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위에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우리는 모두가 무언가를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적금을 탈 날이 언제인가 손꼽아 기다리거나 아파트에 입주할 날을 기다리거나 아들이 군대에서 제대할 날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다림들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인간은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기다림을 만들어 갑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 인간의 기다림과 희망이란 사막의 신기루와 같아서 잡으려고 좇아갔다가 잡히는 게 없어서 다시 다른 걸 찾아 헤메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이 기다림은 전혀 다른 차원을 말합니다. 일년의 교회절기 중 대림절이 가장 기독교적 특징이 드러나는 절기인데,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새로운 지평으로 올려놓는 결단이며 작업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대림절을 통해 무엇이 참된 기다림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예수의 오심을 진정으로 기다리고 있을까요? 우리의 기다림은 세상에서 사람들이 기다리는 그런 것들과 근본적으로 구별되고 있을까요? 그가 다시 이 땅에 오시는 날, 그동안 기를 쓰며 끌어모았던 모든 소유는 아무 쓸데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을 진정으로 기다리고 있나요? 그날이 오면 높고 낮음의 차이가 없을텐데도 그날을 기다립니까? 오늘 우리의 사는 모습을 보면 아예 예수님이 오시지 않아도 좋을 것 처럼, 한 걸음 더 나아가 오시지 않아야 좋을듯이 살아갑니다. 사실 그분을 기다리지 않고, 그분을 믿지 않아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아무 불편이 없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세상살이에는 불편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더 많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대림절의 신앙을 갖고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의 궁극적 희망이 무엇인지 분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질문은 바로 메시야 신앙을 우리가 갖고 사는가에 직결됩니다. 우리가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기다리고 있는지 항상 질문해야 합니다.
이 질문은 메시야가 일으키실 구원사건이 무엇인가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야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메시야가 무엇을 하셨는지에 대한 대답을 통해서 밝혀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메시야가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질문이 바로 메시야니즘인데, 오늘 대림절 셋째 주일에 유명한 삭개오 이야기를 통해 우리 기독교 신앙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메시야니즘의 기초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잘 알려진 삭개오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 성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성에 삭개오라 이름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는 세리장이며 부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찾아나섰으나 사람들이 많이 모였기 때문에, 그리고 키가 작았기 때문에 얼굴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의 모습이라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밑으로 지나가시던 예수님이 나무에 올라 앉은 삭개오를 쳐다 보시면서 삭개오의 집에서 하루 묵겠다고 자청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는 뜻밖의 말씀에 황송해 하면서 예수님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변에 둘러섰던 사람들이 수근거리며 하는 말이, “예수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에게 말씀드리기를 자기 소유의 절반을 떼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으며, 남의 것을 횡령한 일이 있으면 네 배나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삭개오의 이러한 행동은 주변 사람들에게 의외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아예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있던 터에 자기들은 감이 꿈도 꿀 수 없을 그런 일을 그가 실행한 것입니다. 삭개오가 세리장이며 부자라는 진술을 통해 미루어 보면 그도 역시 전형적인 세리 모습에서 벗어나 있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 나라 전국 각처에서 드러나고 있는 세금비리 사건에서 보듯이,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횡령의 유혹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유다인들은 세리들을 반민족적인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세리들은 유다 백성들과 로마 정부 사이에서 부도덕한 방법으로 돈을 긁어 모았기 때문입니다. 그 방법이란 아주 간단했습니다. 로마 정부에서 정해준 금액 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부과해서 그 차액을 착복하였습니다. 세리들은 동네 사람들에게서 온갖 멸시를 받으면서도 그런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어간 후, 이재에 도가 튼 삭개오가 갑자기 재물을 헌신짝 처럼 생각하게 되었으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은 정말 혁명적인 변화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사람의 변화라는 것은 의식으로 부터 시작되는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의 의식이 바뀌니까 돈만 알던 그가 돈을 선하게 사용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선포하시면서, 이어서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천 년 전 여리고 성에서 일어났던 이 사건은 우리에게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오셨는지를 웅변으로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성탄절을 기다리는 우리가 반드시 더듬어 보아야 할 사건입니다. 그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즉 예수님의 오심은 바로 삭개오 처럼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라는 점입니다. 잃은 자를 찾아 구원을 알리고 선포하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 교회가 항구적으로 붙잡고 있어야 할 구원론적 지평이며, 메시야니즘의 기초입니다.
삭개오가 왜 잃어버린 자인가요? 삭개오는 비록 돈이 많았지만 이웃들에게 내돌려쳐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자 사람들은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다고 수근거렸습니다. 삭개오가 근본적으로 성품이 불량했기 때문에 세리장이 되었는지, 혹은 어버지의 직업을 물려받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직업은 그를 주변이웃으로 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수입이 많아질 수록 그의 마음은 황폐해졌고, 따라서 마음을 돌려 이웃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살려고 해도 그 일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육심리학에서도 말하듯이, 인간은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그 사람의 가능성을 인정해 주면 그런 쪽으로 나아가게 되고,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게 되면 그런 쪽으로 행동하게 되는데, 삭개오는 도저히 그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진정한 친구로 남아주지 않았으며, 주변 사람들이 항상 뱀을 보듯이 자기를 피하고 있으니 삭개오의 심정이 어떠했으리라는 점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은 자를 찾기 위함이라고 말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도 그런 메시야적 사명 가운데서만 존재의 의미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잃은 자를 찾아 나서는 일 말입니다. 삭개오가 잃어 버린 자를 대표한다는 것은 그가 주변으로 부터 소외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 사회가 내팽개치는 이들을 찾아나서는 일이야말로 메시야적 공동체인 교회가 지향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 주변에 어떤 이들이 잃어버린 이들일까요?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지체 장애자들, 고아와 홀로된 노인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아프리카나 동남 아시아의 절대빈곤한 나라의 사람들이 그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교회도 그런 일에 참여했지만, 많은 교회가 어린이 기아대책을 위한 기구에 돈을 보내기도 하고 혹은 고아원이나 재활원 같은 곳을 지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내년도에도 계속해서 러시아 선교사와 개척교회를 지원하는 일과 아울러 지체장애자들이 모여 사는 재활원과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 그리고 인권위원회와 혼자 사는 노인분들을 가능한대로 돕고자 합니다. 우리 사회로 부터 벗어난 이들에 대한 구제와 봉사는 교회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구원론적 사업입니다.
우리가 찾아가야 할 잃어버린 이들은 바로 그들만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초해서 불행에 빠진 이들도 역시 그에 해당합니다. 예컨대 범죄자들이나 성실하지 못한 이들이 어려운 형편에 빠졌을 때 그들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가 있는 사람들을 향해 “그래, 그런 벌을 받아 싸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자기 잘못 때문에 어려운 처지에 빠진 이들에게도 일어나야 합니다. 삭개오가 주변 사람들로 부터 따돌림을 받은 것은 어쩌면 자초한 일일지 모릅니다만 예수님은 그런 죄인들을 위해서 인자가 왔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또 다른 차원에서 잃어 버린 이들이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소위 정치범, 혹은 양심수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그 사회가 요구하는 체제로 부터 벗어난 이들입니다. 다른 사상, 다른 정치적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교회가 방기한다면 우리는 삭개오를 찾아온 예수님의 제자들이라 할 수 없습니다. 북한과 남한에는 아직도 적지 않은 정치범들이 있습니다. 북한의 실정이야 우리가 자세하게 모르니까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일단 우리 남한 사회 안에 있는 비전향 장기수들에 대해 남한교회가 무관심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의 사상에 동조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사회체제로 부터 벗어나 잃어버린 이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들을 찾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위에서 지적한 세 종류의 잃어버린 이들, 즉 생존의 무능력자와 범죄자와 양심수들이 우리 주변의 잃어버린 이들인데, 그리스도 공동체인 교회가 이들을 찾아나서야 한다는 요구는 이들도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며 인간다움을 회복해야 한다는 대전제에서 설명될 수 있다. 인간다움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권>이라고 부릅니다. 인권이 손상당하는 모든 곳에서 메시야의 사명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모든 곳에서 인권을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인간이 굶는다는 것, 최소한의 교육을 받지 못한다는 것, 질병 가운데서도 의료행위를 받지 못한다는 것, 노동한 만큼 그 댓가를 받지 못하는 것, 억울하게 퇴직당하는 일은 인권과 관계된 것입니다. 70년대 부터 도시산업선교가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투쟁해 왔는데 많은 이들이 그런 운동 때문에 감옥에 갔습니다. 지금은 별로 그런 일들이 없지만 위장취업(?)을 해서 노동자들을 의식시키고 정당한 노동의 댓가를 받게 하던 대학생들, 목사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일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인간다움을 회복키 위한 신앙적 행위들이었습니다. 이번 주 우리 교회 소식지의 <한국교회, 세계교회소식>란에 실린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만 해도 역시 그런 일입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일제시대 때 정신대에 끌려갔다는 사실은 인간다움을 강제로 빼앗긴 일이기 때문에 그 문제를 정당하게 처리하려는 노력입니다.
12월10일은 세계인권일입니다. 한국교회도 12월10일을 전후해서 한 주간을 인권주간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제가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국교회협의회 대구,경북 인권위원회에서는 매년 이 기간에 맞춰 재소자돕기 ‘일일찻집’을 엽니다. 작은 행사입니다만 그런 걸 통해서 재정적인 도움 뿐만 아니라 재소자들의 문제를 많은 곳에 알리고, 그들의 인권을 배려하겠다는 신앙적 행위입니다. <세계인권선언>은 그 전문에서 “인류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고유의 존엄성과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승인하는 것이 자유와 정의와 세계평화의 기본이 되는 것이며 인권의 무시와 경멸이 인류의 양심을 유린하는 만행을 초래하였음”을 지적하고, “모든 사람이 언론과 신앙의 자유, 공포와 결핍으로 부터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세계의 도래야말로 모든 인류가 열망하는 바”라고 전제하면서, “모든 나라의 헌법에 규정된 기본적인 인권과 인신의 존엄성과 가치, 남녀 동등권에 대한 신념, 광대한 자유의 확보, 일층 높은 생활수준의 향상” 등을 위해 노력할 것을 서약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인간다움의 회복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음을 고백하는 교회가 추구해야 할 가장 소중한 메시야적 지평에 속합니다.
이제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문제에 접근해 봅시다. 궁극적으로 무엇을 인간다움의 회복이라고 하는걸까요? 무엇이 바로 잃은 자의 구원인가요? 배고픈 사람이 배부르게 먹고, 감옥에 있던 사람이 밖으로 나오게하는 일 뿐인가요? 그런 삶의 조건이 바뀌는 일도 물론 인간다움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다음과 같은 사실입니다. 구원이란 환경조건의 향상일 뿐만 아니라 더 궁극적으로 삶이 소유로 부터 나눔으로서의 전환입니다. <인간다움은 곧 나눔입니다.> 잘 보십시요. 예수님을 모신 삭개오는 앞서 살핀대로 자기 소유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겠으며, 남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며 네 배로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소외당하던 삭개오가 이제는 주변 사람들에게 나눔을 실천하게 된 것입니다. 가장 인간다워지는 사건은 자기 중심으로 부터 다른 세계를 향해 마음을 여는 작업입니다. 이를 신앙적인 용어로 말하면 회개라고 부릅니다. 우리 교회가 구원받는 길은 밖을 향해 문을 열어놓고 영적인, 물질적인 나눔을 실천하는데 놓여있습니다. 믿는 사람들 끼리 마음을 꼭 닫아걸고 어떻게 구원받은 공동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과 물질에 인색하다면 우리는 구원과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 행위도 사실은 나눔의 작은 실천입니다. 돈이라는 것은 많을 수록 더 필요하기 때문에 헌금으로 떼어드린다는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헌금을 드린다고 해서 당장 부자가 된다거나 모두 건강하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구원받은 자들로서 나누며 살자는 뜻으로 헌금을 드립니다. 지난 일년 동안 우리 교회에 여러 교우들이 십일조 헌금과 월정헌금, 혹은 감사헌금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소유의 십분의 일을 나누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용한다는 신앙고백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한 사람들로서 살아가면서 최소한의 나눔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억지로 드리지 않고 진심으로 나눔의 삶을 실천한다는 신앙 가운데서 드릴 수만 있다면 그런 삶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삶에 속합니다.
우리는 금년에도 역시 성탄절을 기다리며 이 대림절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대림절 기간에도 역시 인간세상에는 계속해서 파렴치한 일들이, 무자비한 일들이, 무신경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인간들이 무진장 애를 쓰고 있지만 크고 작은 파괴가 줄을 이었습니다. 매년 마다 부모를 죽이고, 다리가 끊어지고, 도시가스가 폭발하는 일들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서 인간다움을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성탄절을 맞는 우리가 깊이 숙고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연말과 맞물려 이 성탄절이 어수선한 절기로 끝나 버리는게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진정한 평화와 기쁨의 세계로 이끌어 줄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우리는 인간다움이 상실된 곳에서 그걸 되찾는 일을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그 일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구원에 속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잃은 자를 찾기 위해 오신 예수님 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므로써 구원의 세계에 참여하게 될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진정한 메시야로 믿고 기다립니까? 그렇다면 잃은 자를 찾아나서는 일에 뒤로 물러서지 말고 함께 참여하도록 합시다. (1990년대 중반 현풍제일교회에서 행한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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