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부활
눅 24:36-48, 부활절 셋째 주일, 2015년 4월19일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금년의 부활절은 두 주일 전인 4월5일이었습니다. 부활절 절기는 5월17일 주일까지 7주간 계속됩니다. 중요도로 본다면 52주일 전체가 부활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유대인들의 안식일인 토요일이 아니라 주일에 예배를 드리게 된 것도 기본적으로 예수님께서 안식일 다음날인 주일에 부활하셨다는 전통에 따른 겁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부활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도 부활절 한 주일만 행사를 치르듯이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맙니다. 설교도 비슷한 경향을 보입니다. 부활을 주제로 하는 설교를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주로 교회성장, 축복, 병 나음, 도덕적인 변화 등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기독교 신앙의 깊이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생활을 합니다. 구원은 곧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고,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관심이 있다면 당연히 부활을 신앙생활의 화두로 삼아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기는 하지만, 문제는 부활을 우리가 아무리 깊이 생각해도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부활의 리얼리티가 우리 영혼에 와 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는 사실밖에는 부활에 관해서 더 이상 할 말도 없습니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지 부활은 무슨 부활, 그거는 허무한 세상에서 위로를 받으라는 종교적 덕담에 불과해, 그리고 과학적으로 말이 안 돼, 하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비슷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실제로도 부활 신앙 없이 얼마든지 세련된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포함한 현대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면, 부활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보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의 일에 그렇게 맹목적으로 매달릴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그렇게 비난할 수 없고, 공연한 일로 다툴 수 없고, 그렇게 절망하거나 좌절할 수 없습니다. 내일 결혼할 신부가 어떻게 거짓말을 할 것이며, 어떻게 사소한 일로 화를 내겠습니까? 오늘 저는 부활절 셋째 주일을 맞아 지난 부활주일부터 시작해서 세 번째로 부활을 주제로 한 설교를 하겠습니다.
손과 발, 살과 뼈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세 가지 전합니다. 다른 복음서와 중복되는 것도 있고, 약간 차이 나는 것도 있습니다. 가장 크게 차이가 나는 이야기는 소위 ‘엠마오 두 제자’(눅 24:13-35)입니다. 상당히 길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마가복음은 단 두 절(막 16:12-13)로 요약했습니다. 그 내용은 동화처럼 약간 환상적인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후 안식일이 지난 첫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무덤이 빈 것을 발견한 여자들이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했고,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가 무덤에 가서 빈 것을 확인했습니다. 같은 날 늦은 오후에 글로바라는 이름의 제자와 다른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10킬로미터 쯤 떨어진 엠마오로 가는 중간에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엔가 나타나서 동행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날이 저물어 엠마오에 들어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빵을 축사하고 그들에게 떼어주자 그들의 눈에 밝아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은 사라졌습니다. 그들은 오던 길을 되돌아 예루살렘에 가서 자신들이 경험한 사실을 열한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눅 24:36-48)은 그 다음부터의 이야기입니다. 엠마오 두 제자와 열한 제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 자리에 예수님이 나타나서 ‘그대들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고 인사를 하셨습니다. 다들 놀랬습니다. 당연합니다. 무덤이 비었다는 이야기와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천사들의 말을 전해 들었고, 지금 엠마오 두 제자들로부터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예수님이 직접 자신들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37절에 따르면 제자들은 자기들이 지금 보고 있는 대상을 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혼령, 또는 귀신으로 간주한 겁니다. 제자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자 예수님은 왜 두려워하고 의심하느냐, 하시면서 39절에서 다음과 같이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을 직접 보았으니 한편으로는 기쁘지만 여전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종잡기 어려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이것을 먹었다고 합니다. 손과 발의 상처를 지닌 예수님을 본 것만으로도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인데, 생선 한 토막을 먹는 걸 보았으니 제자들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지 상상이 갑니다. 며칠 전에 무덤에 장사지낸 여러분의 가족이 나타나서 이런 행동을 했다고 가정해보십시오. 2천 년 전 당시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자꾸 따져 묻지 말고 예수님의 부활을 무조건 믿으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믿으면 됩니다. 그런 사람들을 저는 비판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는 믿음이 생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저와 비슷한 분들이 있을 거로 봅니다. 그분들 대신해서 저는 이 사건에 대해서 질문하겠습니다.
우선 부활의 주님이 어떤 현상으로 나타났는지를 확인해봅시다. 1) 요 20:19절에 따르면 제자들이 문을 닫고 숨어 있는 그 자리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문과 벽을 그대로 통과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분이 우리의 몸과 똑같은 실체로 부활하신 게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2) 앞에서 설명한 엠마오 두 제자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나타나서 동행하다가 또 바람처럼 사라졌습니다. 이런 현상도 현재의 몸을 그대로 갖고서는 불가능합니다. 3) 오늘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은 생전의 몸을 그대로 갖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손과 발의 상처, 그리고 생선을 먹는 일이 그에게 일어났으니까요. 이런 존재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일까요? 영도 아니고, 그렇다고 몸도 아닙니다. 영이면서 동시에 몸입니다. 시간과 공간에서 자유로우면서도, 동시에 거기에 지배받는 존재를 우리는 상상하기 힘듭니다. 시공을 초월하는 천사는 천사일뿐이고, 시공의 지배받는 인간은 인간일 뿐이지, 천사이면서 동시에 인간일 수는 없습니다. 이게 우리 인류가 경험한 세상의 원리입니다. 과학적으로도 그렇고, 실제 일상적인 경험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복음서 기자들이 경험한 부활의 예수님은 이런 세상 원리와 법칙에 어긋납니다.
우리는 지금 양자택일의 기로에 섰습니다. 하나는 복음서 기자들의 이야기를 허황된 거로 취급하는 겁니다. 허황된 이야기를 우리 삶의 중심으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사이비 이단 교주들의 주장을 무시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제자들의 경험이 일상적인 세계 경험을 뚫고 나가 궁극적인 생명 세계를 선취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저는 물론 이 두 번째의 입장을 택한 사람입니다. 그게 진리라고 믿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저와 똑같을 겁니다. 이 진리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이해하려면 인간과 세상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벗어나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역사적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판넨베르크는 이 대목을 <사도신경해설> 148쪽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잠간 인용하겠습니다. “역사가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반적인 사건의 규칙을 통해서는 완전하게 설명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발생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열린 입장을 보여야만 한다.” 그가 말하는 어떤 것은 우연한 것들을 가리킵니다. 그런 것들은 기존에 알고 있는 것들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 앞에서 정말 진실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가능성을 닫아두지 말아야 합니다.
이게 까다로운 개념이라서 일상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가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끼리의 결혼 이야기를 듣습니다. 한쪽은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학력도 괜찮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자기 수준에 걸맞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쪽은 평생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할 정도로 몸이 나쁘고 돈도 없고 배경도 없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결혼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합리적인 논리도 이런 일을 충분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진화생물학에서도 돌연변이를 인정합니다. 과학의 발전은 지금까지의 과학적 논리로 해명이 안 되는 어떤 현상을 연구하면서 진행됩니다. 부활의 예수님이 한편으로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거기에 의존해서 나타났다는 제자들의 경험은 바로 이처럼 기존의 규칙으로는 완전하게 설명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종말론적 생명 사건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종말에 완성될 생명을 미리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 경험으로 제자들은 혹독한 박해의 시절을 버텨내면서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온 세상에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몸의 부활
기독교의 부활 신앙은 사실 기독교만의 독자적인 것은 아닙니다. 유대교의 묵시사상, 페르시아의 부활사상에도 그런 흔적들이 있습니다. 특히 헬라 철학은 기독교가 형성되던 시기의 유럽에서 주도적인 사상이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부활 신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영혼 불멸설이 그것입니다. 헬라 철학에 따르면 영혼은 이데아로부터 와서 잠시 인간의 몸 안에 거주하다가 인간이 죽으면 다시 이데아의 세계로 돌아갑니다. 이들에게 인간의 몸은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었습니다. 죽음은 감옥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영과 몸이 이원론적으로 보는 입장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와 달리 영과 몸을 하나로 봅니다. 몸이 없는 영은 참된 인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서 ‘몸의 부활’이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살과 뼈에 대한 오늘 본문의 언급도 몸의 부활을 가리키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기독교 신앙이 직면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인간이 죽으면 몸이 썩어 없어지는 게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몸의 부활이라는 말이 지금과 똑같은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냐,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이건 다시 모순에 빠집니다. 지금과 똑같은 몸은 영원한 생명이 아닙니다. 부활 생명이라고 말하기에 접합하지 않습니다. 지금과 같은 살과 뼈로 다시 산다면 우리는 여전히 배가 고프고, 병들고, 늙고, 또 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몸의 부활’이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요?
이 주제를 신학적으로 설명한 신약성경이 있습니다. 바울이 쓴 고린도서입니다. 고전 15장은 소위 부활장이라고 합니다. 특히 고전 15:35-58절이 이 문제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두 구절만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43절).
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52절).
여기서 키워드는 변화입니다. 지금 우리의 몸은 썩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없어집니다. 아무도 이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 그대로 완전히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몸이 없어지고 혼령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없어지는 게 아니라 변화되는 겁니다. 모양만의 변화가 아니라 질적인 변화입니다. 어느 한 부분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게 없을 정도로의 전적인 변화입니다. 이런 변화를 우리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유일회적으로만 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질적으로 변화된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문을 닫아두었지만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 방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으며, 동시에 생선을 먹을 수도 있는 분으로 제자들에게 경험되었습니다.
변화된 몸이라는 개념이 손에 잘 잡히지 않을 겁니다. 아무래도 비유를 들어야겠습니다. 저는 며칠 전에 해바라기 씨를 구입해서 마당 적당한 곳에 심었습니다. 지금은 씨가 땅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만 얼마 있지 않으면 싹이 나고 꽃이 피겠지요. ‘러시안 해바라기’ 씨는 1센티미터 조금 넘을 정도의 크기이지만 나중에 2미터50센티미터까지 자랍니다. 해바라기 꽃은 씨에서 나왔지만 씨와 완전히 다른 실체입니다. 동시에 씨가 없으면 해바라기 꽃도 없습니다. 죽은 씨를 심으면 당연히 꽃도 피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죽어 있으면 부활 생명도 없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가 부활의 예수님을 믿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생명이 있어야만 죽음 이후의 부활 생명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지금 우리는 죽은 씨앗일까요, 아니면 살아있는 씨앗일까요?
바로 이 대목이 몸의 부활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관점입니다. 우리가 얼마 후에 죽는 게 분명하지만, 즉 우리의 몸에 관계된 모든 것이 해체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으로 살아가는 지금의 삶이 죽음 이후 미래의 삶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영혼불멸설을 주장하는 헬라철학에서는 지금의 삶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몸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그들에게는 구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지금의 몸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지금의 몸이 부활의 몸과 비밀한 방식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우리는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모두 죽습니다. 몸도 썩습니다. 씨가 땅속에 들어가 썩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죽어 썩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변화됩니다. 극단적 방식으로 변화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직접적으로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절정의 생명으로 변화됩니다. 이 사실을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제자들의 신앙 전통을 이어가는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신경에 참여한 모든 기독교인들과 더불어서 저와 여러분 모두는 지금 ‘몸의 부활’을 믿고, 설레는 심정으로 기다리며, 그리고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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