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나드 향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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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기자는 오늘 벌어진 사건의 장소와 일시를 아주 정확하게 전달합니다. 이 보를 읽기만 해도 그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유월절 엿새 전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월절은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한 바로 그 유월절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3km 정도 떨어진 베다니에 도착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베다니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라자로가 사는 고장이었다.”
베다니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만찬회가 베풀어졌습니다. 그 당시는 이미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의 핵심 세력이 나사로 사건으로 인해 예수님을 처단해야겠다고 작당하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요한복음 11:57절에 따르면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의 거처를 아는 자는 신고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일종의 지명수배 명령을 내린 것이죠. 이렇듯 분위기가 험악한 그 시절에 예수님을 위한 식탁이 준비되었다는 것은 의외입니다. 집주인이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이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식탁을 마련한 주인은 나사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었고, 누이 동생인 마르다는 시중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아름답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중심으로 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에 나오는 장면처럼 가까운 사람들이 식탁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았습니다. 가운데는 은은한 빛을 내는 등불이 켜져 있었겠지요. 유대인들이 즐겨 먹는 빵, 치즈, 양고기, 과일 같은 것들이 식탁에 놓여 있었겠지요. 거기 모인 사람들은 이 유월절에 예수님에게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을 겁니다. 앞서 지적한대로 제사장과 바리사이파들의 노골적인 적개심이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으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불안에 휩싸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지금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평화를 경험하지 않았을까요? 어둠이 깔리는 이 순간, 베다니 나사로의 집 ‘밖’은 두려움과 음모가 팽배했지만 집 ‘안’은 사랑과 평화가 가득했습니다. 제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만약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밥을 먹고 그냥 헤어지기만 했다면 이 식탁은 매우 귀한 자리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복음서에 기록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의미를 담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나사로의 누이이면서 마르다의 동생인 마리아가 나드 향유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그 향기가 온 집을 진동시켰습니다. 마리아의 향유 사건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본문이 약간씩 차이가 납니다.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마리아라는 이름 없이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발이 아니라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고 묘사합니다.(막 14:3 이하, 마 26:6 이하) 그래도 전체적인 틀에서는 다를 게 없습니다. 어떤 여자가 예수님에게 비싼 향유를 쏟아 부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오늘의 사건이 이 대목에서 끝났다면 매우 감동적인 장면으로만 기억될 뿐이었겠지요. 여기에 다른 또 하나의 사건이 개입됩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가리옷 사람 유다가 왜 그렇게 비싼 향유를 낭비하는가 하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 향유의 값인 삼백 데나리온은 그 당시 노동자들의 연봉에 해당됩니다. 지금의 화폐 가치로 최소한 2천만 원입니다. 유다의 논리는 아주 명백하고 합리적입니다.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게 마땅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내 장례일을 위하여 하는 일이니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마라.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함께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 12:7,8절)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하라는 말씀이 보충되어 있습니다. 표현에서 약간 씩 차이가 나지만 이 세 복음서의 공통적인 강조점은 이 여자의 향유 사건이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며,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과 연결시키는 것은 잘못이라는 사실입니다.
향유를 붓다.
필름을 뒤로 돌려서 마리아가 향유를 들고 나오는 장면부터 다시 봅시다. 오빠와 손님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자리하고 있었고, 언니 마르다는 시중을 들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도 손님들이 오기 전에는 이런 식사 준비를 도왔을 겁니다. 밥 먹는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린 된 다음, 마리아는 결혼할 때 지참금으로 갖고 가기 위해서 준비해두었던 나드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 식탁 자리에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발 앞에 앉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왜 저러는가 하고 궁금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닦는 걸 보고 사람들은 모두 놀랐겠지요. 도대체 저 아이가 왜 저러는가?
예수님은 마리아 남매들과 아주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이 눈물을 흘릴 정도였습니다. 누가복음의 한 전승에 따르면 마리아는 언니 마르다와 함께 예수님을 극진히 따랐습니다. 특히 마리아는 영성이 매우 예민한 여자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그들의 집에 들렀을 때 마르다는 손님 접대로 분주한 반면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고 합니다.(눅 10:38 이하) 오늘 본문도 이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마르다가 손님들의 시중을 들고 있는 그 순간에 마리아는 향유를 쏟아 부었습니다.
도대체 마리아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요? 예수님이 나중에 설명하셨듯이 그녀가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일까요? 유대인들은 시체에 향유를 발랐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을 때는 곧 안식일이 시작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향유를 바르지 못하고 일단 안장했다가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이른 아침에 향유를 바르려고 여러 명의 여자들이 무덤에 갔다가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지금 마리아는 미리 예수님의 죽음을 뚫어보고 그런 장례 의식을 치른다는 생각을 했을까요? 마리아가 아무 말 없이 행동만 하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그걸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마리아가 예수님과 영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걸 전제한다면 그녀가 예수님의 죽음을 예상했다고 보아도 좋습니다. “당신들은 지금 이렇게 밥이나 먹으면서 즐거워하지만 예수는 곧 처형당하신다. 왜 그걸 모르나?” 이런 생각으로는 그는 일종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게 아닐는지요.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식적으로 볼 때 나드 향유는 좀 심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라는 차원이라고 하더라도 어떻게 한 사람의 연봉에 해당되는 향유를 그 자리에 붓는다는 말인가요? 이건 낭비 아닌가요? 꼭 이래야만 되나요? 나드 향유가 아니라 따뜻한 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기만 해도 괜찮을 건 아닐까요? 이런 행동은 누가 보더라도 별로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조금 더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이런 행동은 신앙이라기보다는 광신처럼 보입니다.
가난한 사람
아마 초기 기독교에서도 마리아의 행동이 옳은가 아닌가 하는 논란이 분분했을 겁니다. 같은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각각의 복음서가 서로 다른 뉘앙스를 보인다는 게 이에 대한 증거입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마리아의 이런 행동을 본 몇몇 사람들이 분개하면서 “왜 향유를 이렇게 낭비하는가?” 하고 했으며, 마태복음에 따르면 제자들이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런 반응은 초기 기독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가장 늦게 기록된 요한복음은 이렇게 불만을 토로한 사람을 가리옷 유다로 지칭합니다. 더구나 요한복음 기자는 개인적인 코멘트를 답니다.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게 좋다고 투덜거리는 유다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돈에 욕심이 난 것이라고 말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초기 기독교 안에서 논란이 된 이 문제를 이런 방식으로 해결했습니다. 구제와 향유사건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말입니다.
실제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은 초기 기독교에서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과부와 고아를 돕는 일은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못지않을 정도로 중요했습니다. 지난 기독교 역사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을 교회가 감당해야 할 본질적인 사명으로 인식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서로 돕는 일을 신앙의 차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번에 북한 쌀 보내기 운동에 함께 참여했는데, 이것은 단순히 동정심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에 속합니다. 앞으로 한국교회는 재정을 내부가 아니라 외부로 과감하게 돌려야 합니다.
예수의 장례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에 매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목숨을 걸지는 않았습니다.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신앙의 차원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예수님이 일주일 후에 십자가 처형을 당한다는 뜻이겠지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일은 한 번밖에 없지만 가난한 사람을 돕는 계속된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유일회적인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겠지요.
조금 더 근본적으로 생각하면 이 문제는 신앙과 휴머니즘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은 휴머니즘입니다. 각박한 세상살이에서 기독교가 휴머니즘을 발휘한다면 아마 세상이 교회를 새롭게 볼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독교 역사는 이런 부분을 중요하게 실천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휴머니즘과는 다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신앙은 휴머니즘을 당연히 포함하고 있지만 휴머니즘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다. 이게 바로 기독교가 이 세상의 휴머니즘과 대립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기독교 내부에서 벌어지는 신앙과 윤리의 긴장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 문제를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 봅시다.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휴머니즘으로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개량해서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중대형 교회들이 복지회관을 짓거나 그런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계획하고 진행하지만 그것은 교회의 업무 중에서 본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 노력으로 우리는 조금 더 잘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는 몰라도 근본적이고 질적인 변화를 이루어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가난하던 70,80년대보다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오늘이 더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노력으로는 그런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모든 중심을 놓습니다. 왜냐하면 인간과 세상의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면 우리는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이 세상에 당신의 뜻을 이루고 계십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이 무의미하다는 게 결코 아닙니다. 그런 일들은 우리가 끊임없이 실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만으로 인간과 사회가 구원받으리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풍요로워져도, 모든 가정이 연봉 1억 원을 받는다고 해도 우리의 형편이 조금 나아지고 조금 편리할 뿐이지 참된 기쁨과 평화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자유, 기쁨, 평화, 그리고 궁극적으로 사랑은 이런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런 점에서 마리아가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몸에 부은 것은 자신의 전체 존재를 주님에게 맡긴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낭비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녀의 행동은 궁극적인 사랑의 경험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얄팍한 휴머니즘의 가면을 쓰고 마리아의 향유 사건을 매도한 유다를 향해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 일에 참견하지 마라.” 이 말씀은 곧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 사건만이, 즉 그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참된 구원의 실체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마리아처럼 우리도 우리의 전체 존재를 예수님에게 맡긴 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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