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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무화과 나무와 하늘

 

무화과나무와 하늘

(요 1:43-51)


지난 11월 말에 저희 가족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수리했습니다. 다른 곳에 있던 저의 서재를 아파트로 옮겨야했기 때문입니다. 제 서재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장관입니다. 팔공산 능선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태양이 순식간에 그 뒤로 숨으면 하늘은 주황색으로 도배가 됩니다. 제가 집사람에게 우리 아파트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말을 건넸습니다. ‘청구’가 아니라 ‘일몰이 아름다운 아파트’라고 말입니다. 집사람은 이 아파트에서 12년째 살면서 이렇게 멋있는 일몰을 처음 보았다고 하더군요. 그게 이상하지 않나요? 왜 그게 안 보이다가 보이게 되었을까요? 아파트 창호를 좋은 것으로 바꿨으니 시야가 넓어진 탓일까요? 아니면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겼다가 이제 겨우 여유를 찾은 걸까요.

무엇을 보거나 보지 못하는 현상은 이상한 게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그런 일은 늘 일어납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을 많이 했을 겁니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일말입니다. 젊은 엄마들이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풍경이 눈에 안 보이다가 본인이 아기를 낳게 되는 입장이 되니까 눈에 들어옵니다. 보도블록 사이를 비집고 올라오는 잡초를 평소에 눈길 한번 주지 않다가 어느 순간에 그것이 황홀한 환희로 다가옵니다. 시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은 언어의 세계를 볼 것이며, 작곡가들은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소리를 듣고 볼 겁니다. 세상을 이렇게 서로 다르게 경험하는 이유는 보거나 듣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도 이런 일들은 그대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통치가 눈에 들어오고, 어떤 사람에게는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것을 볼 줄 아는 게 바로 영성입니다. 그런 영성이 없을 때 기복주의에 빠지거나 교회성장주의나 물량주의에 빠집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 사건을 볼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것에 대한 뾰족한 답변을 모릅니다. 그것은 저의 능력을 벗어납니다. 다만 성서가 그것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여러분에게 전달할 수 있을 뿐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의 나다나엘

  

오늘 설교의 본문인 요 1:34-51절에는 나다나엘과 예수님의 대화가 나옵니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따라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늘이 열린다거나,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한다는 말이나 그것을 본다는 말은 마치 선문답처럼 들립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런 선문답이 많습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인 요 3:1-21절이나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인 요 4:1-42절도 그렇습니다. 이런 대화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솔직한 사람입니다. 그걸 잘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거나, 아니면 아전인수에 빠졌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의 영적 경지를 확보한 사람이겠지요. 본문을 보실까요?

본문에는 ‘본다’는 단어가 키워드로 작용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하자 나다나엘은 전형적인 냉소주의적 태도를 보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고 말합니다. 나다나엘이 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예수님이 자기를 “보았다”는 말씀을 듣고 나다나엘은 놀랍니다. 예수님은 다시 그에게 더 큰 일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더 큰 일은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로 오르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볼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말 개역개정에는 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본다’는 단어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데리고 오기 전에 이미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그 옆을 지나가다 그를 우연하게 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건 하나도 놀랄만한 사건이 아닙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 1:49) 하나님의 아들이나 이스라엘의 임금이나 거의 똑같은 뜻입니다. 임금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바실리우스’인데,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바실레이아’와 비슷한 단어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것입니다.

이 나다나엘이 누군지는 성서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제자들의 소명에 관한 보도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나다나엘은 열두 제자에 속합니다. 바로 앞대목인 요 1:35-42절은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그의 형제인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도합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 빌립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안드레가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듯이 나다나엘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당연히 열두 제자로 보입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안드레, 베드로, 빌립은 열두 제자에 속하지만, 나다나엘은 그렇지 못합니다. 나다나엘을 공관복음의 바돌로매(마 10:3)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정확한 건 아닙니다. 그는 요한복음에만 등장합니다. 위 설교 본문과 부활의 주님이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는 장면인 21:2절입니다. 그는 예수님 공생애의 시작과 끝에 등장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구원 사건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현장에 있었던 사람인 셈입니다.

요한복음 기자의 설명에 따르면 나다나엘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마음에 간사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라는 사실을 다른 어느 누구보다 먼저 알았습니다. 그는 무화과나무 사건이 메시아에게만 가능한 초자연적 능력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아보았고, 그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빌립이 “와서 보라.”고 한 바로 그 예수님을 정확하게 보았습니다.

우리도 나다나엘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특별한 일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 일이 무엇인지는 복음서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증거하고 있으며, 서신서가 간접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많은 민중들을 만났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배고픈 자를 먹이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악한 귀신이 쫓겨났으며, 죄인들의 죄가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예수님의 메시아성에 대한 증거들입니다. 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서 당신이 메시아인가,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요한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마 11:5) 복음서의 이런 증언이 말하려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구원이 발생했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은 바로 메시아의 일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런 일들을 행하는 이들이 많긴 합니다. 이런 일들은 단순히 종교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명의가 사람의 병을 고친다면 그것도 역시 메시아의 일입니다. 어떤 사업가나 정치가가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주었다면 그것도 역시 구원과 연관됩니다. 이런 일은 어떤 특정한 인물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행할 수 있으며, 마땅히 행해야 할 것들입니다. 우리도 구원의 역사에 동참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대목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사람은 모택동을 메시아로, 전태일을 메시아로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작은 예수, 작은 그리스도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런 주장에 대해서 원칙적으로 동의합니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예수님은 분명히 민중들의 삶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마 11:5절의 세례 요한과 연관된 사건만이 아니라 눅 4:18, 19절도 역시 예수님의 그런 정체성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사람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입니다. 복음은 민중해방, 정의와 평화 운동과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개인과 사회를 하나님의 통치라는 관점으로 보셨습니다. 그의 삶과 운명은 분명히 메시아의 일이었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던 나다나엘은 바로 그것을 본 것입니다. 요한 공동체가 바로 나다나엘을 통해서 그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천사


복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만약 거기서 끝난다면 그것처럼 허망한 것도 없을 겁니다. 무화과나무의 기적과 혁명이 여기서 경험할 수 있는 메시아의 증거이기는 하나 궁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증거들입니다. 더 큰 것이 있습니다. 더 근본적인 것들, 더 본질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무화과나무 사건보다 더 큰 것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큰 것 앞에서 작은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메시아적 흔적들은 작은 것들입니다. 그런 흔적을 통해서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더 큰 것입니다.

요한은 그것을 두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하나는 하늘이 열린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즉 마지막 때 세상을 구원하러 올 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오늘 우리는 당황스럽습니다. 도대체 하늘이 어떻게 열린다는 말인지요. 하늘이 닫혀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지요. 요즘의 우주 물리학에 대해서 초보적인 정보만 알고 있어도 하늘이 열린다는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 겁니다. 하늘은 닫히거나 열리는 게 아니라 그냥 저렇게 존재하는 공간이니까요. 성서 언어를 물리학의 언어로 읽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시적 언어로 읽어야 합니다. 꽃에 이름을 붙이기 전에는 하나의 사물,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지만 이름을 불러주자 꽃이 되었다는 시인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성서 언어에서 하늘은 어떤 물리적 공간이라기보다는 영적 사건을 가리킵니다. 신학적 개념으로 말한다면, 궁극적 생명이 은폐된 자리입니다. 아직은 숨어 있지만 언젠가는 드러나게 될 그 생명의 원천입니다. 꽃봉오리와 같습니다. 거기에는 꽃이 숨어 있지만 아직 꽃을 피우지는 않았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하늘은 묵시적이고 종말론적인 생명 사건입니다. 

마태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체포당하신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저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 유대교를 대표하는 당대의 거물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심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대제사장이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하고 말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당신이 말한 그대로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 64) 초기 기독교의 전승에 따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뒤 부활하시고, 구름을 타고 승천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런 방식으로 다시 오신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이 모두 하늘이 열린다는 말과 연결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궁극적인, 그러나 아직은 은폐된 생명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이 열리는 사건입니다. 우주론적 생명의 시작이며 완성입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고백했으며(요 11:25), 예수님을 본 자는 바로 아버지를 본 자라고 생각했습니다.(요 14:9) 이런 고백은 요한복음 공동체만이 아닙니다. 초기의 모든 기독교 공동체에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위격은 구별되지만 본질이 동일하다고(호모우시오스)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나게 될 이 궁극적인, 그러나 아직은 은폐된 생명은 미래의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도 나다나엘이 그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일은 앞으로 일어납니다. 은폐된 궁극적 생명이 우리에게 오고 있습니다. 완성된 생명이 바로 문 앞에 당도해 있습니다. 바로 내일이라도 그것이 현실성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다가왔다고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바실레이아 투 데오)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런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민중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제공하셨다는 사실은 이해하기 쉽지만 생명을 앞으로 완성하실 거라는 사실은, 즉 더 큰 일은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겠군요. 우리에게 닥쳐야만 알 수 있는 그 세계를, 이전의 모든 역사과정을 통해서도 계산이 가능하지 않은 그 세계를 우리가 무슨 수로 예측하고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약속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나다나엘도 더 큰 일을 이미 본 것이 아니라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미래이며, 약속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더 큰 일을 기다라고 있습니다.

여러분,그 약속이 지금 당장 우리 손에 잡히지 않았다고 해서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약속은 허망하게 아닙니다. 그의 삶과 그의 운명으로 보증된 것입니다. 그의 부활로 그의 약속이 분명하다는 사실은 확정되었습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볼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직 오지 않은 더 큰 일에 대한 희망을 이미 와 있는 작은 일과 일치해서 살아가는 일입니다. 무화과나무에서 하늘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과 그 약속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 땅의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을 볼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는 걸,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볼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언어도 사라지고, 욕망도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의 생명만이 태양빛처럼 우리의 모든 존재를 사로잡을 것입니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궁극적인 미래입니다. (2009.1.18.)

요한복음 1: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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