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 이후
수 5:10-12
본문 이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일견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 보입니다. 그럴듯한 무용담이나 기적적인 사건의 진술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상 모습에 대한 짤막한 묘사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어쩌면 여호수아서를 기록한 저자는 단지 이 본문의 앞 대목과 뒤 대목을 연결시키기 위해서 이런 별로 주목받을 게 없는 이 내용을 기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앞 대목 5:2-9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 받는 이야기입니다. 원래 출애굽 당시의 남자들은 모두 할례를 받았지만 광야에서 모두 죽었으며, 이제 광야 40년 생활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아직 할례를 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광야에서는 늘 전쟁을 준비해야하고, 또한 위생적으로 적합하지 못했기 할례를 행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지루했던 광야생활을 끝내고 요단강을 건너 비교적 안정적인 가나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우선 할례를 행했습니다.
본문의 뒤 대목인 6장부터는 본격적으로 가나안 부족들과의 전투가 시작됩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정복해야만 했습니다. 이 전투를 앞두고 여호수와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만나게 됩니다.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이어서 13-15절에 나옵니다. 15절 말씀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야 할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했을 때 들었던 말씀과 흡사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바로에게서 해방시킨 사건이 첫 출애굽이라고 한다면 이제 가나안과의 전투를 통해서 그 땅을 차지하는 일이 제 2의 출애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땅이 거룩하다는 사실을 알리셨고, 이제 여호수아에게도 그 땅의 거룩함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각인시켜주었습니다.
이렇듯 오늘 본문은 이렇게 이스라엘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건 사이에 흡사 ‘샌드위치’처럼 끼어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스쳐지나갈 수 있는 말씀이지만 이 본문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것을 주목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이 겨우 3절밖에 되지 않지만 여기에는 좀 복잡한 전승의 과정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10절에 거명되고 있는 ‘길갈’이라는 지명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위한 구약성서의 번역인 70인 역에는 없습니다. 곧 이서서 ‘여리고 평지’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렇게 중복해서 지명을 거론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70인 역에서 생략된 것 같습니다.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소산을 먹었는데, 그것이 무교병과 볶은 곡식이라고 합니다. 길갈 지역의 특산물이 볶은 곡식이라는 뜻인데, 무교병은 곧 유월절 축제를 의미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전승들이 이 문장에 혼합된 것 같습니다.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 만나가 그쳤으며,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다고 합니다. 이런 문장을 보면 어떤 사람이 정확하게 정리해서 표현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아마 유월절 전승과 가나안 곡식을 먹었다는 사건과 만나가 끝났다는 일련의 사건들이 약간 거칠게 오늘의 본문으로 들어온 것 같습니다. 비록 어수선하게 진술되어 있지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게 포착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 가나안 소출, 만나가 그것입니다.
유월절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갈이라는 곳에서 최초로 유월절 축제를 지킵니다. 이 유월절은 그들이 거의 노예처럼 살던 이집트를 떠나기 전날 밤부터 새벽까지 벌어졌던 특별한 사건에 연유하고 있습니다.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사건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건이었습니다. 마음이 완고한 바로를 제압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죽음의 천사를 이집트 전역에 보냅니다. 모든 집의 장자와 모든 짐승의 맏배는 이 죽음의 천사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이집트에 있었지만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유월절(파사)은 말 그대로 죽음의 천사가 자기들을 그냥 ‘지나갔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건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어떤 경험을 하게 했을는지 우리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14,15세기 때 흑사병이 돌아 유럽 사람의 3분의1이 죽었다고 하는데, 그런 유행병이 한 차례 지나간 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느꼈을 그런 경험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을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드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사건 사건을 간직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맞을 때마다 최선으로 준비했습니다. 가족끼리 유월절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양을 잡고,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죽음의 천사를 비껴가게 하시고, 광야에서 돌보아주신 야훼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들이 생존할 수 사실 확인하는 방식으로 험한 세월을 버티고 살아왔습니다.
지금 이들이 터를 잡은 길갈도 오랫동안 머물 수 없는 자리이기는 했지만 광야가 아니라 가나안이라는 사실이 그들에게 중요했습니다. 광야에서는 유목민 생활을 해야만 했지만 가나안에서는 이제 농사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자기 땅이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일정한 곳에 정착해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삶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이제 가나안에서 첫 유월절 축제를 벌였습니다. 새로운 희망이 넘쳐나는 축제였습니다. 한 순간 순간이 생존의 위기였던 광야로부터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된 삶으로 올라선 것입니다. 그들은 생존의 터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가나안 먹을거리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 축제를 벌이면서 가나안 농작물을 먹었다고 기록합니다. 11절과 12절에 각각 두 번이나 언급하는 걸 보면 이 사건이 꽤나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그랬겠지요. 광야에서 유목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가나안이 실제로 기름진 땅이었다는 게 아니라 그 인근의 척박한 땅에 비해서 그렇다는 뜻입니다. 어쨌든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농작물을 먹을 수 있었다는 이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넘치지 않을 만큼 그들에게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6.25 전쟁 이후의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서 생존의 위기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살게 된 지금과 비교할 수 있을 겁니다.
인간에게는 먹을거리가 늘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도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입니다. 간혹 생존에 필요한 먹을거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몇몇 나라를 보면서 우리 자식들, 우리 후손들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게 오늘 우리의 책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너무 부자인 나라에서는 다이어트를 한다고 야단이고 너무 가난한 나라에게서는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투쟁하고 있다는 이런 우리의 현실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의 경제 형편이 어렵다고 아우성을 치지만 조금만 정직하게 돌아보면 우리는 그래도 넉넉하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대만큼 채워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이지 성실하게 노력만 한다면 누구나 그럭저럭 먹고 살 수는 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우리도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더 이상 광야와 같은 생존의 위기는 겪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만나
오늘 본문은 매우 재미있는 현상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의 농작물을 먹게 되자 만나가 그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거꾸로 만나가 그치게 되니까 가나안의 농작물을 먹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 두 가지 현상은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광야와 가나안, 그리고 만나와 가나안의 먹을거리는 대립적인 삶의 형태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위기를 버텨내게 해준 하나님의 양식이었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 만나는 꽃씨와 비슷한 것인데, 이미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았던 모세는 이 만나가 있는 곳을 잘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고 합니다. 좋은 지도자 덕분에 만나를 찾아서 먹을 수 있었다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축복이니까 만나를 하나님이 주신 양식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 만나에 대한 경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만나 전승에 의하면 만나는 매일 아침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진 앞에 내렸다고 합니다. 아침마다 그것을 거두어들여 하루의 양식을 삼았습니다. 만나를 거두어들이는데 원칙이 있었습니다. 자기 식구들이 하루 먹을 만큼만 모아들여야지 공연히 욕심을 내거나 다음 날을 걱정하다가 이틀 치를 가지고 오면 그 다음날 모든 만나가 상해버렸다고 합니다.
길갈에 자리를 잡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제 만나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게 잘된 일일까요, 아닐까요? 아마 만나는 별로 맛이 없는 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죽지 않기 위해서 먹을 뿐이지 영양분이나 맛에서 별로 기대할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조상들 중에서 가난하던 사람들이 보릿고개를 견디기 위해서 먹었던 초근목피와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만나에 비해서 가나안의 먹을거리는 전혀 달랐습니다. 온갖 종류의 곡식과 과일을 먹을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나의 시대가 끝났다는 사실은 정말 즐거워해야 할 사건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만나 이후
풍요라는 것은 만족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인 동시에 생명의 본질을 상실할 수 있는 위기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로 광야시절보다 훨씬 신앙적으로 살았다는 증거가 없는 걸 보면 만나 이후의 시대가 그렇게 바람직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농경신인 바알을 곧잘 따라갔습니다. 모세가 죽기 전에 그렇게 경고했는데도 불구하고 광야의 촌놈들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문명인들이었던 가나안의 풍습을 따라가기에 바빴습니다.
여기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만나 시대와 만나 이후의 시대가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만나가 의미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생존에 집중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만나가 없으면 당장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니까 당연히 매 순간마다 진지하고 절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월절 사건과 마찬가지로 만나도 곧 생존의 경계를 뜻합니다. 생존의 경계에 처한 사람들의 태도는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한쪽은 생존에 급급해서 비굴해지며, 다른 한쪽은 생존의 위기에서 거룩한 삶을 경험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행히 광야의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을 절실하게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생존의 위기가 그들을 두렵게 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광야에서 선포되었다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들에게 만나의 거룩한 시대가 끝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만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만나 이후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거의 만나 이후입니다. 생존의 경계가 아니라 오히려 부와 복지를 확보하는 일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풍족하게 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 합니다.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늘 궁핍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비록 우리에게 경제적인 능력이 있어서 풍요롭게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영적으로는 늘 생존의 경계선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계선에서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깊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가 전제되지 않는 부와 복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 이후 시대에 추구하던 가나안의 바알과 똑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 이후를 살지만 영적으로는 만나 이전에서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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