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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먹는 말씀, 먹는 기도, 먹는 찬송(겔 3: 1-3,계10: 7-11, 요 6:51-58)

2024년 11월 3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wYNdkXa19Io?si=kfsxwiExN0yzTkKR

우리나라 말에는 먹는다란 말이 유난히 많습니다. 예를 들면, “해먹는다”, “떼먹는다”, “처먹는다”, “빌어먹는다”, “얻어먹는다”, “놀고먹는다”, “써먹는다”, “맞먹는다”, “되먹지 않았다” 등등이 있습니다. 그밖에 “담배도 먹고” “돈도 먹고”, 심지어 “욕도 먹는다”고 합니다. 폭염으로 무더운 여름철에 너무 더워 정신이 없을 땐 “여름 먹는다”는 말까지도 있을 정도입니다.

온갖 가난과 굶주림으로 둘러싸여 있었던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먹는다”는 말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실존에 관한 문제였기에 우리들의 피부에 가장 와 닿았던 말이었을 것입니다. 먹지 않으면 죽으니까 “먹고 보자”, “먹고 떨어지자”, “먹고 죽자” 하는 것을 보면, 절박한 우리 민족의 배고프고 간나했던 역사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먹는다”는 말이 “글을 먹는다”, “말을 먹는다”는 말로도 사용될 때가 있습니다. 글을 먹는다는 말은 “글을 잊어먹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고, “말을 먹는다는 말”은 “말을 더듬는 사람”을 가리켜서 하는 말입니다. 이때의 “먹는다”란 말은 “자세히 음미하여 자기 것으로 섭취하지 못한 상태”를 뜻하는 약간의 부정적인 뜻이 담겨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원래는 글을 제대로 먹고 음식을 제대로 먹어, 잘 소화해서 유익한 양분이 되게 하여야 한다는 뜻이 역설적으로 담겨 있는 말인 것입니다.

특히 “음식을 먹는다”라는 것은 그것을 통째로 그냥 삼킨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을 입에 넣어 맛보고 천천히 깨물어 씹어서 뱃속에 넘겨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이빨로 씹고, 내 혀로 맛보고 꼭꼭 씹어서 분해하여 삼켜 자신의 배 속으로 전달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배속에 들어온 음식물들이 온전히 변화되어 내 피와 살이 되는 것입니다.

글도 그렇습니다. 글을 보고 읽고 들은 바를 자신의 머리에 단순히 기억한다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글이나 말이 나의 머릿속으로 들어오고, 나의 가슴 속으로 들어와 머리와 가슴으로 씹고 또 씹어 음미하고 또 음미하여 나의 실천적인 삶으로 연결되어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다음 주일에 “주의 성찬”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주의 성찬”도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먹음으로써 예수님의 삶과 그의 말씀이 나의 머릿속으로 들어오고, 나의 가슴 속으로 들어와 머리와 가슴으로 씹고 또 씹어 음미하고 또 음미하여 나의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원래 듣는 것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 넣어 씹고 씹어, 삶의 영양분을 공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먹은 말씀이 우리 삶에 이어져 은혜가 되고 감사가 되고 기쁨이 되며, 한없는 감동이 되어 이웃에게로 우리의 사회로 그리고 세계로 나가 참된 생명과 평화가 넘치는 하나님의 세계가 되는 데 사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에는 말씀을 받아 먹으라는 말씀이 종종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I

오늘의 구약의 본문 중 에스겔 3장 2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예언자 에스겔에게 한 두루마리를 주시며 “받아먹어라”고 명하시고 있는데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라고 시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언자 에스겔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다고 한 표현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말씀을 깨닫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음의 세 가지의 깊은 뜻을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받아들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 깊숙이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예배를 통해서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설교 따로 생활 따로의 “따로 따로의 신앙”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 깊이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비슷한 유사신앙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 깊이에서 받아들여야만 내 마음이 변할수 있을 것입니다. 뇌과학자의 말을 빌리면 마음으로 받아들이다란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나의 뇌가 그 말씀을 듣고 뇌가 변하면 내 마음이 바뀌고, 나의 마음이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내 생각이 바뀌면 내 습관이 바뀌고, 내 습관이 바뀌면 내 삶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먹어 그것을 씹고 또 씹어 음미하면 내 삶에 무한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다고 하는 둘째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자신의 생명을 지탱시켜 주며 우리의 삶을 굳건하게 보존해주고 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순간마다 우리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근본적인 힘은 무엇이며 우리들의 삶을 풍부하게 하는 양식이 무엇인지를 질문해오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매순간마다 우리는 흔들거리며 넘어지며 쓰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서를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 자신을 깨닫게 해주며, 우리들 자신에게 새 힘과 새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신령한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폴틸리히(Paul Tillich)라고 하는 신학자는 오늘의 세상을 향해서 오늘의 현대인들은 모두가 다 삶의 기초가 흔들거리고 있는(shaking foundation)의 삶을 살아 가지만 그것은 우리들의 “생명의 생명”, “참 생명의 기초”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들의 생명과 삶을 더욱 풍성하고 더욱 값지고 참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 말씀을 먹으면 먹을수록 우리는 더욱 든든해져서 그 어떤 시련과도 맞싸워 헤쳐 나가 승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다고 하는 세 번째의 뜻은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일으켜 세우시며 나를 이끌어 가고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힘과 능력이 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날마다 새 힘을 얻는 것은, 우리가 상상도 못 할 삶의 위기나 곤경 속에서도 엄청난 용기를 얻어 새롭고도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일으켜 세워 우리를 이끌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삶의 위로요 상담이요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삶의 힘이요 용기이며 오늘을 이겨나갈 수 있는 삶의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온몸으로 씹어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뇌로 그것을 음미하여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데 삶의 힘과 용기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 바로 이럴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에 엄청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II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10장 10절에,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는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는 말씀을 하나 더 첨부하게 됩니다. 현대인 성경에는, “나는 그의 손에서 작은 책을 받아먹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말한 대로 입에서는 꿀같이 달았으나 먹은 후에는 써서 배가 무척이나 아팠습니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아직 소화되기 전, 입에서 음미할 때는 “꿀같이 달콤한” 그것이 진리의 말씀들입니다. 나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 나로 하여금 삶의 힘을 주는 말씀, 나에게 꿈과 희망을 주며, 나에게 한없는 은혜와 축복을 주는 말씀 그 말씀을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질 것이며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걸 나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소화시켜서 나의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고자 할 때는 나의 희생과 나의 수고를 필요로 하는 헌신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쉽고 편안한 일이 아니라 나의 수고와 땀방울이 들어있는 힘들고 어려움이 뒤따르는 일일 것입니다. 복되고 은혜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이 이웃과 세상 한 복판에서 실천하고자 할 때는 그 말씀은 더 이상 달콤한 “낭만”이 아닐 것입니다.

나의 쓰라린 희생과 헌신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대로 살아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실천을 수반하지 않는 진리, 생활로 이어지지 않는 진리란 단순히 입에 달콤한 것에 불과합니다. 몸으로 진리를 실천하는 일, 신앙이 온 몸과 삶에 베여 있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매우 어려운 “쓴” 일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배에서 쓰더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실천하기엔 나의 수고와 헌신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힘들고 쓰디쓴 것이지만 말씀을 실천하며 이에게는 상상밖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을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III

오늘의 본문이 되는 요한복음 6장은 예수님을 “생명의 떡”, “하늘에서 내려온 떡”,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 “내 살은 참된 양식”이라고 강조하다가 56절에서 58절까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마다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한다”고 하면서 “나를 먹는 자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 것”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자신의 몸을 내놓으신 생명의 양식이기에 “예수라는 생명의 떡” 곧 “생명의 양식”을 먹어야 함을 역설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의 성찬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13장에서는 유월절 전날 밤의 식사 때에 식사시간에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전날 밤의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나의 몸”이라느니 “이것은 너희를 향한 나의 피”라는 전통적인 성찬의 이야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왜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고전도 전서에서 나타나는 주의 성찬과는 왜 달라졌을까요?

요한의 공동체 곧 요한을 중심으로 하는 교회가 성찬을 모를 턱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할 당시 주후 100-120년 경에는 이미 주후 65-80년에 기록된 마가복음, 그 후에 기록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읽혀지던 때였고 주후 55년경에 기록된 고린도전서 또한 읽혀지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렇기에 요한이 다른 복음서의 내용을 모를 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나타난 성찬은“내 살과 피를 먹어라”란 말씀을 하고서 함께 만찬을 나누시다가 아무 말 없으신 채, “제자들의 발을 씻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디.

요한은 무엇을 위해서 주의 성찬에 대한 이야기를 생략하고 말았을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고정화되고 습관화되고 형식화된 “초대교회의 성찬의식”에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인간과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희생하신 “주의 성찬”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교회의 행사”의 하나로 전락하여 그 본질이 변해버린 성찬식과 함께 성찬에만 참여하면 신앙인들의 의무를 다했다고 믿는 90-120년경의 신앙인들에게 요한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당시 교회에서 행해지는 습관적인 달콤한 낭만적인‘주의 성찬’에 대해 깊은 반성을 하면서 나의 땀방울과 사랑이 필요하고 평화가 필요한 곳에“사랑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지난 주간이 종교개혁주간입니다만 16세기 마틴 루터가 종교의 개혁을 주장할 당시 그와 함께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토마스 뮨쪄란 신학자는 루터의 무조건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이는 “달콤한 예수”(sweet Christ)를 믿는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토마스 뮨쪄는 16세기 당시 루터의 종교개혁이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눌려 있던 그들의 쓰디쓴 삶을 외면 채 종교개혁에만 외쳤던 마틴 루터를 강력하게 비판하였습니다. 토마스 뮨쩌는 당시 사회에서 95%의 사람들이 경제적 극빈과 기아로 신음하던 그들을 바라보면서 종교개혁과 사회개혁을 동시에 외쳤던 것입니다. 특히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경재적 극빈으로 먹을 것 제대로 없었던 농민들과 함께 아파하신 “쓰디쓴 예수 그리스도”(bitter Christ)를 믿어야 함을 강조한 바 있었습니다.

이처럼 요한복음은 “사랑의 나눔이 없는 성찬”, “약한 이들을 보며 함께 아파하면서 그들을 돌보지 않는 성찬”, “남의 때 묻은 더러운 발을 외면하는 성찬”,“분열과 분쟁과 전쟁이 있는 곳을 외면한 성찬”, “우리를 향해 눈물로 호소하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섬김이 없는 당시의 교회”를 지적하면서 때묻은 발을 씻어주고 닦아주는‘주의 성찬’을 통해 당시 초대교회의 신앙과 교회를 향해 참된 종교개혁을 시도하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먹는 말씀”을 통해 사랑이 고갈되어진 오늘의 쓰디쓴 세상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 곧 “생명의 양식과 평화의 양식”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먹는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사회와 세상을 향하여 “생명의 양식과 평화의 양식”을 제공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선교의 과제임을 명확하게 보여주고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영혼 없이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 사회와 세상을 향해 오늘의 교회는 “생명의 양식”, “평화의 양식”을 세상 속에서 세상을 향해 뿜어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기도도 “먹는 기도”가 있고 찬송도 “먹는 친송”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먹는 기도”란 기도한 내용을 먼저 우리의 머리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되씹어보면서 기도한 내용에 따라 살아가야만 그 기도가 “먹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찬송도 그렇습니다. 찬송의 가사를 머리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한구절 한구절 음미하면서 쉽지 않은 어려운 일이겠지만 찬송가를 통해 고백된 신앙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적인 삶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의 설교도 “먹는 설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선포한 목사는 설교의 내용을 머리로 되새기며 자신이 선포한 말씀으로 마음이라고 하는 약탕관에 달이고 달여야 하며 그리고 자신이 선포한 설교의 내용처럼 살아가야만 자신에게도 말씀을 듣는 회중들에게도 보약이 되는 “먹는 설교”가 될 것입니다. 흔히들 설교자가 “결론적으로 말하면”이라고 힘주어 말하지만 설교의 결론은 설교자 자신이 그 말씀에 따라 살아내는 것이 “먹는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란 온갖 죄성과 무관심과 무질서가 난무하는 우리 사회와 세상을 향해 위로하고 격려하며, 새 힘과 희망을 뿜어내는 사랑의 발사대이며 아무런 방향없이 되는대로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 사회를 향해 방향을 제시하고 대안을 제시해야만 하는 곳입니다.

전쟁과 살육이 난무하는 시대, 자연생태계의 파괴로 인한 기후위기의 시대, 전쟁과 기후재앙으로 인해 발생한 난민이 들끓는 시대, 경제적 불평등과 극빈으로 한숨을 쉬고 있는 시대, 식량의 부족으로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시대, 남북이 단절하여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시대, 온 나라와 온 세상 구석구석 마약으로 인간의 생명을 짓이겨버려 생명이 파괴되고 있는 시대, 무신성(無神性)의 시대가 오늘입니다.

어떻게 하면 오늘의 교회를 통하여 참된 생명이 넘치고 참 평화가 넘치게 하는 하나님의 세상 곧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를 생각하며 고민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오늘 우리의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이 그리시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그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며 좋아하시는 그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하여 오늘 우리들이 예배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기도도 먹으며 찬송도 먹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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