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구원
(합 1:1-4, 2:1-4), 10월31일, 성령강림절 후 23째 주일
영혼의 목마름
하박국 선지자는 기원전 625년과 587년 사이의 어느 한 기간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기원전 6세기 가나안에 자리하고 있던 유대라는 나라는 매우 위태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587년은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된 해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모든 값진 집기는 강탈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고대인들의 전쟁을 상상해보십시오. 패전국은 그야말로 완전히 쑥대밭이 됩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10년 전에도 이미 바벨론 군대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조공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유대 왕조가 망하는 걸 피할 수 있었습니다. 요시아 왕의 개혁으로 반짝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요시아가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죽은 뒤로 유다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하박국이 살던 시대는 유다의 역사에서 가장 처참한 시절이었습니다.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운명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전하던 선지자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하박국은 이렇게 자신의 심정을 표현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합 1:2) 이어서 3절에서는 겁탈과 강포가 극심하다고 했으며, 4절에서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서 정의가 왜곡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태를 하박국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는 세상에 정의를 세우는 분입니다. 악인을 멸하시고 의인을 세우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박국 선지자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이런 하나님의 능력과는 반대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민족에 의해서 조롱받고 능멸 받습니다. 악인이 의인을 꼼짝 못하게 하는 상황입니다. 1:13절에서 하박국은 노골적으로 이렇게 따집니다.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아무리 외쳐도 하나님의 구원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박국은 이런 상황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구원을 목말라 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영혼의 목마름을 절감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영혼의 목마름은 자신의 개인적인 삶이 충족되었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고아들이 아무리 좋은 생활 조건에서 살아도 공허를 채울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영혼의 목마름은 하나님과의 일치에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경험하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역사에 하나님의 정의가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에 대한 열망이 강렬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면 당연히 정의가, 진리가 불처럼 드러나야 하는데, 오히려 불의와 거짓이 활개 치는 사실을 못 견뎌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선지자들의 이런 심정에 동의는 해도 함께 하지는 않습니다. 교회의 개혁에 대해서도 동의하지만 함께 참여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진리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전 세계 개신교회가 지키는 종교개혁 493주년 기념주일입니다. 루터는 1517년 10월31일에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 위에 95개 조항의 신학 명제를 적은 대자보를 붙였습니다. 그것은 사소해보이지만 기독교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습니다. 루터도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겠지요. 그러나 그는 좌고우면 없이 오직 진리에 서서 당시 황제와 더불어 유럽의 실권을 쥐고 있던 교황 체제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 핵심적으로는 면죄부와 교황무오설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면죄부와 교황무오설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감히 공론화하지는 못했습니다. 교황체제의 권위에 대항할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불편하게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개신교회는 종교개혁 주일을 맞을 때마다 루터의 개혁정신을 외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데에 머물지 루터가 말하는 개혁영성을 이어가지는 못합니다. 개혁에 동참하지도 않습니다. 오늘 한국에서 개혁을 외치는 교회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증거입니다. ‘개혁, 좋지만 너희만 해라, 나는 불편한 게 싫고, 그냥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신앙생활 하겠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를 알고 있는 의식 있는 기독교인들도 개인적으로 교회에 대한 불평만 터뜨릴 뿐이지 새로운 개혁세력에 합류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흐름이라면 제2의 종교개혁은 요원합니다.
묵시의 때
타는 목마름으로 하박국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의 심정입니다.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여호와 하나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3절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묵시의 때, 즉 종말의 때는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때를 가리킵니다. 그 때에 악은 완전히 제거되고 의가 완전히 드러납니다. 이 세상에는 더 이상 겁탈과 강포가 자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이 끝나는 순간입니다.
여기서 하박국이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대답의 핵심은 묵시의 때가 ‘속히’ 이른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박국의 고유한 영적 통찰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의 영적 통찰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박국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 답답한 현실에서 살았습니다. 세상이 뒤죽박죽입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의 응답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은 하나님의 묵시가 곧 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겉으로는 더디게 보이지만 기다리면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한다는 대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상태도 하박국과 비슷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약속을 믿고 기다렸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지체되고 있었습니다.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들은 당황스러워했습니다. 불안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마치 예고하지 않는 중에 들어오는 도적처럼 임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로는 아무런 징조가 없는 것 같지만, 재림이 계속해서 지연되는 것 같지만 속히 일어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그들은 고단한 신앙생활을 지켜나갔습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도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을 심판하고 완성하실 예수님의 재림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예수님이 재림하지 않으셨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속히 재림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이런 주장이 말이 될까요?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이해하려면 시간을 새로운 차원에서 경험해야만 합니다. 그 하나님의 시간은 단순히 숫자와 사건이 나열되는 ‘크로노스’가 아니라 생명이 해석되고 계시가 드러나는 ‘카이로스’입니다. 묵시의 때가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그 하나님의 시간에서는 하루가 천 날이고, 천 날이 하루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간이 실감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건 그냥 철학적인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시간에서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살아온 지난 세월이 각각 있을 겁니다. 20년, 30년, 70년입니다. 70년은 20년보다 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친밀감이라는 차원으로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50년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깊이 경험한 시간만 본다면 5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그 시간은 더 짧아질 수 있습니다. 이런 시간에서 본다면 단순히 1백년, 또는 1천년이라는 시간은 그렇게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 2천년도 한 순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실제의 모습을 얻게 될 때에 지난 우리의 삶이 꿈처럼 한 순간이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시간은 신비롭습니다.
시간이 아무리 신비롭다고 하더라도 일상에서는 그런 영적 통찰력만 갖고 살기 힘들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사람들은 당장 배고프고, 돈 벌어야 하고, 배신당하기도 하고, 행복한 조건을 찾는데 힘을 쏟습니다. 또한 정의가 당장 실현되어야 합니다. 악이 파멸되는 걸 확인하고 싶습니다. 이런 일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묵시의 때가 속히 이른다는 말은 너무 멀게 느껴집니다. 공허하기도 합니다. 기다리다가 모두 지칩니다. 그래서 대개는 현실에 타협하면서 적당하게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분들을 저는 이해합니다. 저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입니다. 한국교회와 사회가 과연 하나님의 정의로 새로워질지 의심스럽게 생각될 때도 많습니다. 공연히 이런 운동에 나섰다가 손해만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합니다. 패배주의와 냉소주의에 빠집니다.
하박국도 왜 이런 유혹을 받지 않았겠습니까? 성서는 하박국이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면서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묵시의 때를 기다렸다고 하지만, 그 이면에는 온갖 갈등과 불안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 갈등과 불안이 하나님을 향한 질문으로 나타났습니다. 왜 구원하지 않습니까? 왜 잠잠하십니까? 우리가 어떻게 이 현실을 견뎌내라는 말입니까? 욥의 아내는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고 있는 욥을 향해서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외칩니다.(욥 2:9) 그 어디에도 빛이 들어올 것 같지 않은 암담한 현실 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그의 통치, 그의 계시에서 한 발 빼는 게 좋겠다는 유혹을 받습니다. 여기서 예외인 사람은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외쳤겠습니까?
믿음으로 살리라
하박국은 영적인 미로에서 바른 길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신구약 전체 사상을 총괄하는 다음과 같은 문장입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b) 여기서 믿음은 묵시의 때, 즉 구원의 때가 속히 온다는 사실에 운명을 거는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가리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했습니다. 이 믿음이 바로 하박국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묵시의 때를, 즉 보이지 않는 구원의 때를 실제로 기다리고 바랄 수 있습니다. 믿음은 그것을 실질로 경험하게 하고 확실한 증거로 경험하게 합니다. 그런 경험에서만 사람은 삽니다. 아무리 암담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구원의 불빛을 본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문장을 인용해서 복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믿음이 구원의 근거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죽습니다.
마틴 루터의 3대 신학명제 중의 하나는 ‘솔라 피데’(오직 믿음)입니다. 하박국의 믿음에 대한 영적 통찰이 신약의 바울을 거쳐 루터에게까지 연속되었습니다. 루터는 칭의 문제에서 로마가톨릭과 부딪쳤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믿음과 더불어 행위가 의의 토대라고 주장했고, 루터는 여기서 업적을 빼놓고 오직 믿음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루터가 인간의 행위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행위가 칭의의 근거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루터는 하박국과 바울의 영적 시각을 정확하게 해석했습니다. 의로움의 주도권이 오직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뚫어본 것입니다. 그것은 곧 묵시의 때가 우리 인간의 시간계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계산에 따라서 임한다는 뜻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에게 의존할 때만, 그것이 바로 믿음인데, 인간은 의로움을, 즉 구원을 얻습니다.
하박국은 민족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임하는 때를 믿음으로 기다리며 산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정확하게 모른 채 진리를 선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묵시의 실현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인 카이로스입니다. 궁극적인 세계 완성의 약속입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삽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난폭하고 허무하고 상투적인 이 세상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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