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25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YqV19ro4SKg?si=qiVkEro3V-bmY01_
▣ 들어가는 말
- 시선의 폭력
시몬느 소스, 『시선의 폭력』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어머니의 얼굴을 향해 눈길을 돌렸을 때, 아이는 무엇을 볼까? 보통 아이가 보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아이는 어머니의 눈이라는 아주 특별한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뿐만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감정도 본다.” 아이는 타인, 특히 어머니의 얼굴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갑니다. 그러기에 그 얼굴에서 느껴지는 감정, 느낌은 굉장히 중요하지요. 부모 또한 아이를 바라볼 때,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을 투영해서 보기도 합니다. 아이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지요.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성경 전체에서 이 구절만큼 애타는 아버지의 마음을 절절히 표현한 곳도 없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 어떤 아들보다 압살롬을 굉장히 아꼈던 모양입니다. 성경에 부자 관계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 유독 압살롬에 대해서 이런 가슴 절절한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이상의 그 무엇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요.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삼하14:25) 엄청난 극찬입니다. “사람이 가까이 와서 그에게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그에게 입을 맞추니…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삼하15:5~6) 압살롬은 잘생기고, 매력적이며,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정치적 감각이 탁월했습니다. 이는 다윗이 젊은 시절 골리앗을 무찌르고 백성의 사랑을 받던 모습과 흡사합니다. 압살롬의 모습 안에는 젊은 시절 다윗의 야망, 권력욕, 그리고 매혹적인 카리스마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에게 압살롬은 단순한 자식이 아니라, 자신의 과거와 잠재적인 자아를 보여주는 존재입니다. 젊은 시절의 거울 같은 존재. 과거의 자신을 꼭 닮은 존재. 압살롬을 보면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 자신과 동일시하게 된 것이지요. 자신이 가졌던 허물과 자만까지도 꼭 닮은 존재. 그러니 압살롬에 대한 애착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압살롬이 가진 그 카리스마는 결국 다윗에 대한 반역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다윗 자신의 죄(밧세바 사건, 우리아 죽음)가 낳은 결과이며, 그의 실수와 잘못을 그대로 보여주는 자신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니 압살롬의 죽음은 곧 다윗 본인의 죽음 같은 것이지요. 해결되지 않은 자신의 죄와 교만, 그리고 통제되지 않은 욕망이 심판받는 순간입니다.
“너는 승리했다. 그러나 압살롬이 죽었다”
▣ 압살롬이 죽었다!
우리는 압살롬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 존재론적 단절
“압살롬이 죽었다”는 메시지는 단순한 전쟁의 결과가 아니라, 다윗이라는 인간의 내면을 찢는 사건이며, 인간의 비극과 신의 섭리가 교차하는 자리입니다. 다윗에게 압살롬은 단순한 자식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피이며, 자신을 반영하는 존재입니다. 압살롬의 반역, 아버지와 아들의 파국적인 단절은 다윗이 자신의 과거, 추악한 죄악(밧세바 사건)을 더 깊이 바라보게 만듭니다. “압살롬이 죽었다”는 말은 “당신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그 무엇이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압살롬의 죽음은 단순히 아들의 죽음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왕으로서, 인간으로서 다윗 자신의 무너짐인 것입니다.
- 사랑과 정의의 불가능성
압살롬은 반역자였고, 국가의 법률상 사형당해야 마땅합니다. 요압이 그를 죽인 것도 정치적 안정과 정의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는 불가피한 조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 앞에서 다윗은 울부짖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삼하18:33) 이 장면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사랑과 정의가 공존할 수 없는 인간 조건의 비극성을 드러냅니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정의는 항상 타자의 얼굴 앞에서 떨려야 한다” 말했습니다. 떨림이 없는 정의,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잃어버린 정의는 폭력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정의는 언제나 사랑을 동반해야 하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정의가 얼마나 부조리한지, 또 인간의 사랑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 말입니다. 인간은 그 어떤 온전한 사랑도, 온전한 정의도 세울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 내면에서도 끊임없이 사랑과 증오가, 정의와 불의가 교차하고 있지 않은가요. 그저 그 사이에서 이리저리 방황하고 떨고 있는 연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다윗이 바란 정의가 무엇일까요. 아들을 죽이는 정의인가요. 그가 잃어버린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압살롬을 죽이지 않았다면, 그는 사랑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불의에 눈감는, 불의를 허용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요. 다윗은 절대왕정 국가의 권력자이지만, 사랑을 지키지 못했고, 정의를 지키지도 못한 것이지요. 우리가 그리도 바라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요.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버리고 이타적인 사랑을 인간이 실현할 수 있을까요.
- 자기 자신과 화해의 실패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불렸지만, 그의 삶은 끊임없는 전쟁, 죽고 죽이는 전투, 권력투쟁과 암투, 아울러 자기 내면의 분열과 죄성과의 치열한 싸움의 역사였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은 외부의 정치적 반란뿐만이 아니라, 내면의 죄성이 밖으로 드러난 사건, 어두운 그림자가 밖으로 튀어나온 사건입니다.
이는 철학자 리쾨르의 “자기 용서의 불가능성” 개념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결코 온전히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 인간 안에 천사와 악마가 동시에 존재하는 아이러니. 인간의 존재론적 역설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결국, 인간은 그 누구도 완전히 자신과 화해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을 안고 사는 존재인지도 모르지요.
⇒ 결국, 압살롬의 죽음은 인간의 한계, 존재의 비극성, 그리고 인간 구원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평생을 최선을 다해 살았으나 그는 한 인간으로서, 자식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아버지로서, 정의와 사랑을 세워야 할 왕으로서도 실패했으며, 따라서 도저히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 침묵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조건으로 인해 구원을 요청하는 존재, 구원이 필요한 존재이지요.
▣ 두 전령
이 인간의 비극성, 인간 실존의 한계를 드러내는 장면에 뜬금없이 두 사람의 전령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저 소식(승리의 기쁜 소식, 아들 죽음의 슬픈 소식)을 전하는 역할일 뿐인데, 그들의 이야기를 넣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것이 영화였다면, 아마 이 장면을 포함하지 않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요.
두 전령, 아히마아스와 구스 사람의 모습은 단지 ‘사실 전달’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신학적 주제와 깊이 관련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등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이들의 행위는 단지 전달의 기술이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존재의 태도, 진리를 대하는 인간의 방식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이 본문에 대한 우리의 핵심적 물음은 “두 전령은 진리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여주는가?” “그들의 태도는 어떤 믿음을 드러내는가?”입니다.
- 아히마아스
첫 번째 전령은 아히마아스입니다. 그는 제사장 사독의 아들로, 다윗의 충신 중 하나입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반란군에 합류해서 다윗에게 중요한 정보를 전해주는 세작의 역할을 합니다.(삼하15:27, 36). 그만큼 가장 충직하고 믿을만한 다윗의 최측근 인물이지요.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서는 너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하되” 장군 요압은 그에게 전령이 되는 것을 만류합니다. 그래도 그는 한사코 달려가겠다고 자원합니다.
그의 달림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상을 받으려는 것이었을까요. 다윗의 마음을 지키려 한 배려였을까요. 그를 통해 성서는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요. 진리를 전하는 일에도 방식이 중요함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억지로 고집을 피워 앞서 출발한 전령을 앞질러갑니다. 그러나 막상 다윗 앞에서 그는 모든 진실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모습은 진리에 대한 인간의 머뭇거림의 표현일까요. 언제나 믿음 앞에서 확신하지 못하는 인간의 망설임과 두려움 같은 걸까요. 혹인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인간의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요. 도스토옙스키의 말,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진실을 말할 때를 아는 것이다.” 같은 것인가요.
아히마아스는 진실과 그 진실을 깨닫는 고통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초상이 아닐까요. 전령이라는 것은 소식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입니다. 진리가 전달되는 데에는 어떤 과정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의 달림은 단지 신속함이 아니라, 진실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에 관한 인간적·신학적 고민이 포함됩니다. 우리가 진리를 대하는 방식은, 하나님을 경험하고, 구원에 이르는 과정에는 속도도 중요하지만, 그 진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그 진리가 어떻게 내 삶에서 드러날 것인지도 중요합니다. 결국, 그는 침묵을 선택합니다. 그는 말하지 않음으로 다윗의 마음을 지키려 합니다. 아히마아스는 진실과 사랑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즉, 아히마아스는 사랑과 진실, 책임과 신중함 사이에서 갈등하는 신앙인의 내면을 보여줍니다. 그는 믿음의 여정을 걷고 있으나, 아직 말과 행위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못한 상태입니다. 믿음의 길목에 서 있는 전령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구스 사람
성경에서 구스는, 노아의 세 아들 중 함의 아들로 언급되며(창10:6), 일반적으로 아프리카계 민족의 조상으로 간주 됩니다. 민수기 12장에는 모세가 구스 여인과 결혼한 것을 미리암과 아론이 비난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합니다. 구스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보입니다. 또한 예레미야 13:23,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결국, 성경은 거룩하고 유력한 제사장 가문의 사람 아히마아스와 이와는 완전히 대조적인 인물로, 이름도 밝히지 않고 일반적으로 꺼리고 천하게 여겨지는 구스 사람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의도적인 구성임을 알 수 있지요.
“네가 본 것을 왕께 아뢰라 하매 구스 사람이 요압에게 절하고 달음질하여 가니”(삼하18:21) 구스인은 스스로 원한 것이 아닙니다. 달음질의 보상에 대한 언급도 전혀 없습니다. 그저 본 것을 전하러 달려갈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진실을 감추지 않고, 압살롬의 죽음을 담담히 다윗에게 전합니다.
그는 다윗의 반응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말이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감당합니다. 이는 곧 진리를 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믿는 자의 태도, 즉 믿음의 용기입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구스 사람은 이름도 없는, 주변부의 인물이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감당하고, 사람 앞에서 그 진실을 전하는 자입니다. 그의 모습은 믿음이란 진실을 감당하는 용기임을 보여줍니다.
▣ 나가는 말
- 압살롬이 죽다!
“압살롬은 죽었습니다.” 선언은 다윗의 세계를 뒤흔듭니다. 구스 사람의 말은 다윗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안에서 반드시 전해져야 할 회복의 첫걸음이기도 합니다. 진리 앞에서 인간은 산산이 부서져 내리고 맙니다. 하지만, 그 무너짐이 바로 새로운 탄생, 진정한 자유와 해방의 자리이기도 하지요.
“압살롬이 죽었다”는 선언은 인간 조건의 비극이자, 구원을 향한 기도입니다. 그 말은 단지 아들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단절과 사랑과 정의 사이의 균열, 자기 자신과의 해체, 그리고 구속 없는 구원의 불가능성을 고발하는 철학적 선고입니다. 그 철저한 무능력 앞에서 인간은 절규합니다. “압살롬,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그 인간의 절규는 바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의 절규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그 깊은 어둠. 무서운 진실을 온전히 마주하고서야 부활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그리 달콤하고 매력적인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가장 비참한 현실을 깨닫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인인 인간’이라는 의미 아닐까요.
- 두 전령
“말하지 않는 것, 말할 수 없는 것, 그리고 말하고자 하는 욕망, 그 사이에 인간은 존재한다.” 알베르 카뮈의 말입니다. 아히마아스는 바로 이 세 가지 사이에 선 인간입니다. 그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다윗의 감정을 보호하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진실을 유보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한 셈이기도 합니다. 혹은 상을 얻으려는 욕망을 감추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우리도 종종 이 침묵의 윤리, 아히마아스의 자리에 섭니다. 진실을 알고 있으나, 말하지 못합니다. 상처가 두려워 말하지 않고, 오해가 두려워 침묵하며,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진실을 감춥니다. 자신의 작은 이익을 호의로 포장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 침묵은 때로 정의의 유예이자, 회복의 지연이 되기도 합니다.
반면, 이름도 신분도 기록되지 않는 존재, 이방인 구스 사람은 “압살롬은 죽었습니다” 선언합니다. 그는 말하는 자이며, 신 앞에서 진실을 감당하는 자입니다. 말함은 단지 소리의 조합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의 진실을 드러내는 행위이며, 진리를 회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용기 있는 자의 행위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그러나 이 진리는 듣는 자에게 반드시 편안함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때로 자유보다 지독한 고통을 먼저 수반합니다. 철학자 폴 리쾨르는 말합니다. “언어는 단순한 전달이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고 새롭게 여는 사건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은 단지 메시지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세상의 방향을 바꾸는 행위입니다. 그렇기에 복음은 단순한 종교적 정보가 아닙니다. 복음은 새로운 세계, 새로운 존재 방식을 여는 해석의 말입니다. 그 말은 때로 아픔을 드러내야 하고, 죄를 고백하게 하며,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희망과 구원의 세계를 열어젖히게 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다윗과 같이 고통스러운 진실을 마주해야 하며, 그 진리를 전해야 하는 하나님의 전령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령으로서 사명,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어떻게 전하겠느냐?” 우리는 빠르게 달리는 자일 수도 있고, 말의 무게 앞에 멈춰 선 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진리를 말해야 한다는 부르심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 진리의 전령이기를 바랍니다.
진리의 말씀이신 하나님,
당신은 침묵 가운데도 말씀하시고,
우리의 말 없는 기도도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진리의 전령으로 부르셨으니,
우리가 그 놀라운 진리와 그 신비, 그 무게를 감당할 용기를 주시고,
사랑 없는 진실이 되지 않게 하시며,
진실 없는 사랑으로 왜곡되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말, 우리의 존재, 우리의 삶이 이 세계와 사람을 살리며,
우리의 침묵이 생명을 품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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