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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다! (마 11 : 12 – 21)

2025년 9월 28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H5J2kUbd2ic?si=gv1_fhaQviQoDMlC

▣ 들어가는 말

- 물은 없고 오직 바위뿐

194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 1888–1965)은 20세기 가장 중요한 시인 중 한 명입니다. 그의 시 『황무지(The Waste Land, 1922)』는 20세기 초 서구 문학을 대표하는, 모더니즘 시의 정점으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1922년 유럽 사회는 1차 세계대전으로 수많은 이들이 희생되고, 사회적 정신적 가치가 무너져 있던 상황입니다. 과학, 기술, 제도, 종교 모두가 사람들에게 의미와 희망을 주지 못하는 시대였지요. 겉으로 화려한 문명은 내면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황무지』는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마지막 부분 “천둥이 한 말”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Here is no water but only rock

Rock and no water and the sandy road

The road winding above among the mountains

Which are mountains of rock without water

If there were water we should stop and drink

Amongst the rock one cannot stop or think...”

 

“여기에 물은 없고 오직 바위뿐,

물 없는 바위와 모랫길만 이어진다.

산 위로 구불구불 이어진 그 길은,

물 없는 바위산일 뿐.

만약 물이 있다면 우리는 멈추어 마실 텐데,

바위들 가운데서… 아무도 멈출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이 대목은 『황무지』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 곧 생명의 근원(물과 열매) 부재, 영적 황폐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속은 비어 있는 현실이 있습니다. 마실 물이 없는 메마른 사막과 같은 영혼의 상태에서 우리는 잘못된 걸음을 멈출 수도 없고, 삶에 대한 깊은 고뇌와 생각도 있을 수 없지요. 카프카의 『성』은 웅장한 권위를 가지고 우뚝 서 있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실체 없는 허상임을 보여줍니다. 엘리엇은 『황무지』에서 나무는 무성하지만 열매 없는 땅, 생명이 없는 공허함을 노래합니다. 이런 문학적 이미지들은, 오늘 성경 본문의 잎사귀만 가득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떠올리게 합니다.

오늘 우리의 정치 현실도 그렇지 않습니까? 대통령, 국무총리, 대법관 등 지도자들은 누구라도 부러워할 만한 학벌과 경력, 재산 등을 지니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굉장한 권력과 권위, 부와 성취로 무성한 잎사귀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국민이 그들에게 바라고 기대하는 정의와 봉사의 열매는 찾기 어렵지요.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탐욕과 권력 다툼이 자리를 차지하고,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는 공공선을 위한 책임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향해 “기도하는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라고 외치신 그 목소리가, 오늘 우리의 현실에도 울려 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니체는 인간을 “붉어질 줄 아는 존재”라 했습니다.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얼굴이 붉어지기는커녕,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틸리히의 말처럼 믿음은 인간의 본질적 가능성이고, 모든 인간은 궁극적인 것을 향한 태도를 지니지만, 그 궁극성을 하나님이 아닌 권력과 물질에 두면 결국 그 믿음은 파괴적이고 파멸적인 것이 되고 맙니다.

무화과나무와 성전 이야기는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 실존과 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번영의 가도를 달리고 있는 우리의 모습, 높디높은 교회의 뾰족탑은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의 모습은 아닌가? 그 겉모습에 마땅히 기대되는 열매는 무엇인가? 우리의 내면, 영혼은 기도의 집인가? 강도의 소굴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 사회의 공적 공간은 정의와 진실의 집인가, 아니면 탐욕과 부패의 집인가? 바로 이 질문이 오늘 우리가 마주할 말씀의 출발점입니다.

 

▣ 본문의 구조

- ‘저주’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1950년 노벨 문학상의 수상자이자, 수리논리학의 창시자 중 하나이고, 분석철학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기도 한 버트런트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서 “예수는 무화과나무에 아무런 해를 끼칠 이유가 없었음에도 그것을 저주했다. 그 나무는 계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없었다. 이런 행동은 나에게 지혜롭고 자비로운 성인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다.”라며, 예수의 신성, 도덕성 등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성경의 난제 중 하나입니다. 러셀처럼 누군가에겐 예수와 성경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지요. 그리스도인에게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예수가 아무 잘못도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해 말라 죽게 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언젠가 이 사건을 제가 서사적으로 해석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 문학적 구조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무화과나무 이야기 가운데에 성전 정화 사건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액자 구성’ 혹은 ‘샌드위치 구조’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11장 12~14절에 “무화과나무 저주 이야기”가 나오고, 이후 그 저주의 결과가 20~21절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버린 것으로 이어지는데, 그 사이 15~19절에 “성전 정화사건”을 끼워 넣은 것이지요. 문학에서 이런 액자 구성 방식을 사용하는 이유는 바깥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 이야기와 끼워 넣어진 내부 이야기가 주제를 상호 보완하거나 대비하여 주제의 깊이를 더 강하게 전달하려는 것입니다. 외부 이야기(프레임)와 내부 이야기(내용)가 같은 주제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을 보여주어, 독자는 다양한 각도로 진실을 보고 주제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게 되지요.

따라서 오늘 본문은 같은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무화과나무 저주와 성전 정화라는 두 이야기, 두 관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구조는 단순한 사건 나열이 아니라, 두 사건이 서로를 해석하도록 만드는 장치입니다. 액자 안에 있는 이야기 즉, 성전 정화 사건의 의미를 부각하기 위해 무화과나무 저주 이야기로 포장하고 있는 것이지요. 속 내용으로 겉 형식을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무화과나무의 열매 없음은 성전의 불결함, 형식화를 상징하고, 성전 정화 사건은 무화과나무 저주의 실제 의미를 드러내는 중심입니다. 따라서 “무화과나무 저주의 핵심은 성전 정화 사건에 있다”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왜 무화과나무인가?

구약성서에서 무화과나무는 흔히 풍요, 평화, 축복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미 4:4) “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슥 3:10). 전쟁과 억압이 없는 평화와 번영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아울러 출애굽기 3:8에서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민수기 13:23–27 등에서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증거로 포도, 석류, 무화과와 같은 열매들을 정탐꾼이 가지고 와서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하지요.

또한 무화과나무는 구약에서 자주 이스라엘 백성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호9:10) 호세아 9:10에서는 무화과나무의 열매 없음이 곧 하나님의 심판, 은총 상실의 상징으로 쓰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무화과나무가 되게 하였으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정의와 사랑의 열매 대신 불의와 우상을 맺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내가 그들에게서 무화과를 거두려 하였으나 무화과가 없고 잎마저 시들었으니…”(렘 8:13).

따라서 마가복음 11장에서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은 단순히 나무 한 그루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행동은 바로 이 구약의 선지자적 전통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나무를 저주한 것을 단순히 분노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언행위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던 무화과나무가 이제 열매가 없다는 이유로 저주받는 것은, 겉보기에는 풍요롭고 종교적으로도 충만해 보이는 이스라엘 공동체,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실제 열매(정의, 사랑, 신실함)를 맺지 못한 공동체에 대한 강렬한 상징적 심판 선언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 껍데기는 가라

마가는 무화과나무 사건을 성전 정화 사건 사이에 끼워 넣습니다. 이는 성전도 무화과나무와 같다는 선언입니다. 마가가 의도적으로 이 두 사건을 엮음으로써, 무화과나무의 저주는 성전에 대한 심판 메시지로 확장됩니다. 성전은 웅장하고 제사는 끊이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공의와 긍휼의 열매가 없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잎은 무성했지만, 정작 주인이 찾는 열매는 없었습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은 자기 자신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정체성을 잃었고, 무화과나무는 나무의 본래 목적을 잃었습니다. “껍데기는 가라” 절규하던 신동엽 시인의 일갈이 들리는 듯합니다. 알맹이는 썩고 있는데, 화려한 껍데기를 자랑하며 썩은 줄도 알지 못하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절망 아닐까요. 이것이 바로 사랑 많은 이의 엄중한 심판 선언의 이유입니다.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버린 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다가올 심판의 선취(先取)입니다. 아무리 겉이 풍성하고 아름답다 해도 속이 썩은 나무는 반드시 머지않아 뿌리째 말라버릴 것입니다. 니체는 인간을 “붉어질 줄 아는 존재”라 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것,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인간의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사건은 우리에게 “너희도 하나님 앞에서, 심판 앞에서 스스로 돌아보라”라는 경고입니다. 예수 당시 성전은 정치적·경제적 중심지였습니다. 헤롯이 재건한 성전은 웅장했지만, 실제로는 제사장 계급의 권력과 로마 권력의 결탁으로 인해 종교적 부패와 경제적 착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상인들을 내쫓으신 것도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사 56:7)를 왜곡한 현실을 꾸짖으신 행위입니다.

 

- 때가 아니다?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막 11:13) 열매 맺을 철이 아니었다면 왜 예수는 그 나무를 저주했을까요. 이 본문 해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입니다. ‘때’에서 사용한 단어 ‘카이로스’는 단순한 ‘시간’ ‘시기’만이 아니라, “결정적 순간, 하나님의 정한 때”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계절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열매 맺어야 할 ‘때’를 상실한 이스라엘의 상태를 은유하는 표현이지요.

마가가 굳이 “때가 아님이라”라는 설명을 넣은 것은, “때가 아니라고?” 되묻는 하나님, 예수의 되물음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 신의 요구는 언제일까요? 우리는 언제 응답해야 할까요? 신앙은 꾸준하고 성실하고 치밀한 준비를 마치고 마침내 때가 되었을 때 지금까지 쌓아온 역량 전부를 쏟아부어 불꽃같이 자신을 불살라야 하는 것인가요? 이런 식의 고정관념을 깨뜨린 것 아닐까요? 따라서 “때가 아님”이라는 기록은 오히려 “가장 완전한 때”라는 메시지를 강조하는 역설적 장치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요.

만약 단순히 “철이 아니어서 열매가 없었다.”라면, 나무가 저주받을 이유는 없지요. 그래서 학자들은 이 사건을 상징적 행위로 읽습니다. 무화과나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상징이었고(호 9:10, 렘 8:13), “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없음”은 단순한 자연현상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kairos)와 맞물려 있는 신학적 진술로 본다는 것이지요.

즉, 예수님의 행위는 나무 자체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나무를 빌려 이스라엘과 성전을 향한 선지자적 메시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호세아, 미가 같은 구약 선지자들도 “무화과나무에 열매 없음”을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멸망에 대한 상징으로 썼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저주는 자연 생태의 ‘합리성’보다는, 이스라엘 신앙의 실상을 폭로하는 상징 행위로 읽어야 합니다.

 

▣ 나가는 말

- 잎과 열매의 불일치

예수는 멀리서 잎을 보고 “적어도 무언가 있겠지” 기대했지만, 전혀 없었습니다. 이는 “겉모습만 있고 실상은 텅 빈 신앙”의 상징입니다. 즉, 단순히 “열매의 철이 아님”이라서 문제가 아니라, 잎이 무성하다는 외적 신호와 실제의 불일치가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회 속에서 교회의 위상이 높아 보여도, 실제로 세상 속에서 사랑의 열매, 정의의 열매, 평화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우리는 본문 속 무화과나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믿으라”(막 11:22) 하신 말씀은 단순히 교리에 동의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열매 맺는 삶으로 나아가라는 초대입니다.

시몬 베유는 “진리의 열매는 고통 속에서 맺어진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삶의 고난 속에서, 인간관계의 갈등 속에서, 사회적 불의 속에서 열매를 맺을 때 비로소 진정한 신앙이 됩니다.

 

- 때가 아니라 열매의 문제다!

본문에서 “때가 아님이라”라는 말 때문에 해석이 꼬이기 쉽지만, 마가가 강조하는 초점은 계절적 때가 아니라 열매의 유무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잎이 무성하므로 멀리서 볼 때 풍요로워 보였지만, 가까이 가보니 열매가 없었습니다(막 11:13). 즉, “언제냐”보다 “있느냐 없느냐”가 본문의 핵심입니다. “때가 아니므로 괜찮다”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삶의 전 시기, 모든 상황에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 메시지입니다. 신앙의 열매란 곧 사랑, 정의, 용서, 화해, 겸손입니다. 이는 어떤 ‘계절’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삶 전체에서 나타나야 할 열매입니다.

 

- 성전을 깨끗이 하다

예언자적 전통 속에서 성전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 기도의 집, 언약 공동체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의 행동을 통해, 성전이 그 본래의 의미를 잃고 거래·이익·권력의 장소로 변질되었음을 고발합니다.

이를 개인 실존 차원으로 확장하면, 성전은 인간 존재 자체, 곧 하나님을 향한 내적 공간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 공간은 “기도하는 집”(우러름, 신 앞에서의 투명성)을 상실하고, 대신 “돈 바꾸는 자, 파는 자”(이익, 물질, 자기 계산)에 점령되어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읽으면 예수의 성전 정화는 곧 인간 실존의 정화를 촉구하는 사건이 됩니다.

우리의 영혼이 언제나 ‘기도하는’ 모습이기를, 그렇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의 신앙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되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과 공의, 긍휼과 화해의 열매가 맺히게 하소서.

교회가 겉모습의 화려함이 아니라, 진정한 열매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게 하소서.

언제나 주님 앞에 서서 스스로 성찰하게 하시고,

주님의 은혜로 다시 열매 맺는 나무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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