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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발람의 어그러진 길 (민 22 : 21 - 35)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vyCMMJeGk3c&t=16s

▣ 들어가는 말

- 민수기

모세 5경 중 네 번째 책에 해당하는 민수기는 시내산을 떠나 모압 평원에 이르기까지 광야에서 겪었던 40년간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40년의 기간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기본적인 공동체적 삶, 율법의 제정, 예배의 형식 등이 갖추어진 시간이었던 것이지요. 이집트에서 모세를 따라 도망했던 사람들은 잡다한 부류의 사람들, 즉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공통된 염원으로 따라나서게 된 여러 인종이 섞인 사람들이었는데, 따라서 그들에게는 민족 정체성이나 공동생활에 대한 의무감이 없었고, 역사적 공동체로서 한 백성을 이룰 수 있는 공통의 역사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민수기는 광야의 시간을 통해서 어떻게 한 민족으로, 하나의 역사/신앙 공동체로, 소위 ‘하나님의 백성’으로 형성되어 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보자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누리기 위해 갖추어야 할 자격 조건들에 관한 이야기라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 혹은 ‘구원’의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떤 자격? 품격?을 갖추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것을 누릴 능력과 자질을 갖추었을 때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 요단 건너편, 여리고 맞은편

오늘 함께 생각해볼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길을 떠나 모압 평지에 진을 쳤으니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 맞은편이더라.”(민22:1) 광야에서의 준비 기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입니다. 1~2주면 갈 수 있는 곳을 40년을 돌고 돌아 이제 그들의 최종 목적지인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40년이라는 기간은 정확한 기간이라기보다는 그만큼의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노예와 같은 삶의 모습에서 벗어나 진정한 삶의 주인으로, 오롯이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갖추는 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요. 마침내 준비와 훈련, 성숙의 끝, 최종 단계만 남아 있는 상황이지요.

 

 

▣ 발람 이야기

- 왜 구태여 점쟁이나 나귀인가?

그런데 이 중요한 시점에 3장이나 할애해서 좀 유치해 보이는, 나귀가 사람처럼 말을 하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배치합니다. 그리고 ‘발람’이라는 점쟁이(?)를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당혹스럽습니다. 그러다 보니 발람에 대한 해석이 분분합니다. 저 역시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다양한 자료들과 책들을 찾아보았지만 시원한 대답이 되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는 예언이나 점 등이 매우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이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첨단의 합리적 과학적 이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점성술은 기원전 3000년쯤으로부터 생겨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동양이나 서양 할 것 없이 국가나 개인의 운명을 점치는 일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온 것이 사실입니다.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조차 점성술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은 의사라고 부를 수도 없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런 소재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인식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지금 우리 나라 정치권만 보더라도~)

 

중요한 것은 소재를 넘어서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소재로 인해 본문이 담고 있는 메시지나 그 중요성이 제대로 전달이 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가나안 땅에 바라보며, 그 땅에 들어가기 직전의 상황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메시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 모압 이야기

또 하나 주목해보아야 할 것은, 이 이야기는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화면이 전환된 것입니다. 이쪽의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다가 ‘한편, 상대편은 이러이러하다.’라고 상대의 상황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왜 구태여 이스라엘 백성들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려 했을까요? 저는 당사자(이스라엘)와 상관없이, 그들의 상황을 넘어선 다른 세계, 다른 전투, 신의 영역이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우리의 능력과 환경을 넘어선 영역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요.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준비와 노력을 넘어선, 다른 차원의 영역, 신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 아닐까요.

 

- 발람의 어그러진 길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22:6)

“너와 함께 있는 이 사람들이 누구냐?”(9)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12)

 

“아무것에도 거리끼지 말고 내게로 오라.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16,17)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20)

“함께 가니 그가 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22)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들고”(31)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34)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35)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23:7)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10)

 

“발람이 일어나 자기 곳으로 돌아가고 발락도 자기 길로 갔더라”(24:25)

 

가려 하다가 가지 않으려 하다가, 가지 말라 했다가 가라 했다가, 저주하려 하다가 축복을 하다가… 그리고 마침내 점쟁이 발람과 모압 왕 발락은 각각 자신의 길로 가는 것으로 이 이야기는 막을 내립니다. 복잡하게 얽혀있어서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발람의 어그러진 길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기 어렵습니다. 선인지 악인지도 헛갈립니다.

실마리가 될 만한 기록들이 있습니다. 발람 이야기에 이어 25장에는 소위 ‘바알브올’사건이 등장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서 머물고 있을 때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여호와의 진노로 이스라엘 진중에 염병이 돌았으며, 이로 인해 죽은 자가 2만 4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31장에 이런 표현이 나타납니다.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민31:16) 미디안 사람들이 발람의 꾀를 빌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타락하게 했다는 것이지요. 바알브올 사건을 발람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민31:8) 그런 악한 일을 행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미디안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발람을 칼로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도,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유1:11)

“그들이 바른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벧후 2:15~16)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성경을 통해 성경을 해석해보면 발람의 길은 불의의 삯에 눈이 멀어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 것. 욕망의 노예가 되어 생각을 멈춘 것입니다.

 

 

▣ 악의 근원

- 발람은 누구인가

발람은 고대 근동에서 위대한 예언자였습니다. 1967년 고고학자들이 요르단의 알라 지역에서 회반죽으로 된 신전 벽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유명한 직업 예언자 발람을 언급하고 있는 비문을 발견했습니다. 이 비문에서 발람은 밤중에 저주의 메시지를 받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실제 인물이었고 고대 근동에서 굉장히 유명한 직업 예언자였던 것입니다.

발람의 거주지인 브돌은 유프라테스 강변의 도시였으므로, 모압과 미디안의 사신들은 약 600km나 되는 먼 거리를 여행한 것입니다. 당시 여행속도로 20~25일이 걸리는 거리이며, 따라서 발람을 모셔오는데 대략 90일 정도가 걸렸다는 뜻이지요. 얼마나 큰 공을 들였는지, 발람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러니 부와 명예와 모든 것을 가졌을 것입니다. 가질 것을 다 가진 사람이 왜 굳이 그 먼 길을 오려 했을까요? 인간의 탐욕이란 끝이 없나 봅니다.

 

- 무엇이 우리를 눈멀게 하는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아이히만에 대해 그가 양심의 가책을 받은 적이 없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었을 때, 아이히만은 자신이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고 했다.”(p.18) 우리는 흔히 양심에 따라 살면 된다 생각하지만, 그 양심이란 것이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아이히만이 말한 것처럼 자기 자신의 양심을 무마시킨 가장 유력한 요소는 실제로 최종 해결책에 반대한 사람을 한 명도, 단 한 명도 볼 수가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p.186)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막아서는 저항하는 사람을 단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뉘른베르크에서 ‘당신들 같이 존경받을 만한 장성들이 그 같은 무조건적인 충성심을 가지고 살인자에게 계속적으로 봉사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자신의 최고 명령권자에 대해 판단하는 행위는 병사들의 임무가 아니다. 그 일은 역사가들이나 하늘의 신이 하게 하라.’”(p.226) 뉘른베르크에서 교수형을 당한 알프레트요들 장군의 말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너무나 분명하고 명백하게 잘못된 명령임을 알면서도 그 명령을 따르는 사람들. 저항하지 않는 사람들. 아우슈비츠의 부역자들.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로 실어 나르던 기차의 기관사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소수의 희생으로 다수를 살릴 수 있다며, 독일인보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동족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일에 열성적이던 유대의 지도자들은요? 사람들을 살해하기 위해 가스살포 버튼을 누르던 이들은 어떻게 된걸까요? 불쌍하고 가련한 이들의 옷을 벗기고 귀중품들을 빼앗던 이들의 양심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그들도 아이히만과 같이 그저 “난 그저 내 일에 충실했을 뿐”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오늘 우리는 어떤가요? 그저 주어진 나의 일, 나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귀를 막고, 눈을 감으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면 된다 여기며…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 탐욕의 강

발람의 이름의 뜻은 ‘탐닉하는 자’ ‘백성을 파멸시키는 자’라는 뜻입니다. 단테의 『신곡』의 지옥 편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지옥의 제4영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잠시도 쉬지 않고 커다란 바위를 혼신의 힘을 다해 밀고 있습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굴리는 자가 있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굴리는 자가 있습니다. 길은 좁고 굴리는 망자들은 너무 많아서 서로 부딪치며 싸웁니다. 그들은 탐욕에 눈이 멀어 ‘낭비의 죄’와 ‘인색함의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영원히 서로 충돌하며 싸웁니다. “그 모든 황금은 이 피곤한 영혼들 중 누구도 편히 쉬게 하지 못할 것이다.” “오,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무지가 너희들을 얼마나 해치는지!” 단테의 길 안내자 베르길리우스의 말입니다.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무지를 질타하고 안타까워합니다. 발람의 정체는 “탐욕”입니다. 그 탐욕이 우리의 진정한 삶을 무너뜨립니다.

 

 

▣ 끊임없이 의심하라!

- 발람 이야기를 배치한 이유

가나안을 눈으로 바라보는 모압 평지에 다다른 이스라엘. 모세를 지도자로 하여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길을 거쳐서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제 요단강만 건너면 약속의 땅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그 순간에 발람 이야기를 배치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눈에 보이는 싸움보다 그 밑바닥에 있는 정신, 마음가짐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오히려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을 때, 상당한 능력과 자질을 갖추었을 때,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관문이 탐욕이 아닐까요. 끊임없이 가지고 또 가지려는 욕망. 마음껏 누리고 누리고픈 오만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빼앗고 쌓고 쌓아서 … 타인이야 어떻게 되든, 도움이 필요한 손길들을 외면하면서 나만의 특권을 누리려는 추한 탐욕. 옳지 못한 것을 알면서도 탐심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성경은 우리를 향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믿어라. 어리석은 자가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귀가 사람 말을 한다는 이야기를 의심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신이 명령하시니 무조건 복종하라? 그런 뜻일까요? 너무나 오랫동안 교회와 목회자들이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혹은 무지 때문에 그런 메시지를 남발해 왔습니다. 정말이지 끔찍합니다. 그런 무모함과 무지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과오를 저질러왔는지, 얼마나 많은 불행을 쌓아오고 있는지요.

황당한 그런 극단적인 이야기를 통해 성경은 오히려 의심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신을 믿는다는 것은 생각 없는 바보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근원을 제외한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것 아닐까요? 신을 섬기라는 말은 거룩한 궁극적인 본질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삶의 중심으로, 주인으로 삼지 말라는 것 아닐까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노예의 땅이 아닙니다. 자유자의 땅입니다. 신이라는 미명하에 맹신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사는 곳이 아닙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의심하며 순간순간 오롯이 자신이 되는 땅, 삶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존재의 기반 근원인 신의 소리를 듣는 자. 신의 뜻을 추구하는 자이기에 그 어떤 헛된 것들에 무릎 꿇지 않고 복종하지 않습니다.

발람 이야기를 통해서 성경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의심하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이 나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인지, 진정 진리를 따르는 것인지 질문하라는 것이지요. ‘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가져야 할지 주어야 할지’ ‘내 것인지 남의 것인지’ ‘따라야 할지 외면해야 할지’ ‘올바른 곳인지’ ‘적절한 때인지’ ‘온전한 말과 행동인지’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참 재미있습니다. 자칭 신의 대리자라고 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뜻을 알지도 관심도 없는 자와 이에 비해 비록 무지한 미물 나귀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의 진노를 볼 수 있는 동물!… 주인에게 얻어맞으면서도 못난 주인을 위해 목숨 내놓는 나귀와, 자신의 욕망을 신의 뜻이라 포장하는 광기를 지닌 인간. 얼마나 아이러니하고 웃기는 세상인지요. 이러한 대비를 통해서 인간이 욕심과 탐욕에 눈이 멀게 될 때,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되는 것을 풍자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의심하지 않는, 숙고하고 반성하지 않는 삶은 필멸의 길입니다. 의심하지 않으면 우리는 욕망에 이끌리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 눈을 뜬 자

24:3에서 발람은 자신을 “눈을 감았던 자”라고 고백합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본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을 알고 나니 이제야 자신이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눈을 감았던 자”였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고백합니다. 그리고서 이제 눈을 떴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환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 이제 볼 수 있습니다. 교만하게 서서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니, 엎드리니 비로소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이제야 그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볼 수가 있습니다.

“야곱이여! 네 장막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들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스스로를 의심하며, 생각하며, 고뇌하며 진리의 길을, 참사람의 길을, 진정한 자신이 되는 길을 걷는 이들의 삶이야말로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인지요. 욕망의 관점에서 볼 때,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불쌍하고 초라하게 보였을까마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니, 이들의 초라한 장막과 삶이야말로 그 어떤 화려한 집보다 삶보다 더 아름답고 귀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 눈뜬 자의 삶을 저와 여러분이 동행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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