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7.6. (사 55:6-13)
구약의 예언자들은 요즘의 시인과 비슷합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는 그들이 역사를 볼 줄 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들이 언어에 생명의 힘을 불어넣을 줄 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11절만 보더라도 한편의 시와 같습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 하늘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며 씨 뿌린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내주듯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이사야의 이 시는 설명이 따로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그 메시지가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비와 눈을 하늘로 돌려보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땅의 생명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처럼 이 땅에서 아주 분명하게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다는 이사야의 이런 주장이 과연 옳을까요? 기독교 신앙을 진실하게 대하는 분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옳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렇지만 이 질문은 그렇게 믿는다는 말 한 마디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사야의 이 예언은 역사에서 그대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의 딜레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이사야의 예언을 믿지만, 동시에 이 현실의 역사에서 그것이 성취되지 않았다는 사실 앞에 직면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칫하면 우리는 양 극단으로 치우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현실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문자의 차원에서 옳다고 믿든지, 아니면 현실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멀찍이 밀어놓을 수도 있습니다. 이 양 극단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비슷합니다. 양쪽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믿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믿습니다.” 하니까 믿음이 좋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말씀의 깊이를 모두 놓치고 맙니다. 이런 태도는 경솔한 것입니다. 조금 복잡하게 설명 드렸는데, 이사야의 예언인 오늘 본문을 직접 설명하는 것이 이런 사태를 이해하는데 더 나을 것 같습니다.
환성과 손뼉
이사야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 있던 유대인들이 이제 조국의 해방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리라고 예언합니다. 굉장히 아름다운 언어로 묘사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너희는 기뻐 뛰며 길을 떠나 안내를 받으며 탈 없이 돌아가리라. 너희를 맞아 산과 언덕들은 환성을 터뜨리고 들의 나무가 모두 손뼉을 치리라. 가시나무 섰던 자리에 전나무가 돋나나고 쐐기풀이 있던 자리에 소귀나무가 올라오리라. 이런 일이 야훼의 이름을 드날리고 영원히 사라지 않는 표가 되리라.”(사 55:12,13)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이사야는 바벨론 포로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예언자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사람은 제2 이사야라고 합니다. 그는 유대의 역사를 지난 역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150년 전에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멸망당한 뒤 남유대도 역시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고대 제국들이 주변의 작은 나라를 어떻게 통치했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이 한민족이 일체 치하에서 어떤 고난을 당했는지를 생각하면 답이 나옵니다.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고 학교의 수업도 완전히 일본어로만 진행되었습니다. 하기야 요즘에는 대한민국이 자주 국가인데도 영어 몰입 교육을 하자거나 영어를 한글과 똑같이 공영어로 사용하자는 주장이 있을 정도이니, 식민시대에도 제국의 주장에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초토화되고 많은 지식인들이 포로로 잡혀 가고, 주민들은 바벨론의 총독에게 지배를 받았습니다. 물론 예루살렘 성전의 모든 전통도 허물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사야는 바벨론의 포로 시기가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는 이미 바벨론의 국력이 쇠퇴하고 페르시아가 새로운 제국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겠지요. 그래서 그는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아름다운 필치로 노래했던 것입니다. 선과 언덕들이 환성을 터뜨리고 나무가 손뼉을 친다고 말입니다.
이사야가 그 상황을 금의환향처럼 묘사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포로들이 돌아가는 길은 고난의 행군과 같았습니다. 힘들게 예루살렘에 이르렀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너진 성전, 피폐해진 경제, 척박한 인심, 지쳐버린 민중이었습니다. 제사장도 없고, 제사도 없고, 율법도 없고, 랍비도 없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단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했다는 단 하나의 사실만 분명하게 일어났고, 나머지는 모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복구하고 율법을 갱신하며, 세제를 개혁하는 등, 새로운 유대인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서 많은 수고를 기울였지만, 그런 모든 것들도 결국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정직하게 본다면 이사야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흔적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렇게 국가나 세계의 역사라는 거시 차원만이 아니라 개개인의 삶도 큰 차이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질문해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그대로 성취되던가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소위 ‘삼박자’ 축복이라는 말이 가리키듯이 영혼이 잘되고, 몸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던가요?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잘살게 된다고 말이지요. 미국이 저렇게 잘살게 된 것도 그들이 하나님을 잘 믿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합니다. 거꾸로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가난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도 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의 비율이 우리에 비해서 턱없이 낮고, 오히려 우상숭배에 기울어진 일본이 잘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질적으로 잘살고 못살고는 믿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그런 방식으로 노력하거나 또는 운이 닿을 때 가능합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건강도 신앙과는 별로 깊은 연관이 없습니다. 바울은 평생 지병을 안고 살았습니다. 병이 낫기를 위해서 한두 번 기도했지만, 거기에 매달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울의 신앙에서 우리는 그걸 배워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운동도 하고 적당한 의료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그것에 목매고 살 필요는 없습니다. 좋은 직장을 얻고, 물질적인 여유를 위해서 성실하게 노력해야겠지만, 거기에 올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우리 삶에서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많은 기독교 집회에서 물질적인 축복과 몸의 건강이 핵심 주제로 등장한다는 것은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증거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분명하게 인식하하고 인정해야합니다. 우리의 삶이 늘 환호성과 박수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득한 하나님의 생각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다는 이사야의 예언은 잘못일까요? 아닙니다. 이사야는 없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단순히 자기의 생각을 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이사야가 아니라 이사야의 예언을 읽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우리가 선입견에, 고정관념에 묶인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앞에서 말씀드린 성공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한 관점으로만 성공을 생각합니다. 이름을 날리고 돈을 잘 버는 것을 성공의 유일한 기준으로 생각합니다. 심지어 목회도 그런 기준으로 성공과 실패를 말할 정도이니,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삶의 기준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출세와 성공만을 목표로 살아가는데, 자기 혼자만 그것과 전혀 다른 삶의 기준으로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라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만은 무언가 다른 삶의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억지로 다르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실제로 믿는 사람은 당연히 다른 차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이 하나님에게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성취된다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사야의 영적인 깊이를 알아야만 이사야의 이 예언이 왜 옳은지 알 수 있습니다. 그 깊이를 우리는 8,9절의 진술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 나의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다는 말씀에 실감이 드나요?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부분적인지는 알만한 분들은 알 겁니다. 이미 바울도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본다고 말했습니다.
인식의 문제가 신앙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니까 조금 더 설명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자이며, 완성자라는 사실은 이 세계, 우주 전체가 그분의 섭리 안에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이에 반해서 우리는 그 섭리 안에 들어 있는 작은 점과 같습니다. 여기 1만 개의 조각으로 만들어진 ‘퍼즐’이 있다고 합시다. 우리는 그중의 한 조각입니다. 한 조각은 전체 그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것은 퍼즐을 만든 사람만이 압니다. 또 다른 예를 들까요? 여기 프로 9단들이 둔 바둑 기보가 있다고 합시다. 9급에 불과한 바둑 애호가가 그걸 보았다면 그는 기보에 담긴 바둑의 길을 잘 모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이것보다 더 크게 다릅니다. 우리는 그분의 뜻을 완전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와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당에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에서 이루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 말씀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건 그가 어리석거나 아니면 교만하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당장 눈에 확실하게 드러난 것만을 현실로 이해하기 때문에 오늘 이사야가 말하는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다는 말이 가리키고 있는 하나님의 깊은 뜻과 섭리를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거꾸로, 이 역사에서 패배한 것을 변명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한다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 그렇게 오해받을 소지가 없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주술적인 차원에서 해석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도 많이 했다는 분들이 자기들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처럼 주장하기도 합니다. 조금 심한 경우에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땅을 사야 한다는 주장을 설교 시간에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면, 결국 기독교 신앙은 근본이 모두 허물어지고 맙니다.
역사의 신비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는 이사야의 선포는 이런 주술이나 비의가 아니라 역사의 신비를 가리킵니다. 그 역사의 신비에 직면한 이들이 바로 구약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긴 역사에서 일정한 시기에 활동한 이들입니다. 가장 멀리는 통일왕국 시대의 사무엘이나 나단, 그 뒤로는 분열왕국 시대의 엘리야와 엘리사, 본격적으로는 바벨론 포로기의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같은 이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언급된 세 명의 대 예언자와 열두 소 예언자들이 대표적입니다. 여기서 예언이라는 것은 미래의 일을 점쟁이처럼 알아맞히는 것이라기보다는 역사를 하나님의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든 게 잘 된다고 말할 때 위기와 심판을 말하고, 모두 절망하고 있을 때 희망을 말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선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사가 바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우리의 예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십니다. 그게 바로 역사의 신비입니다.
이 역사의 신비를 일상적인 것으로 바꿔 설명해야겠군요. 5년 전으로 돌아가 보세요. 여러분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내셨으며,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셨나요? 그때 5년 후 샘터교회에서 신앙생활하리라는 걸 예상한 분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이런 결과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도 많이 벌어진 우연한 일들의 반복에서만 가능했습니다. 단순한 에피소드처럼 보이던 것들이 모두 상호 연관해서 오늘 샘터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모르지요. 5년이 흐른 뒤에만 그것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손이 역사의 신비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믿는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떻게 보면 이런 성서의 가르침은 극한의 경쟁 구조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수능에 목숨을 걸고 있는 내 막내딸에게 역사의 신비를 생각하라고 말한다면, 속으로 아마 우리 아빠 맛이 갔군, 하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 말을 들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역사의 신비로 세상을 통치하는 하나님을 놓친다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차라리 자기 개발 능력 프로그램을 배우든지, 심리 치료나 상담을 받는 게 좋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통치에 우리의 운명을 건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하늘이 땅에서 아득한 것처럼 신비롭게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사야가 전한 예언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한 구절도 헛된 게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 성취됩니다. 여러분을 향한 그분의 뜻도 반드시 성취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여러분의 작은 생각과 판단으로 일희일비 하지 말고, 역사의 신비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에게 집중하십시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바로 그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런 신앙의 깊이를 알게 된다면 전혀 새로운 세계가 전개될 것입니다. 이사야처럼 세상 사람들이 못 보는 하나님의 구원현실을 보게 될 것이다. 거기서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참된 기쁨과 자유와 평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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