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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믿음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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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2.17 로마서 4:1-5, 13-17

신구약성서에서 아브라함만큼 유명세를 탄 인물은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님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그 당시 주변의 민족들과 처음부터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아예 처음부터 그 씨가 다르다고 말입니다. 창세기를 그대로 따른다고 하더라도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유역인 갈대아 우르 출신입니다. 그곳은 바빌로니아 문명의 발생지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데라의 세 아들 중의 하나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그는 북서부 지역인 하란으로 이민을 왔고, 그곳에서 아버지가 죽자 아내 사래와 함께 조카 롯을 데리고 남쪽 지역인 팔레스틴으로 내려와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담과 이브를 통해서 시작된 인류의 여러 후손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의 후손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교들이나 이슬람교도들만이 아니라 혈통적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우리는 오늘 설교의 본문인 로마서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적 정체성을 제시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주장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 당시의 교회가 처한 상황을 조금 살펴야 합니다.
바울이 편지를 쓰던 당시의 초기 기독교는 유대-기독교와 투쟁 중이었습니다. 유대-기독교는 유대교의 신앙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신앙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동생이 활동하던 예루살렘 공동체가 그 중심입니다. 그들은 예순님을 믿는다는 점에서 기독교인들이긴 하지만 여전히 토라와 할례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대교인들이기도 합니다. 이에 반해서 바울은 토라와 할례가 없는 기독교 신앙을 주창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두 가지 점에서 약간 혼란스러울 겁니다. 첫째는 유대-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서도 여전히 유대교의 종교적 특성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초기 기독교에서 사도들과 바울 사이에 신앙적 갈등이 심각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두 가지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이런 초기 기독교의 상황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바로 이런 상황의 연장선상에서 기록된 것입니다. 바울은 초기 기독교 안에 여전히 율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반격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는데 아브라함만큼 적절한 예를 찾기 힘들었을 겁니다.

아브라함의 의
바울은 창세기 15:6절을 이렇게 인용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롬 4:3) 어떤 사람은 이런 성서의 진술을 너무 상투적이고 시시한 이야기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이 문장은 두 가지 점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고대인들에게 이 의로움은 곧 구원이라는 말과 똑같았습니다. 사람은 의롭지 못함으로 인해서, 즉 죄로 인해서 참된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죽음도 바로 죄의 결과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얻으려면, 죽음을 넘어서서 영생에 이르려면 당연히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바로 의로워진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것은 그가 참된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졌다는 뜻입니다.
둘째,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받은 이유가 바로 믿음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롬 4:1-5절에서 바로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여기서의 믿음은 공로와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바울의 설명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의롭다고 인정받을 공로가 없습니다. 그럴 자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단한 인물처럼 알려져 있지만 그렇게 뛰어난 인물은 아닙니다. 성격적으로 우유부단하고, 소심하기도 했습니다. 아내 사라와 아내의 몸종인 하갈 사이에서 처신을 잘못해서 가정의 평화를 깨기도 했고, 신상이 위태하다고 해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적도 있습니다. 그의 처신만 보면 의롭다고 인정받을 게 별로 없습니다. 물론 그가 조카 롯에게 땅을 양보했다거나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등, 모범적인 면모가 보이긴 했지만, 그런 거야 어느 정도 준비가 된 사람이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행동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을 정도의 공로는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그의 믿음입니다. 창세기 15:6절이 말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무엇일까요? 어느 날 야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어 큰 상을 내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심정은 답답했습니다. 그 당시에 그에게는 가문을 이을 자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소연을 들은 하나님은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면서 자손이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기자는 이 말씀에 이어서 곧 아브라함이 야훼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 믿음이 결국은 자손이 많아질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일까요?
아브라함이 살던 고대인들은 후손에 대한 열망이 아주 강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보세요. 그는 아버지 데라를 따라서 오래 전에 고국을 떠나서 이제 팔레스틴 땅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교포와 비교하면 되겠군요. 몇 십 년 동안 고생하면서 돈은 모았지만 자식이 하나도 없습니다. 고국을 떠난 걸 후회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진다는 말씀을 들었으니, 아브라함이 얼마나 기뻐했을는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는 자식을 믿은 게 아니라 야훼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게 그거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약속)을 믿는 것은 똑같으니까요. 그러나 조금 엄밀하게 볼 때 아브라함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훗날 얻은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야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만약 자식을 믿었다면 그는 그런 명령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을 겁니다. 아브라함은 오직 야훼 하나님만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은 근거입니다.
야훼 하나님만을 믿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도대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는다는 것인가요?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다 알지 못하는데, 누구를 믿는다는 건가요? 여기서 자칫하면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모든 삶의 현실들과 무게를 포기하고 신앙생활에만 몰두하는 광신도가 될 수 있습니다. 성서가 가르치는 믿음은 그것만 따로 떼어놓고 이해하면 안 됩니다. 거기에는 어떤 상황이 놓여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예로 든 바울의 경우에 그것은 율법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실천하는 것이 곧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걸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율법의 실천은 사람을 성실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율법의 알짬인 십계명만 해도 그렇습니다. 십계명대로 따라 살기만 한다면 그건 곧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길이라고 생각할 만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바로 그 율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누가 옳습니까? 그 당시 기독교의 주류라 할 수 있는 유대-기독교인들이 바울과 대립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율법은 우리가 극복하기 어려운 실체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아주 실용적이고 구체적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의 주장을 오늘 우리의 삶과 비교해보세요. 오늘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교회의 모든 행사들이 바로 이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바울은 오늘 이렇게 말할 겁니다. 교회 성장은 복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 것을 교회의 중요한 목표로 삼는 것은 복음의 왜곡이라고 말입니다. 아마 바울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일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이건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은 성공, 부자가 되는 것에만 모든 가치를 걸어두고 있습니다. 아무도 이런 것을 반대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성공은 하나님의 뜻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신앙과 삶의 토대를 전혀 새롭게 설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루는 공로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에 집중하라는 요구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자기공로, 자기업적, 자기집중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집중하는 것이 곧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믿음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람이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 높은 점수를 주는 학교 선생님이 아닙니다. 착한 일 하면 사탕 하나 씩 주는 부모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많이 기울여도 그것으로 하나님에게 점수를 딸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평가 기준은 우리의 예상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훗날 여러분이 마지막 심판을 받을 때 그 결과를 보고 놀랄 것입니다. 칭찬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책망을 듣고, 책망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칭찬을 듣게 될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에게 점수를 딸 수는 없습니다.

오직 은총
혹시 이런 설명 앞에서, 막막하다, 우리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냐, 하고 불안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렇게 생각했다면 저의 설교를 오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능력이 있느냐, 공로가 있느냐 하는 방식으로 평가를 받으면서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런 방식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무엇을 얼마나 잘해야 하는가?” 하는 그런 생각 자체를 버리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하시는가?”에 대해서만 관심을 집중해보세요.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으며, 구원받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공로는 하잘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공로 없이 우리를 인정하고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베푸시며 ...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들에게 그 약속을 보장해주십니다.”(16절) 이런 점에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sola gratia Dei)이라는 마틴 루터의 가르침도 옳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가 얼마나 엄중한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법이 없으면 법을 어기는 일도 없게 됩니다. 법이 있으면 법을 어기게 되어 하느님의 진노를 사게 마렵니다.” 율법을 안고 가면 결국 그 율법으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어떤 노력과 공로로 생각하는 한 그것으로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이에 반해 바울은 법 자체를 부정합니다. 아주 극단적입니다. 오해는 마세요. 사람이 어떻게 법 없이 살겠습니까? 바울은 영적인 차원을 말하는 중입니다. 몸으로는 여전히 법의 지배를 받지만 영적으로는 거기서 벗어났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생명을 우리의 노력인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완전히 의탁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볼 때 하나님에게 자신의 미래를 온전히 맡긴 최초의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세의 율법이 나오기 훨씬 전에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모세보다 훨씬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일치한 사람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선구자에 불과했지만, 아브라함은 모든 민족의 조상입니다. 심지어 혈통이 다른 우리도 믿음으로 그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창 17:5절 말씀을 인용해서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16b)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기준과는 전혀 다른 기준으로 하나님에게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부활과 창조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로만 인정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만이 부활의 능력자이며, 창조의 능력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바로 그런 하나님이었습니다. 17b절을 보십시오.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아브라함의 칭의와 하나님의 은총을 말하다가 부활과 창조를 거론하는 게 조금 부자연스럽다고 생각되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율법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율법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실천해야 할 규범을 가리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선하고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활이나 창조와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노력에 속하지만 부활과 창조는 하나님의 행위에 속합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부활과 창조가 말하는 생명의 근원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에 완전히 의존하는 삶이 바로 바울이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서 전달하고 있는 믿음입니다.
이런 삶이 무엇인지 아직 손에 확실하게 잡히지 않는 분이 있을 겁니다. 그런 분은 오늘 복음서 말씀인 요 3:1-10절을 되새겨 보십시오. 니고데모는 거듭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바리새파 사람으로 유대인의 지도자였습니다. 아무리 학식이 뛰어나고 세상 경험이 많아도 거듭나지 않으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이룬 업적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게 힘들 겁니다. 여러분, 아무 걱정하지 말고, 오직 그분에게만 마음을 두고 살아가십시오. 부활과 창조의 하나님만이 우리의 미래를 온전히 책임지십니다.

로마서 4:1-5,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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