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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믿음은 가능한가?

mms://wm-001.cafe24.com/dbia/070506.MP32007.05.06. 마 17:14-20
믿음은 가능한가?

교회 생활에서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는 것은 ‘믿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믿음으로 이겨내세요.”라거나, 교회생활을 등한히 할 때 “믿음이 없어서 그래요.”, 또는 성서나 교회의 가르침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 “믿음의 눈으로 보세요.” 같은 말을 흔히 합니다. 반대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교회생활을 굳건히 하면 “저분은 믿음이 좋아.”하고 말합니다. 설교자들도 “믿습니까?” 하는 말을 자주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대개의 신자들은 실제로 믿음이 없으면서도 믿음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거나 또는 자신의 믿음이 약하다는 사실을 불안하게 생각하고, 더 나아가 자신을 탓하기 까지 합니다.
이런 현상은 로마 가톨릭교회보다 개신교회가 더 강합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명제가 신앙생활의 중심축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기독교 신자들이 믿음과 더불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고 가르치지만 개신교회는 오직 믿음으로만 그렇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 영향으로 인해서 교회는 모든 걸 믿음의 문제로 처리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서도 물론 믿음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서술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3:2b에서 “산을 옮길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하고 고백하긴 했지만, 그래도 바울에게 믿음은 희망, 사랑과 더불어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시기도 했고(막 2:5),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하고 대답한 가나안 여자를 향해서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고 말씀하셨고(마 15:28), 혈루증을 앓던 여자를 향해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는 말씀도(마 9:22) 하셨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말씀은 믿음을 강조하는 복음서 보도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무릎을 꿇고 간질병에 걸린 자기 아들을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이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 이 세대가 왜 이다지도 믿으려 하지 않고 비뚤어졌을까? 내가 언제까지나 너희와 함께 살며 이 성화를 받아야 한단 말이냐? 그 아이를 나에게 데려오너라.”(17절) 성서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이 마귀에게 호령을 하시자 마귀가 나가고 아이의 몸은 치료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왜 자기들은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믿음을 세 번이나 강조했습니다. 왜 믿으려고 하지 않느냐? 믿음이 약한 탓이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 못할 일은 하나도 없다. 과연 이 말씀이 옳은가요? 간질병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모든 문제가 믿음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요? 만약 이 말씀이 사실적인 증언이라고 한다면 기독교인들은 병원에 출입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의처증이나 구타 등으로 가족을 괴롭히는 남편도 정상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남북분단도 믿음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참으로 이상합니다. 세계에서 믿음이 가장 뜨거운 한국교회가 그렇게 많은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도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엄청난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처럼 기도원이 많고 새벽기도가 열정적인 나라는 그 어디에도 없는데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심지어 믿음만 있으면 산을 옮길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믿음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문법에서도 과장법이라는 게 있듯이 말입니다. 믿음을 겨자씨로 비유하고, 그 능력을 산으로 비유한 걸 보면 과장법이 맞긴 맞습니다. 그렇지만 성서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도 그렇고, 종말 사건에 대한 요한계시록의 묵시사상도 그렇습니다. 그런 성서의 진술들은 훨씬 근원적인 하나님의 통치와 세계와 능력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산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말은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심층적인 차원에서 진리입니다. 지질학적으로도 옳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대로 지구의 표층은 계속 움직입니다. 산이 바다가 되기도 하고, 바다가 산이 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은 말씀으로 지구의 모양을 바꿀 수도 있고, 우주의 운행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산을 바다로 옮기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어도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우리의 믿음이 확실하기만 하다면 하나님처럼 우리가 창조자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래서 간질병도 고치고, 귀신도 내쫓고, 인간의 모든 고통스러운 문제를 해결하고, 산을 바다로 옮길 수 있을까요? 이런 모든 문제들이 실제로 우리의 믿음에 달려 있다는 말인가요?
한국교회는 믿음 지상주의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늘 ‘믿습니다.’를 입에 달고 삽니다. 그냥 믿습니다가 아니라 된소리로 ‘믿쒸-ㅂ니다!’ 해야겠지요. 예컨대 그럴 능력이 없는데도 믿음을 면분으로 내세워 무리하게 수백억 원의 교회당을 건축합니다. 믿음으로 병을 고치겠다고 우기다가 환자의 치료시기를 놓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강조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믿음이 없다는 의미인지 모르겠군요. 이미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굳이 믿음을 입에 떠올릴 필요도 없으니까요.
많은 신자들이 착각하는 게 있습니다. 자기 확신을 믿음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확신은 어디서나 가능한 심리현상입니다. 벤처기업을 하는 사람도 자기 확신이 있고, 스토킹 하는 사람도 자기 확신이 있습니다. 공산주의자와 사이비 이단들도 그 확신이 강합니다. 요즘 신입사원 훈련 프로그램도 이런 자기 확신을 자주 이용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만, 교회 안에서 아무리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산을 바다로 옮기게 하는 기도는 드리지 못하더군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다면 못할 일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요?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하게 보십시오. 특히 병행구인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세 복음서가 이 사건에 대해서 약간씩 다르게 보도합니다. 예수님의 간질병 치유 능력에 대해서 마가복음은 “기도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을 쫓아낼 수 없다.”(9:29)고 진술하며, 누가복음은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 놀라 마지않았다.”(눅 9:43)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에 대해서 보도합니다. 이 세 복음서의 공통점은 간질병 아이를 예수님만 치유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분이시며, 그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하는 분이시고, 그만이 믿음이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참되게 믿은 분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으로 인해서 그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에게서만 간질병 아이가 치유되며, 귀신이 쫓겨나고, 궁극적으로 그에게만 부활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곧 믿음의 능력이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믿음은 가능한가?”였습니다. 그 질문을 우리에게 하면, 대답은 “가능하지 않다.”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의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간질병 아이가 깨끗해지고, 산이 바다가 되는 능력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능력입니다. 하나님과 일치되지 않은 사람은 이런 능력을 나타낼 수 없으며,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셨다는 게 사실이라면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를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전체 실존으로 믿은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의 삶에서 그런 믿음의 능력이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으로 믿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그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믿음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니 믿으려고 해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줄 모릅니다. 간질병 아이를 직접 고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런 기도를 드릴 능력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자들은 자기가 믿음으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확신에 빠집니다. 그렇다면 산을 옮겨보십시오. 그건 못하면서 간질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믿음의 능력은 창조자 하나님의 능력이며, 그의 아들인 예수님의 능력일 뿐입니다.
이렇게 설명해도 그걸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여의도 순복음 교회 아무개 목사로 대표되는 분들은 자신이 스스로 귀신을 내어 쫓고 장애를 고친다고 큰소리치는 실정이니 일반 신자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당연합니다. 좋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런 일들은 교회만이 아니라 다른 데서도 일어납니다. 그런 것들은 자연치유일 수도 있고, 많은 경우에는 대중심리에 빠져서 일어나는 임시효과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치유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아무개 목사의 능력이 아니라 생명의 영이신 성령의 능력일 뿐입니다.
다시 오늘 설교의 제목을 빌려 묻습니다. “믿음은 가능한가?” 앞에서 저는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이제는 거꾸로 가능하다고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질병을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산을 바다에 던질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창조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즉 내 능력을 믿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습니다.
성경 구절을 약간 아시는 분들은 여기서 빌립보 4:14절 말씀을 기억하실지 모르겠군요.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구절에 기대서 많은 신자들은 믿는 자에게 불가능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선교기금을 보내준 것에 대해서 감사의 말을 전하면서 경제적으로 넉넉하거나 부족하거나 어떤 상태에서도 견딜 수 있다는 영적인 사실을 말하는 것이지 믿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신감을 토로하는 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여러분이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 당시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복음서와 사도들의 편지가 기록되던 시절은 기독교가 아직 체계를 잡지 못했던 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유대교 안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려고 했습니다. ‘유대교적 기독교’라고 불리는 그런 시기가 오래 지속되었는데, 마태 공동체 안에도 이런 혼란한 상황이 완전히 씻기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예수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리는 중입니다. 창조자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고 말입니다. 바로 그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당연하고, 더 나아가 큰 능력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가 힘든 일입니다. 그것은 산을 바다로 옮기는 것만큼 힘든 일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요셉의 아들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고 믿을 수 있나요? 초기 기독교 신자들과 달리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그리고 다행입니다. 그러나 말과 생각만 그렇지 실제로는 자기 확신 속에 빠지거나 자기 능력을 믿으며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마태는 오늘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 이 세대가 왜 이다지도 믿으려 하지 않고 비뚤어졌을까?” 간질병 아이는 그 당시의 교회 공동체를 비유적으로 가리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은 무능력했습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가 되신 예수님에게만 창조와 치유의 능력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실을, 그 예수를 믿습니다. 거기서 비로소 우리에게 믿음은 현실이 됩니다.
마태복음 17: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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