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가 멎는 날
요단강을 건넌 후
오늘 본문의 역사적 배경은 요단강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넌 직후입니다. 요단강 이전과 이후는 전혀 다른 상황입니다. 우리가 장례식 때 자주 부르는 찬송가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가 바로 이 대목을 가리킵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빠져나와서 광야에서 40년 동안 유목생활을 하다가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사건은 마치 홍해를 건넌 것과 비슷합니다. 홍해 사건은 이집트로부터의 완전한 탈출을 의미한다면, 요단강은 광야로부터의 완전한 탈출을 의미합니다. 홍해는 모세의 지팡이가 물을 칠 때 갈라졌으며, 요단강은 언약궤를 멘 사람들의 발이 물이 닿자 갈라졌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는 광야가 놓여 있었다면, 요단강을 건넌 그들에게는 가나안이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이집트 시대로부터 홍해를 거쳐서 광야 시대로 돌입했고, 요단강을 거쳐 가나안 시대로 돌입했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수아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여호수아 5:2절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나올 때 군인 연령층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고, 광야에서는 할례를 베풀지 못했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군인 연령층이라고 한다면 대략 18세 이상을 가리키겠지요. 요단강을 건너 길갈에 집결한 이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면 모두 대략 50살 아래입니다. 그들은 이집트 정신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순전히 광야에서 새로운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입니다. 이집트 정신으로는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의 역사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역사관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한민족의 새로운 시대에 들어갈 수 없겠지요. 냉전의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는 사람은 남북평화와 세계평화의 시대를 끌어갈 수 없겠지요. 가부장적 질서에 묶여 있는 사람들은 남녀평등과 상호적 질서를 받아들일 수 없겠지요.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로운 정신으로 앞으로 열어가야 할 가나안 시대를 준비했습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발을 디뎠다는 것은 아주 시급한 상황에 직면했다는 의미입니다. 광야는 딱히 주인이 없는 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입신고를 하지 않아도 아무데나 텐트를 치고 살면 됐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이미 주인이 버티고 선 땅입니다. 주인이 땅을 나눠주지 않는다면 싸워서 빼앗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시각으로 본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강도떼와 비슷합니다. 4백 년 동안 이집트에서 살다가 이제 와서 가나안 땅을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약속으로 준 땅이라고 우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3천 년 전이라는 고대사회를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의미의 국가는 없었습니다. 국경도 없었습니다. 씨족과 부족들이 서로 더불어서 경쟁하면서 살았습니다. 가나안에도 그런 부족들이 많았습니다. 이제 그 싸움판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끼어든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여리고와 아이 성을 공격해야만 했습니다. 만약 성공하면 가나안에서 한 자리를 마련할 수 있겠지만, 실패하는 날이면 그들은 완전히 끝장입니다. 그들은 지금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올라선 것과 같은 상황에 처했습니다.
누룩 안 든 빵
이런 위기의 순간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무언가 결연한 의지를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성서기자는 약간 맥 빠지게 하는 이야기를 전달합니다. 본문의 10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갈에 진을 쳤다. 그리고 그 달 십사일 저녁때에 예리고 평야에서 과월절을 지켰다.” 이 긴박한 시기에 왜 과월절을 지켰을까요? 도대체 과월절이 무엇입니까?
과월절, 혹은 유월절이라고 불리는 이 절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엑서더스와 연관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광야로 나가서 야훼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겠다는 모세의 요청을 거절하던 파라오에게 하나님이 열 번째의 마지막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이집트를 휩쓸면서 모든 가정의 장자와 집짐승의 맏배를 죽입니다. 그러나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에는 이런 재앙이 지나갔습니다. 지나갔다(pass over)는 뜻으로 유월절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본적인 신앙은 바로 죽음이 “지나갔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도 역시 죽음이 지나갔다는 의미이고, 요단강 사건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달력으로 첫 달인 니산월 십사일 저녁때 유월절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니산월을 오늘의 태양력으로 바꾸면 3-4월입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절기로 본다면 정월 대보름입니다. 오늘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그들은 정처 없이 떠돌던 광야 40년 생활을 겨우 버텨냈습니다. 함께 이집트를 탈출했던 어른들은 모두 세상을 떴습니다. 앞으로 가나안에서 어떻게 터를 잡고 사는가 하는 문제로 여전히 마음이 불안합니다. 정월 대보름의 달빛을 받으며 그들은 40전 전 엑서더스 사건을 기억하면서 유월절 의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무엇에 사로잡혔을지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보름달은 밤을 가장 환히 밝혀줍니다. 교교한 달빛 아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죽음과 같은 상황에서도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주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수 있었겠지요.
유월절의 유래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출애굽기 12장에 따르면 이집트를 떠나기 전날 밤 이들은 불에 구운 양고기와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먹었습니다. 이런 전통에 따라서 오늘 본문의 유월절 의식에서도 이들은 누룩 안 든 떡과 볶은 곡식을 먹었습니다. 이들이 유월절 다음날 이것을 먹었다는 본문의 설명은 약간 이상해보입니다. 이런 설명은 누룩 안 든 빵을 먹은 것이 유월절 의식과 관계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관계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오랜 역사 과정을 통해서 전승된 것이고, 여러 번에 걸쳐서 개작된 것이기 때문에 그 표현이 아주 포괄적입니다. 이 말은 곧 이런 진술에 유월절 의식과 추수감사 축제 사건이 서로 복합적으로 연루되었다는 뜻입니다. 모든 나라의 절기가 그렇듯이 이스라엘의 유월절도 기본적으로는 엑서더스라는 정치, 종교적 사건이지만 가나안의 농경문화와 깊숙이 연결됩니다. 그런 복합적인 역사배경이 11절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어쨌든지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맞은 니산월 십사일에 첫 유월절을 지켰으며, 그들이 누룩 안 든 빵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누룩 없는 빵은 우리의 꽁보리밥이나 개떡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 때마다 이것을 먹습니다. 그 빵은 가장 질이 나쁜 먹을거리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최고의 먹을거리이기도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최악이지만 실제로는 최고입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어떻게 최저가 최고일까요? 그게 바로 성서가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가장 중요한 신앙입니다. 그게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영성이기도 합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생활을 끝내고 광야로 들어서야 할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이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때 그들이 누룩 없는 빵을 먹었다는 것은 생명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들은 이제 광야로 들어서야 합니다. 더 이상 먹을 게 정기적으로 공급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최소한으로 먹고 사는 법을 배워야하겠지요. 그게 바로 누룩 없는 빵입니다.
구약성서 이야기를 조금 알고 있는 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누룩 없는 빵이 아니라 만나를 먹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만나는 달착지근한 맛을 가진 꽃씨입니다. 그들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매일 아침 만나가 광야에 떨어졌습니다. 성서가 그렇게 기록하고 있지만 그들이 반드시 만나만 먹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들은 아마 야생에서 나는 모든 것을 먹었을 겁니다. 행상꾼들을 만나면 이집트에서 갖고 나온 돈이나 패물을 주고 먹을거리를 사먹기도 했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임시조치에 불과했습니다. 늘 먹을거리가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이 먹은 만나는 누룩 없는 빵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먹을거리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채워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만나와 누룩 없는 빵은 생명을 보장하는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긷든 빵! 이것보다 더 풍요로운 식탁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식탁을 모두 상실한 채 살아갑니다. 지금처럼 자신의 소유와 자신의 업적에 매달려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결코 가장 낮은 것, 가장 작은 것, 가장 어려운 형편에서도 존재론적으로 최고인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누룩 넣지 않은 빵이 바로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겠지요. 생명, 생존의 차원에서는 가장 먹기 불편한 이런 빵이 최고의 먹을거리라는 영적이고 실제적인 차원을 알아야겠지요. 그게 신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신앙교육을 위해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매년 유월절 때마다 그들은 누룩 없는 빵을 씹으며 고된 세월에서 자신들의 생존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했습니다.
유월절 식탁과 성만찬
예수님도 유월절 의식을 지키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나누신 마지막 만찬이 곧 유월절 식사였습니다. 예수님은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그것을 자신의 몸과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의식이 오늘 우리에게는 성만찬입니다. 이스라엘의 유월절 의식은 예수님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에게, 그리고 우리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지나갔다.”는 유월절의 의미는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똑같습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통해서 우리에게 죽음이 지나갔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죽는 건 분명하지만 다른 생명으로 우리는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음이 “지나갔습니다.” 유월절이 죽음으로부터 건짐 받은 것에 대한 의식인 것처럼 성만찬도 역시 그렇습니다. 유월절이 죽음과 삶의 경계에 직면하는 의식인 것처럼 성만찬도 역시 예수님의 사건을 통한 죽음과 삶에 직면하는 의식입니다.
여러분,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게 무슨 뜻인지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성만찬의 빵이 예수님의 살이라고 한다면 빵이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누룩 없는 빵, 꽁보리밥, 개떡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빵이라는 물질 자체가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밥이 곧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은총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그 은총이 임하는 빵이 곧 하나님의 존재론이기도 합니다. 성만찬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의식입니다. 그렇습니다. 빵을 먹는다는 건 곧 하나님을 먹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의 설명이 이상하게 들리시는 분들을 위해서 물리학적인 예를 하나 들어야겠군요. 우리가 먹는 밥이 어디서 왔습니까? 태양 빛과 탄소와 물이 물리 작용을 일으켜 벼가 자라고 쌀이 생겼습니다. 그 쌀은 다시 물과 결합하고 열을 받아서 밥이 됩니다. 이런 차원에서 본다면 우리가 밥을 먹는다는 것은 곧 태양을 먹는다는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생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의 종교적인 상징이 곧 유월절과 성만찬 식탁입니다.
가나안 땅의 소출
유월절 의식을 설명하는 오늘 본문에서 강조되고 있는 단어는 “먹었다.”입니다. 11,12절에서 반복해서 나옵니다. 특히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은 게 중요합니다. 그게 바로 성서기자의 주된 관심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게 되자 만나는 그쳤습니다. 만나는 일종의 ‘패스트후드’와 같습니다. 그것은 임시방편의 음식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생존의 차원에서 하나님의 엄청난 은총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소출 앞에서 그것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광야의 만나를 먹고 사는 중입니다. 언젠가 만나는 멎습니다. 영원한 양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나가 멎는 날, 영원한 양식의 실체가 공개될 것입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대신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그 영원한 양식을 미리 당겨서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참된 양식이고 음료입니다. 이런 영적인 맛을 아는 사람은 광야의 만나를 먹으면서도 이미 참된 생명의 양식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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