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영적 확신
롬 8:26-39, 성령강림후 일곱째 주일, 2014년 7월27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사도 바울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위대한 복음 설교자요 선교사며 신학자이고 영성가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개신교, 로마가톨릭, 정교회를 비롯해서 교파를 막론하고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최소한 10권 정도가 바울의 작품입니다. 그러나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별로 존경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어려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일종의 따돌림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오늘 본문 36절에서 바울은 시편 44:22절을 인용해서 자신의 형편이 도살당할 양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계속 쫓기는 신세를 면하지 못하다가 자신이 뿌린 복음의 씨앗들이 어떤 결실을 맺었는지 알지 못한 채 어디선가 외롭게 죽었습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에 사람들은 자기의 일에 대한 열정을 잃고, 더 나아가면 자포자기를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만 고생하고 손해나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하는 생각이 대부분입니다. 그건 인지상정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주변의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았겠지만 결정적으로는 그걸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가 그런 주변적인 요소들이 아니라 어떤 절대적인 사실에 집중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본문 롬 8:38, 39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은 ‘확신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아주 강한 표현입니다. 그가 확신하고 있는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을 수 있는 것이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위 구절에서 바울이 열거한 열 가지 항목을 보십시오. 사망, 생명, 천사들, 권세자들, 현재 일, 장래 일, 능력, 높음, 깊음, 모든 피조물이 그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오늘 우리가 일일이 따갈 수는 없습니다. 요즘 시대와는 동떨어진 것들도 있습니다. 총체적으로 우리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는 막강한 힘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첫 번째로 열거된 죽음을 보십시오. 우리는 평생 죽음에 맞서서 거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으며 삽니다.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도 잘 되지 않습니다.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있다는 게 놀랍고 신비롭지만 동시에 고통도 많이 따르고 허무하고, 또한 두렵습니다. 생각 없이 산다면 모를까, 생각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이런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건강한 사람은 건강한대로, 병이 든 사람은 병이 든 채로 그런 것에 지배받습니다. 그게 반복되면서 우리 안에 강한 두려움으로 자리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아.’ 하고 말은 할 수 있습니다만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다는 바울의 확신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 말은 거꾸로 이 하나님의 사랑에 연결되어있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것과 끊어져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게 전제되지 않으면 하나님 신앙은 아예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게 실제 우리의 삶에서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지금 바울은 너무 힘들고 지쳐서 제 정신 줄을 놓치고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닐까요?
헬라어 ‘아가페 투 데우’의 번역인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말을 우리는 귀가 따갑게 자주 들었습니다. 성경 곳곳에 그런 표현이 나오고, 설교 중에서 시도 때도 없이 나오고,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게 무언지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알긴 알 겁니다. 조금 알아도 아는 건 아는 거니까요. 그러나 오해도 적지 않습니다. 아주 틀리게 아는 것만이 오해가 아니라 조금 알면서 다 아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오해입니다. 교회생활을 통해서 자신이 이제는 뭔가를 분명하게 알아서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자신이 있다는 느낌이 들면 그건 곧 신앙에서 멀어지는 조짐이라고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더구나 그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하게 아는 사람은 더더욱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분을 향해서, 그의 사랑을 향해서 천천히 나아갈 뿐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그 사랑에 자신의 영혼을 점점 깊이 맡기는 것뿐입니다. 이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은 누구이며,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그게 무엇이기에 이 세상의 모든 막강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걸까요? 바울은 어디서 이런 확신을 얻게 되었을까요?
바울은 단순하게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동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예수님의 운명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유대인들이 막연하게 생각했던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에서 발견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도 말하고 있는 성육신 사건이 그것입니다. 로고스, 즉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입니다. 불가시적 초월의 하나님이 가시적 역사 내재의 예수님과 하나 된 사건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운명을 통해서 이제 그 이전에 율법을 추구하다가 봉착한 죄의 짐, 즉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더 나가서 세상의 모든 악한 힘에 의해서 더 이상 지배받지 않는다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영적 확신으로 살고 싶으실 겁니다.
본문 롬 8:33-35절에서 바울은 이것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이 세 가지가 마치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 문장처럼 하나의 정형화된 문체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누가 고발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끊으리요. 강한 긍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의문문, 또는 감탄문 형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첫째는 33절이 말하는 고발 문제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고발은 죄에 대한 책임 추궁입니다. 법의 본질이 고발, 고소입니다. 바울이 살던 로마시대는 모든 질서가 이런 법에 의해서 유지되었습니다. 법을 어긴 사람에게 그에 합당한 벌을 주어서 사회를 바르게 잡자는 논리입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도 로마 시대와 다르지 않습니다. 유대교의 율법도 동일한 논리입니다. 율법을 어기는 것은 바로 고발당하는 이유가 되었고, 율법을 지키는 것은 칭찬을 얻을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인들은 평생 율법이라는 짐을 지고 살았습니다. 바울도 그런 사람들 중에 끼어서 살았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종교적인 세련미를 얻을 수 있긴 했지만 영적인 평화와 만족은 전혀 누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한 것을 절대 기준으로 삼으면 결국 삶이 파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이런 문제를 로마서 앞부분에서 자세하게 다뤘습니다. 이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을 통해서 율법의 고발을 받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게 되었습니다. 율법 성취라는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이 하나님으로부터의 의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셨는데 누가 우리를 고발할 수 있느냐, 하고 반문했습니다.
둘째는 34절이 말하는 정죄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3절에 나오는 고발은 죄를 묻는다는 의미라고 한다면 정죄는 재판관이 피고인에게 선고를 내리듯이 죄를 판결한다는 뜻입니다. 고발에 의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으로 예수가 죄인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전 1:23절에서 바울은 십자가 죽음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낌의 대상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건 당시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대변한 것입니다. 바울에 의하면 십자가 죽음으로 예수님의 운명이 최종적으로 판결된 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십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킨 것은 세상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급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판결은 최종심입니다.
그런데 하급심이라고 하더라도 십자가 처형은 이 현실에서 우리가 쉽게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무로 돌아가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복해서 죽음의 위협 앞에 굴복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죽음이라는 하급심의 차원을 넘어서 부활이라는 최종심의 차원으로 올라 설 수 있을까요?
부활은 단순히 다시 산다는 게 아니라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된다는 의미입니다. 그 변화는 질적인 것이어서 오늘 우리의 그 어떤 상상력으로도 다 그려낼 수 없습니다. 비유적으로 말씀드리면,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는 변화는 질적인 겁니다. 애벌레는 나비로의 변화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 부활로의 변화를 성경은 영생이라고도 말합니다. 이런 삶으로 변화되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바울과 더불어서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그 어떤 세력도 우리를 죄와 죽음의 운명에 그대로 붙들어 매놓을 수 없다.’
셋째는 35절이 말하는 끊음의 문제입니다. 그 어떤 세상의 악한 세력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39절 말씀과 직접 연결됩니다. 공동번역으로 읽겠습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곧 39절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35절에서도 바울은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열거했습니다.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칼이 그것입니다. 이 구절은 고후 11:23절 이하에서 거론된 내용과 흡사합니다. 불치병이나 경제적 빈곤, 투옥, 따돌림, 외로움 등등, 실제적인 어려움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일들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무조건 믿으면 되나요? 이건 이미 앞에서 바울의 확신에 대한 38절과 39절을 설명할 때 나온 질문입니다. 답도 거기서 이미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에게 절대적인 무게로 경험되었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바울의 영적 확신은 놀랍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에게는 그게 불가능한가 보다 하고 주눅이 들기도 합니다.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자기를 자랑하려고, 또는 그들이 주눅 들라고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당시 바울을 비롯해서 로마 교우들에게는 신앙을 위태롭게 할 만한 고난들이 이어졌습니다. 바울은 그들과 신앙적인 동병상련을 느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앞 구절인 롬 8:18절에서 그 상황을 이렇게 피력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 구절에는 두 가지 사태가 마주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의 고난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의 영광입니다. 기독교인은 현재의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고난이 없다면 그가 기독교인답게 살고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고난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미래의 영광을 reality(현실성)로 인식하고 경험할 수만 있다면 현재의 고난은 자신의 운명에서 아주 작은 일이 되고 맙니다. 문제는 현재의 고난이 너무 절실해서 미래의 영광을 엿보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현재의 고난을 바울이 당한 실제적인 어려움으로만 보면 곤란합니다. 더 근본적으로 당시 시대정신인 로마와의 충돌이 바탕에 놓여 있습니다. 로마정신은 ‘팍스 로마나’로 대변됩니다. 로마의 평화가 절대적인 이데올로기입니다. 그것의 결과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입니다. 오늘의 기독교인들도 초기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21세기 로마정신과 맞서 있습니다. 경제 만능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경제발전 앞에서는 정의와 평화가 맥을 못 춥니다. 경제가 무한 발전하는 것이 아닌데도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선동하는 경제인들과 정치인들의 호소와 위협에 모두 매료당하거나 겁을 먹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미래의 생명인 부활로 변화하신 예수님을 믿고 살려면 바울이 말한 ‘현재의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말과 생각이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삶에서 우리는 현재의 고난과 충돌을 무조건 피할 수도 없고, 단숨에 극복할 수도 없습니다. 미래의 영광이라는 말을 듣기는 하나 그것도 손에 잘 잡히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미래의 영광이 무엇인지, 그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약속으로 주어졌는지를 분명하게 알아보고 그 안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였던 바울은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바울의 영적 확신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운명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를 모든 죄와 죽음이라는 고발과 정죄로부터 지켜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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