의 꾐으로 어쩔 수 없이 바알을 섬기는 것이었을까요? 나봇의 포도원을 이세벨이 어떻게 빼앗을지 몰랐을까요? 자신이 유혹에 넘어가고 싶은 것 아니었을까요? 보이지 않는 신념, 원칙,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풍요를 가져다주는 바알을 따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아합은 누구일까요? 성경은 아합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비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끊임없이 아합처럼 마음속으로 변명하고 타협하면서 ‘상황이 어쩔 수 없다’라며, 이세벨의 뒤에 숨어서 내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이방의 여인 이세벨이 하는 것이라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합의 비굴한 웃음 속에서 제 모습이 보입니다. 그의 변명에 저의 변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런 우리를 향해 성경은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선택하며 사느냐?”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우리 모습입니다.
“흔들리며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흔들리지 않는다면, 이미 죽은 것 아닐까요. 이리저리 흔들리고 흔들리며, 비바람에 젖고 젖으며 사는 사람, 삶이지만 언젠가 그 속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길, 사랑으로 피는 삶이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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