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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모두가 꽃이야 (잠언 15:13-17, 고후 2:15-16, 마태 6:26-28)

우리말의 봄”은 다소 정적(靜的)이고 여성적인 어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봄바람, 봄비, 봄나들이, 봄나물, 봄처녀……등등. 봄이 붙는 말에는 그윽한 향내와 함께 은근한 설렘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서양의 봄, 즉 Spring은‘솟아오르다’,‘도약하다’는 뜻으로 활력, 도약, 탄력, 생기, 생동감 등 동적(動的)이고 남성적인 어감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봄은 여성적이면서도 남성적이며 남성적이면서도 여성적인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계절이 아닌가 라고 생각을 해봅니다.

 

I

조병화시인은“해마다 봄이 되면”이란 시를 통해 봄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서/공중에서/생명을 만드는 쉬임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보이지 않는 곳에서/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둑에서/솟은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봄”이라는 말의 어원은 “보다”,“본다”, 배운다”란 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봄은 새롭게 볼거리가 많은 계절이요 봄은 이곳 저곳에서 땅 속에 뿌려진 씨앗들과 뿌리들이 부지런하게 움트고 있고 겨우내 죽은 듯이 숨을 죽이고 있던 나무들이 가지에서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게 하는 생명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언덕배기에 거추장스럽게 걸려있던 나무 넝쿨에서도 어김없이 노란 개나리가 피어나고, 아파트 베란다에 버려둔 화분에서도 거짓말처럼 새싹이 돋아나는 계절이 봄이기도 합니다.

 

시인인 이해인 수녀는 “봄과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그녀의 시를 통해 들려줍니다.

봄과 같은 사람이란/어떠한 사람일까 생각해 본다

그는 아마도 늘 희망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따뜻한 사람

친절한 사람/명랑한 사람

 

온유한 사람/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창조적인 사람

긍정적인 사람일 게다

 

자신의 처지를/원망하고 불평하기 전에

우선 그 안에 해야할 바를/최선의 성실로 수행하는 사람

어려움 속에서도/희망과 용기를 새롭히며 나아가는 사람이다.

 

이러한 시들은 봄계절에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에게 “봄의 신앙”, “봄처럼 생명을 움틔우는 신앙”, “봄처럼 꿈과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새롭게 앞으로 나아가는 신앙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지를 우리들에게 진지하게 물어오고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구약 잠언 15장 17절에 “채소와 나물을 먹으면서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고기를 먹으면서도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렇게 보면 전쟁만 일삼는 오늘의 세상-기온이 올라가든 이산화탄소와 메탄가스가 마음껏 배출되어 기후위기와 재앙이 닥쳐와도 나만 안전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이는“봄신앙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이러한 신앙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과 우주라고 하는 하나님의 집안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공동체를 아끼고 돌보며 깨끗하게 관리하고 잘 보살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운 세상이 되게 하는 신앙과는 반대되는 모습임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II

오늘 봉독한 마태복음 6장 26-29절은 예수님의 산상보훈 또는 산상수훈이라고 하는 마태복음 5-7장의 중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셔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도를 선포하시는 산상수훈의 말씀으로써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설교말씀이라 볼 수 있습니다. 무리들 중에는 예수의 말씀을 신학적으로 헐뜯기 위해서 조목조목 따져보는 바리새파 사람들도, 교리적으로 틀리게 말하는 것은 아닌지 따져보는 율법학자들과 같이 원칙과 법을 강조하는 기계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무리들 중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위로를 받으며 그 말씀에 따라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가난한 사람들도, 여성들도, 어부들도 농민들도 청소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의 율법에서 금지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죄인으로 불렀는데 그들 백정, 대장장이, 가죽으로 물건을 만드는 피혁공, 길거리여성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8복의 말씀을 하시면서 세상의 소금처럼 세상의 빛이 되어 살아가야만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해 나가야 함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러분 당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주인이라는 말씀을 하실 때에는 떨림과 벅찬 울림으로 큰 감동과 위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가난하여 오늘은 무엇을 먹을 것이며 무엇을 마실 것이며 무엇을 입을 것인가로 걱정과 염려가 되어 머뭇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그런 마음속을 꿰뚫어 보시면서 하신 말씀이 오늘 봉독한 마태복음 6:26-29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생각하여 보라”고 말씀을 던졌습니다. 생각하여 보라는 말의 원문은 “카타마테테”란 말인데 이 말의 원형은 “카타만다노”입니다. “카타”란 말은 “깊이 있게”란 말이며 “만다노” “배운다, 이해한다”말의 합성어이므로 들의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는 말은 들의 백합화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진지하고도 깊이있게 생각하여 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어려운 율법의 이야기도 아니었으며 교리적으로 정죄하는 말씀도 아니었기에 모두가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누구의 도움이 없이도 들의 백합화가 잘 자라나는 것을 바라보면서 과연 우리는 어디에다 최우선 순위를 두고서 살아갈 것인가를 깊이 있게 생각하여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너희는 무엇보다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의 생명정의평화를 실현해 나가는 그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어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임을 역설했던 것입니다.

들에서 핀 백합화 곧 이름없는 들풀이나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에 밟히기도 하는 지극히 작은 꽃들도 하나님의 손길로 살아가는 것처럼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값지고 소중한 당신들이야말로 뒤에서 앞에서 옆에서 위에서 보살피시고 인도하시고 축복을 내려주실 것이라는 비유의 이야기야말로 큰 감동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예수님의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생각하여 보라”말씀에 입각하여 우리 주위에 피어나고 있는 꽃과 나무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는 소중한 교훈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봄에 피는 꽃 중에서 민들레는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민들레는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밟혀도 죽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뿌리까지 뽑아내고자 할 때, 바로 그순간 씨앗들이 멀리 날아가 어디서든지 더 많은 꽃들을 피워나가기도 합니다. 뿌리까지 뽑일 때, 뿌리의 실날같은 뿌리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1년 후 2년후엔 반듯이 땅을 뚫고 나오는 꽃이기도 합니다. 저는 민들레꽃을 통해 수없이 많이 밟히고 꺽여도 굴하지 않는 백절불굴의 정신을 베우곤 합니다.

 

아동문학가 장화숙은 “민들레, 너는”이란시를 남겨놓았습니다.

돌부리 널브러진 땅/온 힘 다해 내린 뿌리,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서로를 껴안으며 겹겹이 돋아

노랑 꽃대를 밀어 올렸다.

민들레,

너는 금메달에 빛나는 역도 선수다.

(2) 봄에 피는 꽃들 중에서 가장 겸손한 꽃은 할미꽃이라 생각합니다. 할미꽃을 보면 처음부터 머리를 겸손하게 숙여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간 혹 목을 쳐들 때도 있지만 곧바로 고개를 숙여 자신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꽃입니다. 할미꽃은 태생적으로 머리를 곱게 숙이고 있는 겸손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3) 대부분의 꽃이나 나무들은 땅에 뿌리를 두어야 줄기를 내고 잎을 내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연못이나 물속에서 자라는 수련은 모두가 가는 길을 그냥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상상 밖의 길,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 외로운 길, 그곳에서 뿌리를 내라고서 자라나며 물속의 오염을 정화시켜 나가는 식물, 그 진흙탕 같은 물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식물이 수련이기에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4) 우리는 가끔 벽을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넝쿨을 볼 때가 많습니다. 시인 도종환은 담쟁이란 시를 통해 담쟁이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것은 벽/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결국 그 벽을 넘는다

 

담쟁이 넝쿨은 자기 마음대로 혼자서 독주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이웃들과 손에 손을 잡고 높은 장벽을 성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담쟁이 넝쿨이야말로 모두가 함께 손을 맞잡고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우리들의 선생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보면 모든 꽃들이 모든 나무들이 모든 자연생태계 생명들을 통해서 허너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닫게 해줍니다. 봄의 계절은 우리 모두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꽃이 되어야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고린도후서 2장 15절에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해야 하는 존재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꽃임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III

이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생각해 보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오늘날 기후위기 시대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공중의 새와 백합화를 생각하고 우주 안에 살아가는 모든 동물과 식물, 아름다운 산과 강과 바다 등의 삼라만상의 아름다움을 신비로움을 곰곰이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탐욕과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서로 경쟁하고 서로 싸워나갔으며 우리 인간만의 화려한 생활을 위해 자연생태계에 대한 마구잡이의 폭력이 이 땅에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지구의 생일이 1월 1일이라면 인류의 생일은 12월 31일 23시 55분이라고 할 정도로 우리는 끔찍한 기후위기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1만년 전에는 100년에 생물 1종이 사라졌고; 1천년 전에는 10년에 생물 1종이 사라졌으며; 100년 전에는 1년에 1종이 사라졌고 20년전에는 하루에 생물 100종 이상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현재는 유엔환경계획이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하루에 대략 150-200가지 동식물들이 지구에서 사라진다고 합니다. 지구상에 있는 3000만 가지에 이르는 생물 가운데 하나인 인간 때문에 다른 동식물들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우주, 그 하나님의 집 곧 우주 안에 작은 지구라는 별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은 모든 동식물과 함께 살아가는 친구요 가족과도 같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인간은 숨쉬며 살아가는 자연생태계와 그 속에 살아가는 모든 동식물의 생명들을 잘 관리해 나갈 때,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운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촌에는 비승인 국가를 포함하면 세계에 249개의 나라가 있는데, 그 가운데 25개 나라에서는 이제 숲이 하나도 없이 완전히 사라졌고; 18개 나라에서는 숲의 95%가 사라졌으며; 11개 나라에서는 숲의 90%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1초마다 축구장 하나만큼 초록빛의 숲이 사라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브라질에서는 아마존강의 열대우림 개발사업으로 1초마다 3000개의 숲이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숲이 사라지면 숲속에 살아가는 동식물만이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동식물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 인간도 이제 더 이상 생존하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편리하고 안전하며 여름철에는 시원하고 겨울철에는 따뜻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마음껏 화석연료를 사용한 결과 오존층을 파괴하는 이산화탄소를 무한정 배출하였습니다. 또한 우리 인간의 건강한 몸과 영양가 높은 육식의 음식을 위해 산과 논과 밭을 갈아엎고 초대형의 공장식 축산을 만들어 600억 마리의 소와 400억 마리의 돼지, 칠면조와 닭을 생산하는데서 엄청난 메탄가스를 배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편리한 생활을 위한 이산화탄소와 보다 나은 육식생활을 위하여 배출된 메탄가스가 기후온난화의 주범이 되어 오늘의 기후가 급격하게 변화하여 4월달이 6월달의 기온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지구온난화는 결국 북극의 얼음이 녹아 두께가 얇아지게 하였습니다. 1958년에서 1978년 사이에 북극의 얼음은 두께가 평균 3m였는데; 1995년 이후 기후온난화의 영향으로 북극에서는 얼음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1997년에는 얼음이 40% 줄어들어 얼음두께가 1.7m로 얇아져 바다로 흘러 들어가 바다 해면이 10-20cm 높아졌다고 합니다. 2023년 작년에는 북극의 얼음 중심부에 구멍이 생겼고 얼음두께가 1m 이내로 얇아졌다고 합니다.

특히 북극과 남극의 얼음은 태양의 뜨거운 빛을 반사하여 기후 온난화를 막아주지만 기후온난화로 인해 얼음이 녹아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바닷물은 태양의 빛을 흡수하여 바다 온도가 더욱 높아지게 됩니다. 그러면 따뜻한 바다에서부터 나오는 수증기와 북극과 남극의 차가운 공기가 만나면 폭설, 극한, 한파 등으로 기후재앙을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산업혁명 일어난 1780년대-1980년까지 200년 동안에 지구 온도가 1도가 올라갔으며, 1980년부터 2020년 40년동안 0.5도가 올라갔는데 우리의 삶의 양식이 달라지지 않으면 앞으로 25년 이내 0.5가 더 오른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지구는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불타는 용광로가 되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모두가 예측합니다. 우리의 생활이 달라지지 않으면 기후재앙은 곧 닥쳐올 것은 너무나 뻔한 사실입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께는 들에서 볼 수 있는 야생의 백합꽃을 통해 콘크리트 정글, 이중 유리로 된 집, 냉난방이 잘되는 집과 자동차, 편리하고 화려한 생활에 적응된 소비주의적 생활과 공장식 사육장에서 도살된 고기에 적응된 음식문화는 자연, 계절, 날씨 그리고 기후로부터 우리 현대인들과 우리 신앙인들을 단절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편리한 도시생활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들에 핀 백합화”란 꽃이 생소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도시의 사람들인 우리가 꽃을 본다면 보통 잘려서 죽어 있는 꽃꽂이거나 인공적인 꽃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들의 백합화를 진지하게 생각하여 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공중의 새를 바라보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신 말씀은 첫째로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를 하나님의 집으로 생각하라는 말씀이요 둘째 하나님의 집 안에 함께 살아가는 모든 생명공동체들을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면서 서로 상생하며 살아가야만 한다는 말씀으로 들려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인간들의 절제된 생활, 자연친화적인 신앙생활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으로 회복시켜 나가야 할 새로운 사명을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자연친화적인 신앙생활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이 되게 하는 일이 최우선이 되게 해봅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리라 확신합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생태적 신앙-기후신앙을 통해 가까운 곳에서부터 우리의 자연도 살리고 지구의 모든 생명들을 살려내는 신앙인이 되어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듬뿍 발하는 봄꽃이 되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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