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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무슨 희망인가?

mms://wm-001.cafe24.com/dbia/070603.mp32007.06.03. 롬 5:1-5
무슨 희망인가?

여러분은 지금 무슨 희망으로 사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학생들은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거나 좋은 직장에 취업하고 싶겠지요. 과학자는 자신의 연구 결과에 희망을 걸고 살겠지요. 결혼을 꿈꾸는 사람도 있고, 집 장만이 희망인 사람도 있습니다. 암 수술을 앞에 두고 있는 사람은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기를 바라고 희망하겠지요. 투기지역에 땅이나 아파트를 산 사람은 값이 오르기를 학수고대하겠지요. 그런 것들이 우리 삶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름으로 희망을 안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희망이 모두 이루어진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될까요? 좋은 대학, 직장, 배우자, 집을 얻은 다음에는 우리는 또 다른 걸 얻기 위해서 노력하겠지요. 한 가지가 성취되면 또 다른 걸 희망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죽을 때까지 무언가에 매달려 살아가겠지요. 그게 바로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 생각이 있는 분들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희망사항이 성취되어도 우리가 전혀 만족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저는 이런 일상적인 일들이 무의미하다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작은 꿈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야 하지만 그것의 근본적인 한계를 눈여겨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이뤄진다고 해도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의 속성 자체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인 영에 따라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영적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그 어디에서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만족하지 못하면 그 어떤 다른 것으로도 만족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혹시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 못하겠다, 하시는 분들이 있으신가요? 나는 돈만 있으면 충분히 만족한다고, 좋은 집만 있으면 만족하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외부적이 조건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음과 같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첫째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이 들어간 사람, 둘째는 자신의 영적인 갈증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후자에 속합니다. 자신의 영적인, 정신적인 삶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술에 의지해서 모든 걸 망각하고 있는 알코올중독자와 비슷합니다.
성서는 바로 우리로 하여금 삶의 영적인 만족만이 참된 만족이라는 사실을 거듭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참된 만족을 알아야만 우리가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는 바울의 진술을 “뻔한 이야기!”라고 지나치지 말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게 잘 해결된다는 이야기로구나, 하고 너무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건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생각해야 할 진리입니다. 숨을 쉬듯이 우리는 이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바울이 무엇을 어떻게 말하는지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광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자기의 목표가 성취되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바울은 그런 목표물들을 빌립보 3장에서 배설물과 같다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2b)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영광(독사 투 데우)에 참여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 사람은 당연히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무슨 뜻일까요? 영광이라는 단어는 영원하신 하나님에게만 사용될 수 있지 유한한 사람에게는 쓸 수 없습니다. 그것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사물이나 사건이 이 세상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대법관, 대학교 총장,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영광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도 순식간에 빛을 잃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런 것들과 전혀 차원을 달리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솔로몬의 영광을 꽃 한 송이보다 못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마 6:29) 이 말씀은 솔로몬에게도 부분적인 영광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 자체를 부정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그 어떤 영광도 누릴 수 없다고 말입니다. 솔로몬을 비롯한 역사에 등장했던 수많은 영웅호걸들은 나름으로 영광을 추구했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습니다. 우리가 불가사의라고 추켜세우는 여러 건축물들도 역시 이런 운명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있습니다.
저는 이 하나님의 영광을 여러분에게 정확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습니다. 저는 성서가 말하는 이런 놀라운 세계 앞에서 늘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유치원 학생이 베르디의 ‘레퀴엠’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오늘 본문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부연 설명이라도 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없습니다. 아마 그 당시 로마교회 신자들은 바울의 이 말을 충분히 알아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무엇으로 알아들었을까요?
바울의 신학을 근거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에서 선취된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생명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모든 것들은 풀처럼 지나갑니다. 그런 것을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죽음을 넘어선 생명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언젠가는 이 생명에 참여할 겁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을 아는 사람은 당연히 기뻐합니다. 과거에 급제해서 암행어사나 지방 관리로 내려갈 날을 기다리는 사람이 기뻐하듯이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즉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그때를 희망하면서 오늘을 기쁘게 삽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영광이 현실화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영광에,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현재 삶에는 하나님의 영광이나 영원한 생명에 어울리지 않은 요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하더라도 고통은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실존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으로 기뻐하지만, 동시에 여러가지 고통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바울과 로마 기독교인들의 경우에는 단지 일상만이 아니라 신앙생활에서 오는 고통도 많았습니다. 유대교와 로마정권으로 받는 어려움들은 간혹 순교까지 불러왔습니다. 오늘의 시대가 바울의 시대와는 다르지만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라는 희망과 고통을 짊어져야 한다는 현실 사이에서 긴장하며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기독교인은 두 세계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있는지 모릅니다. 한 세계는 다가올 하나님의 영광이며, 다른 하나는 현재의 고통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기독교인들은 두 세계 사이에 놓여 있지만 오락가락하면서 방황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의 고통도 이미 극복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뭐라고 말하는지 잘 보십시오.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롬 5:3,4) 현실의 고통마저 희망으로 나가게 된다면 기독교인은 고통을 극복한 것입니다.
고통이 결국 희망을 낳는다는 바울의 이 가르침을 말장난 같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고통은 그저 고통일 뿐이지, 그래서 우리가 피해야 할 대상이지 어떻게 희망을 낳느냐 하고 말입니다. 물론 고통은 쉽게 극복되지는 않습니다. 지금 제가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다고 합시다. 그런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 자주 일어나니까 제게도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요. 사고치는 가족 때문에 크게 고통당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그들에게 가서 “고통은 희망을 낳는다니까 힘을 내세요.” 하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말은 들은 사람은 아마 속으로 “너나 잘해.” 할지 모르겠군요.
저는 기독교 신앙으로 이런 현실적 고통이 순식간에 사라진다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건 진통제에 불과하겠지요. 우리가 기본적으로 바른 신앙을 유지하기만 하면 자신도 모르는 과정을 통해서 어느 사이에 희망을 붙들게 됩니다. 바울은 인내와 끈기의 과정을 거친다고 설명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약간씩 다르기는 하겠지만 현실의 고통이 결국 희망으로 이어진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바른 신앙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에 따른다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그 희망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하나님의 영광을 별로 절실하게 생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고통이 없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이 살기 좋은데 무슨 하나님의 영광이냐 하는 생각이 그 밑바탕에 있는 겁니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포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심각한 고통을 당한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이 더 강해지겠지요.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만나게 될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러분의 삶이 고통 없이 잘 풀리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전에 잠시 주신 삶을 풍요롭게 누리라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믿고 즐겁게 사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고통스런 일들이 벌어진다면 이 세상의 미련을 접고 하나님의 영광에 더 집중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바른 신앙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여러분이 생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해주실 겁니다.

희망과 하나님의 사랑
이제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현실과 투쟁하고 있는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실제로 그걸 경험한 분들에게는 이런 질문이 아무런 의미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많은 분들에게는 앞의 이야기보다 더 중요할 겁니다. 신앙은 단지 이해에 머무는 게 아니라 체험으로 이어져야 하니까요.
바울은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셨다는 게 대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그분의 도우심입니다. 내가 기적으로 병이 나았다거나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가득하다면 우리는 그 어떤 고통이나 상황에서도 걱정할 게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기만 하다면 폭풍우를 겁내지 않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만 고통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삶에서 경험하십니까? 그렇다면 좋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실제로는 사랑의 경험이 없으면서도 사랑받는 것처럼 연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남편에게 전혀 사랑받지 못하는 많은 여자들이 사랑받고 있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부어졌는지 판단할 수 있는 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속에 받았다는 증거는 곧 하나님과 평화에 놓여 있습니다. 바울은 1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면 곧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에 달려있습니다. 우리의 종교적 업적이나 윤리, 도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린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오늘의 고통스러운 삶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안고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여러분, 처음에 드린 질문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여러분은 무슨 희망으로 삽니까?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이 그 대답입니다. 그 희망이 여러분을 고통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기쁨으로 이끌어줄 겁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평화를 이룬 우리는 함께 이 희망의 노래를 불러야겠습니다. 바울의 진술대로 이 희망은 결코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로마서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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