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구원-열림-따름
막 10:46-52, 창조절 여덟째 주일, 2015년 10월25일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예수님은 출가 후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유랑생활을 하셨습니다. 당시 흔하던 일이었습니다. 유랑 지역은 그렇게 넓지 않습니다. 북쪽 갈릴리 호수부터 시작해서 남쪽 예루살렘까지입니다. 대략 150킬로미터 정도의 거리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이 두 지역 사이에서 벌어진 것들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23km 지점에 오늘 설교 본문 막 10:46에 나오는 여리고가 있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에 가려고 갈릴리에서 아래로 내려오다가 그곳에 들린 것 같습니다. 그곳에 들렸다가 나오는 길목에서 바디매오라 하는 이름의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복음서에는 특별한 인물 외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 이 사람은 이름이 나올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까지 나옵니다. 바디매오는 거기서 구걸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예수 일행이 지나간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평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던 탓인지 예수님을 향해서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와서 다윗 왕조를 다시 세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단어는 ‘주님’, 또는 ‘그리스도여!’라는 말과 의미가 같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그것은 기독교 영성의 핵심인 ‘키리에 엘레이송!’, 즉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에 해당됩니다. 바디매오의 이 외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가장 핵심적인 태도입니다. 그 이유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분명합니다. 1)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창조주를 통해서만 생명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2) 우리는 아는 게 없습니다. 내일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선한 뜻을 갖고 있는지 악한 뜻을 갖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3) 우리는 죄인입니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완성시키려는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4) 결국 우리는 죽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열정을 기울였던 모든 것들과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아무 것도 손에 남는 게 없습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예배에서 ‘키리에 엘레이송!’이라는 찬송과 기도가 빠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바디매오를 떠들지 말라고 꾸짖었다고 합니다. 요즘말로 바디매오가 예수님에게 민폐를 끼치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바디매오는 더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바디매오가 뻔뻔한 사람이어서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요? 아닙니다. 그의 영혼이 절박했다는 게 대답입니다. 영혼이 절박하지 않으면 신앙은 불가능합니다. 절박하다는 게 바디매오처럼 장애인, 거지, 노숙자 같이 신세가 어려운 이들에게만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근원적으로 자신이 바디매오와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뚫어보는 사람들은 절박한 마음이 무언지를 압니다. 생명을 스스로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좌절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시각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뚫어보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열심히 살고 있지만 인생이 무언지 알지 못해서 답답하고 절박해지는 경험을 자주 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더 큰 소리를 지른 바디매오처럼 인생의 본질을 추구하는 삶의 태도를, 즉 수행적 삶의 태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믿음-구원
소란을 눈치 채신 예수님은 바디매오를 불러오라 말씀하셨고, 사람들이 그에게 가서 예수님이 부른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바디매오가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본문은 그 순간을 이렇게 전합니다.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50절). 그가 앞을 못 보는 사람이었으니까 누군가 옆에서 도와주었을 겁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거지가 돈 한 푼 달라고 말하지 않을까 예상했을 겁니다. 그는 예상외의 대답을 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52절).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가장 단순하게 생각하면 믿음으로 시각장애가 고쳐졌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즘도 난치병 환자들과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신유 집회가 열리곤 합니다. 다리를 절던 사람이 안수 기도 받고 더 이상 절지 않게 되었다거나 병원에서 포기한 암 환자가 이런 신유 집회에 참석해서 깨끗이 치료받았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이런 현장을 담은 동영상이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아닌지를 놓고 논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의학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들은 그런 신유 집회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판소리 ‘심청전’의 마지막 대목은 심학규가 눈을 뜨는 장면입니다. 그는 공양미 삼백 석을 절에 바치면 눈을 뜰 수 있다는 ‘땡중’의 말을 듣고 인신제사의 제물로 딸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공연히 딸을 죽였다는 죄책감이 그의 영혼을 옥죄었을 겁니다. 우여곡절 끝에, 죽었다고 생각한 딸 심청을 궁궐에서 만납니다. 왕비가 된 심청이 아버지를 부르자, 심학규는 ‘어디 보자, 어디 보자...’ 하면서 눈을 뜹니다. 이런 일들은 의학적으로도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시각 장애도 여러 원인이 있습니다. 가장 가벼운 이유로 벌어진 장애가 이런 격한 감정 폭발을 계기로 치료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바디매오의 믿음입니다. 그는 길에 앉아 있다가 우연히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눈으로 확인한 게 아니라 웅성거리는 소리로만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조용하라는 주변의 충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예수님을 향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그의 영혼은 예수님으로 가득했습니다. 다른 것이 들어올 틈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기구한 운명으로 살던 사람이었지만 바디매오의 믿음이야말로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쉽지 않습니다. 현대 문명은 이런 믿음을 더 어렵게 만듭니다. 현대문명이 우리에게 세상이 세워놓은 기준에 들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에게 일어난 일에 집중하기 어렵습니다. 세상의 요구가 무언지는 여러분이 잘 알 겁니다. 그런 것들은 매우 자극적이고 매력적이어서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몰두하게 만듭니다. 그런 것만으로도 세상에서 살맛이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무언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인생을 그런 거라고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저는 더 이상 다른 말씀을 드릴 수 없습니다. 다만 다음의 사실은 알아두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바디매오처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일이 무엇인지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498주년 기념주일입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출입문 위에 95개 조항의 신학 명제가 적힌 대자보를 건 날을 기점으로 합니다. 루터 신학의 토대는 믿음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움을 얻는 데에는 ‘솔라 피데’(오직 믿음)이 필요할 뿐이지 행위로 보충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은 교회가 구원을 담보하는 것처럼 주장했습니다. 교회가 요구하는 행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주장입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고 행위는 눈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로마가톨릭의 가르침에 대항해서 루터는 믿음의 존재론적 능력을 뚫어보았습니다. 자기가 수도사로서 고행을 마다하지 않았고, 신학박사로서 학문적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그런 것으로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마음의 평화가 없었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구약 하박국 2:4절을 인용한 롬 1:17절에서 그는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런 행위가 없었던 바디매오를 향해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열림
막 10:52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이 말씀이 있은 다음에 바디매오에게는 두 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그가 곧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걸 단순히 육체적인 눈을 뜨게 되었다는 뜻으로만 받아들이면 성서가 말하는 핵심에 들어가지 못한 겁니다. 복음서 기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예수님에 의해서 여러 가지 기적적인 일들이 벌어졌을 때마다 사람들은 기적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워했습니다. 기적 행위자들은 고대 시대에 많았습니다. 악한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그런 능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그런 종류의 사람들과 비슷한 존재로 보는 건 오해입니다. 바디매오가 보게 되었다는 것은 훨씬 근본적인 사태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이 참된 의미에서의 ‘보게 되는 것’, 즉 영혼의 ‘열림’입니다. 이게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은 아닙니다.
본다는 것은 대상을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하나의 대상을 놓고도 보는 관점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보지도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여기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가 있다고 합시다. 다른 것에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긴 사람에게는 그 현상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겁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흔들리는 나무만 들어올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바람이 눈에 들어올 겁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냥은 볼 수 없고 새로운 차원의 눈이 열려야만 합니다. 귀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장소에서도 어떤 사람은 듣는데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합니다. 귀 없는 자는 없지만 실제로 진리를 알아듣는 귀는 그런 귀와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디매오의 영적인 눈이 열렸다는 게 참된 의미에서 기적이며, 그것이 곧 구원입니다.
따름
예수님의 말씀이 있은 뒤에 바디매오에게 일어난 다른 하나는 그가 예수님을 그 자리에서 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주로 제자들의 일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먼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기를 잡고 있던 시몬 베드로에게 당신을 따르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디매오의 경우에는 오히려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름을 받지 않았는데도 예수님을 따르는 경우는 드믑니다. 바디매오는 열두 제자들보다 영적인 눈이 더 밝았다는 뜻일까요?
예수님을 따라나섰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뜨악하게 생각합니다. ‘이게 뭐지?’ 하고 말입니다. 출가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는 건가, 세상일은 포기하고 교회 생활에만 전념하라는 건가, 목사나 선교사가 되라는 말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이런 이야기는 자기와 상관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목사, 선교사, 수도사, 신학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두 영적인 차원에서 바디매오처럼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게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삶의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게 실제 우리 삶에서 어떤 뜻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과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겁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자기의 관심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관심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에 자신의 운명을 걸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말을 단순히 종교적인 수사로 여기지 말고 실존적으로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예수가 길, 진리, 생명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바디매오처럼 예수의 관심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 운명을 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을 일반 학문의 방식으로 설명하겠습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인 인간이 정말 현존재답게 살아가려면 죽음과 양심에 직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죽음 앞에서 사람은 섬뜩한 느낌으로서의 불안을 느낍니다. 그걸 피하지 말고 감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 사람은 자신의 본래적 실존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본래적 실존을 살아간다는 것은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양심은 사람을 본래적인 실존으로 살게 하는 근원적인 부름입니다. 그런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세상의 요구에만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런 삶은 비(非)본래적인 것입니다. 이런 비본래적인 삶에 묻혀 있으면서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디매오의 따름을 특색 있게 전합니다. 그는 ‘길에서’ 예수를 따랐습니다. 굉장히 시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자기의 장애가 고침을 받았다는 사실이 놀라워서 그것을 먼저 가족과 친지들에게 전하고 싶었을 겁니다. 예수를 따르려면 무슨 준비가 필요한지도 집에서 더 생각해 볼만합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상식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들을 생략했습니다. 그만큼 그에게는 예수 따름이 절박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미래와 운명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보장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이 실감 나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 좀더 노골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최대의 관심을 무엇인가요? 무엇이 여러분에게 지금 시급합니까? 취업, 결혼, 집 마련이 급한 일인가요? 복잡한 사람관계인가요? 그렇데 잘 생각해보십시오. 내일 내가 죽는다면 그 모든 걱정과 관심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가 아무리 급한 일이라고 생각해도 나의 죽음 앞에서는 별거 아닙니다. 목사로 살아가는 저의 최대 관심사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생각하면 교회 문제가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내일 죽는다면 교회의 일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지금 발등에 떨어진 일들로 인해서 우리가 쫓기고 있지만 그 모든 것도 죽음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는 죽음이라는 말로 여러분을 겁먹게 하려는 게 아닙니다. 사실을 그대로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죽음은 삶의 완성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최종적인 사건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놓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삶의 완성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기독교 신앙 안에서 정확하게 알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삶의 완성에서 결정적인 것은 죄와 죽음의 극복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게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그 사실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전적으로 거기에 집중하는 것이 ‘예수 따름’의 삶입니다. 이걸 실제로 이해하고 실제로 믿으시는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디매오 이야기를 오래 기억해 두십시오. 아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 이야기가 여러분 자신의 것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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