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삶의 일치로 인한 복
약 1:17-27, 창조절 첫째 주일, 2018년 9월2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18.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19.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1.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22.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3.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25.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26.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성경 말씀을 얼마나 충실하게 따르면서 살고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으면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대답이 서로 다를 겁니다. 어떤 이는 말씀이 자신의 인생을 끌어간다고 생각할 수 있고, 다른 이는 말씀이 자신의 삶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잘 모르겠다, 평소에 이런 걸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을 겁니다. 성경과 기독교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알기 힘들고, 안다고 해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것과 전혀 다르게 작동되기 때문입니다.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말씀과 삶이 이원론적으로 분리된 상태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살아도 겉으로만 보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영적으로는 위기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에서 혼란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의 혼란은 인격의 혼란을 야기하고, 인격의 혼란은 삶의 분열을 불러일으킵니다. 말씀과 삶의 분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제2 독서로 읽은 야고보서의 상황도 이와 같았습니다.
22절: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22절에는 말씀을 행하는 자와 행하지 않고 듣기만 하는 자가 나옵니다. ‘말씀’은 헬라어 로고스의 번역입니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만 머무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일종의 종교적인 지식이고 교양입니다. 그런 지식과 교양도 나름으로 우리에게 흥미를 유발합니다. 예배도 마차가지입니다. 습관적으로만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말씀을 듣는 것이지 말씀을 삶의 내용으로 삼는 게 아닙니다.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면서도 여기에 상응하는 삶의 내용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세상을 변혁시킬 능력도 없고 생각도 없습니다.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합니다. 모든 관심은 오직 교회 조직에만 집중됩니다.
요즘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에 큰 이슈로 부각된 명성교회 담임 목사 부자 세습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명성교회는 자신이 속한 예장 통합의 헌법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동을 했습니다. 다른 교회와 사회로부터 비판을 받아도 옳은 일이라면 밀고 나가야겠지만 이 문제는 예장 통합의 대표 신학대학교인 장로회신학대학교 대다수 교수들이 반대 성명을 낼 정도로 옳고 그름이 명백한 사건입니다. 명성교회는 김삼환 목사가 2년 전에 은퇴했기에 ‘은퇴하는 목사는 ... 할 수 없다.’는 헌법 조문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말장난입니다. 9월 초에 열리는 총회에서 결정될 겁니다. 시간이 문제이지 결국에는 부자 세습을 철회하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사건들이 벌어진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기만 할 뿐이지 그 말씀에 해당되는 삶의 내용을 무시하는, 즉 말씀과 삶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하는 신앙형태에 의한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말씀을 실천하지 않고 듣기만 하는 사람을 가리켜 야고보는 ‘자신을 속이는 자’라고 진단합니다. 예컨대 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악은 소리를 통해서 기쁨과 희열과 안식이라는 생명의 절정을 경험하는 예술 행위입니다. 음악가들은 자신들의 그런 경험을 실제 삶에서 실천합니다. 삶을 기쁨과 희열과 안식으로 대합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삶의 기쁨과 희열과 안식을 느낄 수 있도록 대합니다. 만약 그런 삶의 내용이 그에게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음악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며 결국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내용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자기를 속이면 결국 삶이 파괴됩니다. 삶의 중심이 산만해서 내적인 확실성을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물신숭배에 떨어진 현대인들의 영혼이 건강할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1년 사이에 서울 어느 지역의 아파트 값이 1억 이상 올랐다는 소문에 마음이 뒤숭숭해질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의 삶을 어찌 건강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바로 자신을 속이는 자의 운명입니다.
23,24절: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야고보 선생은 말씀과 삶이 분리된 사람들의 문제점을 23-24절에서 좀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23절은 당시의 속담을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이 없는 사람은 자기의 얼굴을 거울로 보는 사람과 같다고 했습니다. 당시의 거울은 청동의 한 면을 갈고 닦아서 만든 것이기에 얼굴의 세밀한 부분은 반사시키지 못합니다. 그런 거울에 자기 얼굴을 한번 비쳐본다고 해서 얼굴 모습이 선명하게 각인되는 게 아닙니다. 더구나 이 사람은 다른 일로 마음이 쫓기기에 거울로 본 자기 얼굴을 금세 잊어버립니다. 여기서 얼굴은 말씀을 가리킵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잠시 그 말을 기억하지만 세상에 나가서는 아무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현대 기독교인들의 삶도 야고보 시대의 삶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말씀과 예배가 일상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기독교 신앙과 삶이 분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지만 그게 실제 삶으로 녹아들지 않습니다. 예배와 말씀의 기쁨이, 즉 하나님 경험이 일상에서 유지되지 않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일상에서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도 딴 세상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저는 말씀과 삶의 (불)일치가 우리의 삶에서 해결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극단적으로 다음의 두 경우가 해결책이긴 합니다. 하나는 세속의 삶을 포기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수도원에서는 세속의 가치가 끼어들지 않기에 말씀과 삶의 일치가 가능합니다. 이건 우리에게 현실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다른 하나는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겁니다. 5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거나 이혼을 하거나 자녀들이 큰 어려움에 처하면 정신이 번쩍 들면서 말씀과 삶의 본질에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마 5:1절 이하에 나오는 팔복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거기서 복이 있는 사람은 어려움에 떨어진 이들입니다.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의 숫자는 얼마 안 되기도 하고, 우리가 모두 그런 운명을 극단적으로 기피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것도 해결책은 못됩니다. 죽을 때까지 대충 말씀을 듣고 곧 잊어버리는 패턴을 반복하게 될 겁니다. 이런 방식으로 살아도 충분히 행복하다면 큰 문제는 없습니다. 저는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야고보가 지적한 것처럼 자기를 속이는 것이니 어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행복한 것처럼 자기를 합리화하는 겁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게 문제 해결의 최선입니다. 세례의 핵심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다고 여깁니다.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을 미리 당겨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유와 업적을 이미 나의 것이 아닌 것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예수에게 발생한 부활 생명을 약속으로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 삶에서 궁극적인 리얼리티로 경험하는 사람이라면 말씀과 예배를 건성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걸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 말씀과 예배가 자신의 삶에서 실현되는 일에 전력투구합니다. 여기에 동의하십니까? 이런 삶의 태도가 단번에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이런 노력 자체를 포기합니다. 세상에서 주어진 삶의 노하우에 치우칩니다. 단번에 이런 신앙의 단계에 오를 수는 없다 하더라도 방향만 분명하다면 신앙의 연륜과 더불어서 말씀과 삶의 일치가 점점 더 명료하게 확인될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의 인격은 내적인 통일성을 이루게 됩니다. 그의 영혼이 풍요롭고 건강해집니다. 이게 신앙인들의 삶입니다.
25절: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야고보 선생은 25절에서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실천하는 사람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과 삶이 일치를 이룬 사람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말씀이 율법이라는 단어로 대체되었습니다. 말씀은 헬라어 로고스이고, 율법은 헬라어 노모스입니다. 로고스는 노모스보다 큰 개념입니다. 로고스인 하나님 말씀 안에 노모스인 율법이 들어있습니다. 야고보는 여기서 이 두 단어를 구분하지 않고 비슷한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율법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복음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면 안 됩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율법은 복음을 포함합니다. 이 구절에서 율법에 대한 정의가 흥미롭습니다. KJV은 perfect law of liberty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율법이 한편으로는 자유이고, 다른 한편으로 완전하다는 겁니다. 자유인 이유는 이를 통해서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기 때문이며, 완전한 이유는 율법이 자유만이 아니라 구속을 통해서 구원을 완성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설명이 실질적인 것으로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어야겠습니다. 여기 중학생이 있습니다. 그 학생은 몇 가지 규칙을 지켜야합니다. 학교에 가는 것, 집안 청소를 하는 것, 동생을 돌보는 것 등등입니다. 동생을 돌보는 일만 생각해봅시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기에 학교를 다녀온 뒤에 동생을 돌봐주어야 합니다. 이 학생에게 동생을 돌보면서 가족의 사랑을 경험하게 합니다. 동생을 돌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이 학생은 그 사랑을 더 깊이 경험합니다. 피씨방이나 공원에 놀러나가자는 친구들의 요청을 따를 수 없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학생의 마음은 더 풍요로워집니다. 동생과의 관계가 돈독해질 뿐만 아니라 맞벌이 부모님과의 관계도 더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자유이고 완전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씀 안으로 점점 깊이 빠져들어 갑니다. 자유의 법을 주의 깊게 살피고 부단히 그런 태도를 붙듭니다. 구도적으로 자유의 법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유의 법을 잊지 못합니다. 그 법이 자신의 삶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바이올린 연주가가 매일 바이올린 곡을 연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자유로워지고 완전해진다는 사실을 점점 더 깊이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이처럼 자유의 법을 추구하는 사람이야말로 그 실천을 통해서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여기서 복을 받는다는 헬라어 마카리오스는 팔복에 나오는 단어와 같습니다. 세상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가리킵니다. 지금 당장 부자가 된다거나 유명해진다거나 출세를 한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삶의 단일성이 확보되는 복이 그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예로 든 동생 돌보는 중학생을 생각해보십시오. 이 학생은 동생을 돌보는 일로 인해서 공부를 더 잘하게 된다거나 친구들에게 인기를 얻게 되는 건 아닙니다. 부모와 관계, 동생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내면이 분열되지 않고 통일됩니다. 하나님의 법을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일치된다는 사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복을 받지 못해도 그는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생명 충만감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마카리오스입니다.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르는 개신교회 교인들이 종교개혁 정신을 오해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믿음으로만!’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구호입니다. 루터는 믿음과 행위를 동시에 강조하는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주장을 반대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 데에는 오직 믿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구호에 따라서 기독교 신앙에서 행위는, 즉 실천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믿음의 존재론적 능력을 상대화한 로마가톨릭교회의 주장을 거부한 것이지 행위 자체를 부정한 게 아닙니다. 옳은 믿음에는 반드시 옳은 행위가 따릅니다. 하나님에게 점수를 얻기 위해서 옳은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저절로 거기에 상응하는 행위를 하게 됩니다. 상응하는 행위가 없다면 하나님과의 일치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에 관해서 예수님은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마 5:19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여기서 계명은 야고보가 강조한 자유의 율법입니다. 마 7:21절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기라.” 이 말씀은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비유 다음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뜻을 단지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행하는 것’ 필수적이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마 7:26,27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정확하게 뚫어본 준엄한 말씀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비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한국교회는 지금 무너지는 중이 아닐까요? 우리 개별 기독교인들의 삶도 평소에는 그럭저럭 유지되지만 비바람이 몰아치면 그 중심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건 아닐까요?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려고 해도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우리의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줄 수는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행동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실제로 그런 수준의 삶을 사람들에게 요구한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대구샘터교회는 지난 세 주간에 걸쳐서 제주도 예민 난민들을 위한 모금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교회 밖의 사람이 기부한 돈을 포함해서 1,480,000원을 모금했습니다. 큰 금액은 아니지만 이런 실천도 말씀과 삶의 일치에서 나오는 겁니다. 단순히 구제와 선교만이 야고보 선생이 말하는 실천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교우들 사이에서 말씀이 어떻게 실천되어야하는지, 직장과 가정에서 어떻게 실천되어야하는지를 여러분은 늘 진지하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해야합니다. 말씀과 삶의 일치를 구도적으로 추구하는 이들은 그 어느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마카리오스, 즉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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