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마 14:13-21
세례 요한의 죽음 이후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인 소위 ‘오병이어’ 사건은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 중의 하나입니다. 아마 성서가 기록되던 당시의 초기 기독교 안에 이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각각의 복음서가 부분적으로 약간씩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전체적인 틀에서는 일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단 마태복음의 내용을 중심으로 그 이야기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 참수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피하셨습니다. 가까운 친척이면서 자기에게 세례를 베푼, 이스라엘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 요한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예수님의 마음이 편치 않았으리라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내다볼 수 있습니다. 한적한 곳으로 피한 예수님에게 여러 곳에 있는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몰려들었는지 우리가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현재 예수님이 당한 상황이 별로 좋지 않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들었다는 게 자연스럽지는 않습니다. 사또 집의 개가 죽으면 사람들이 몰리지만 정작 사또가 죽으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우리 속담에도 있듯이 고향에서 푸대접받았으며(마 13:53-58), 하나님 나라의 동지인 세례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적한 곳으로 피하신 예수님을 찾아 나선 이들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예수님에게서 전혀 새로운 생명의 힘을 느끼고 찾아온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청중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당하는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찾아왔을 것입니다. 특히 환자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베에서 내려 거기 모여든 많은 군중을 보시자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들이 데리고 온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이들 군중들이 저녁밥을 먹을 때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군중들을 마을로 보내서 각각 저녁밥을 해결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예수님께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은 다음 동물과 똑같이 밥을 먹어야만 합니다. 끼니때가 되면 우리의 몸이 그 신호를 보냅니다. 그런 신호에 익숙하게 살아온 우리는 몸의 신호를 느끼기도 전에 시간에 의해서 무엇을 먹어야 한다는 느낍니다. 제자들이 해가 뉘엿뉘엿 지는 그 시간에 군중들의 저녁밥을 걱정하고 그 해결책을 예수님에게 제시했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미 제자들끼리 충분히 생각해보았을 것입니다. 이 장소에서 가마솥을 걸어놓고 밥을 지어 이 사람들을 먹일 것인지, 아니면 요즘 우리가 하는 식으로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자장면을 배달시킬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을 모두 해산시킬 것인지 여러 가능성을 타진해보았겠지요. 다른 복음서에는 군중을 먹이기 위해서 필요한 돈이 대략 200 데나리온이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 돈으로도 물론 부족하다는 뜻이었습니다. 200 데나리온을 지금의 돈으로 환전한다면 대략 1천만 원쯤 됩니다. 많은 의논을 거친 다음에 나온 결론은 군중을 해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가장 합리적인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제안을 듣고 던지신 예수님의 답변은 의외였습니다.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16절). 이미 제자들이 여러 관점에서 저녁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머리를 짜낸 후에 내린 결론을 예수님이 뒤엎었습니다. 제자들의 머리로 궁리해낸 최선의 해결책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순간에 제자들은 무척 당황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저녁밥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이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군중들을 마을로 보내는 계획도 수포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런 딜레마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무능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그 당위 사이에 놓여 있는 딜레마가 바로 그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이 문제를 설교자의 딜레마로 바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한다는 불가능성과 그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당위 사이에 놓여 있다.” 우리가 이런 무능력과 당위 사이에서 벗어날 길은 죽기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이 세상의 문제에 놓여 있는 궁극적인 이유를 모를 뿐만 아니라 그 일을 감당해야만 한다는 사명이 늘 옆에 있기 때문입니다.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혹시 자기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하시는 예수님을 원망하려는 마음은 아니었을까요? 그들이 원망은 하지 않았겠지만 아예 가능하지 않은 요구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환자를 기적적으로 고치실 수 있는 예수님이라고 하더라도 남자 어른만 해도 줄잡아 5천 명 이상의 군중을 무슨 수로 먹일 수 있다는 말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기가 막힌다는 뜻으로, 또는 새로운 기적적인 사건을 희망하면서 자기들이 처한 형편을 이렇게 간접적으로 표현합니다. “우리에게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17절). 이 말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포함된 것 같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군중들을 마을로 보내자는 게 그렇게 허튼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겨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이걸로 누구의 입에 풀칠을 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지금 돈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을이 멀어서 저녁밥을 사올 수도 없습니다. 사온다고 하더라도 1천만 원 이상의 돈이 들어야 합니다. 무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먹어야 할 사람은 많은 데 겨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 없는 상황은 우리의 삶에서 자주 벌어집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우리 집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다섯 명의 식구들이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밥은 겨우 한 그릇밖에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밥을 솥에 넣고 물을 가득 채운 후 끓였습니다. 그러면 멀건 죽은 모든 가족들이 나누어 먹을 정도의 양으로 불어납니다. 이런 죽은 먹는다기보다는 마신다는 표현이 낫습니다. 마신 다음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또다시 배고프게 마련입니다.
요즘도 우리나라의 경제 사정이 말이 아니라고 아우성입니다. 중소기업의 생산성이 떨어지고 장사도 시원치 않습니다. 다만 수출만은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아무리 살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옛날에 비해서는 엄청나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일자리가, 특히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없다고 정부에 대한 원망이 많지만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라도 괜찮다면 아직도 일할 곳을 많습니다. 다만 그런 일을 하기 싫다는 게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일지 모릅니다.
제가 보기에 요즘 내수가 나쁘다든지 일자리가 없다는 이런 호소들은 대개 절대적인 어려움이라기보다는 상대적인 것 같습니다. 절대적인 어려움이라는 것은 제가 어렸을 때 경험한 것과 같은 생존의 위기를 말하지만 상대적인 어려움이라는 것은 자기들이 생각하는 인생의 품위와 연결됩니다. 살기 어렵다고 하면서도 거의 모든 가정이 승용차를 굴리고 있고, 모든 청소년들이 핸드폰을 소유하고 있고, 돈 때문에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지 않겠다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물론 지난날보다 좀더 잘 살아야겠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결코 우리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으며, 이런 정신으로는 아무리 경제형편이 나아진다고 하더라도 결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본 것은 많은 숫자의 사람들과 자기들의 형편없는 소유였습니다. 늘 이렇게 어떤 것과 비교하는 마음이 그치지 않는 한 우리는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미국 사람처럼 잘 살아야 한다는 마음을 갖고 있는 한 이 지구는 평화로운 별이 될 수 없습니다. 좀더 엄격하게 말한다면 잘 사는 사람이 많을수록 이 지구가 훼손된다는 점에서 잘 사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나 사회나 국가는 하나님의 창조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런대도 기독교인들은 아무 생각 없이 미국의 자본주의를 거의 메시아처럼 생각하고 따라갑니다.
떼어 나눔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것을 손에 들고 기도하신 다음에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도 남은 것이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합니다. 그곳에 모였던 사람의 숫자는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하고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과연 그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단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지만 예수님이 기도하신 후에 그것의 양적인 변화가 일어나서 수만 명이 충분히 먹고도 남을 정도가 되었다는 이 보도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을까요? 예수님에게는 지금 우리에게 초자연적으로 보이는 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났습니다. 장애인의 장애가 고쳐진다거나 심지어는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한결같이 초자연적인 사건은 아닙니다. 다른 현상은 접어두고 오늘 이 오병이어만을 잠시 검토해봅시다. 과연 빵과 물고기가 마술사의 마술처럼 많아진 것인지 아닌지 말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이에 대한 몇 가지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개연성이 높은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원래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가 먹을 것을 챙겨왔지만 눈치를 살피고 있다가 어린아이가 먼저 자기의 것을 내놓은 것을 보고 모두 내놓았다는 것입니다. 이럴 가능성은 아주 높습니다. 어떤 사람의 살신성인 하는 모습은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 마련입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실제로는 빵을 먹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말씀으로 허기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공생애 초기에 예수님은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진리가 우리의 영혼을 채운다면 우리는 육체적인 허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위의 가능성은 단지 가능성일 뿐이지 실체적 진실은 아닙니다. 초대 교회에 오랜 시간 전승된 사건을 오늘 사실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가 왜 이 사건을 그렇게 중요한 것으로 전승시켜왔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사건의 객관적 사실을 추적하는 것보다는 초대교회의 신앙과 그 신학을 따라가는 게 성서를 읽는 가장 바람직한 길입니다.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될 정도로 중요했던 이 오병이어가 초대교회에는 어떤 신앙적 의미로 받아들여진 것일까요?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행위가 눈에 들어옵니까? 무엇이 연상됩니까? 그 행위는 곧 ‘성만찬’ 예전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빵과 포도주를 손에 들고 하늘을 향해 감사기도를 드린 후 나누어 먹고 마시는 초대교회의 성만찬 의식과 지금 광야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기도 의식은 아주 흡사합니다. 바로 여기에 오병이어 사건을 소중하게 간직한 초대교회의 신학적 의도가 있습니다. 빵과 물고기의 양이 늘어난 것에 관심을 있는 게 아닙니다. 자신들의 성만찬 자리에 임재하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광야에서 끼니를 때우지 못하던 군중을 배부르게 먹이신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이 그들에게 중요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초대교회와 똑같이 예수님이야말로 생명의 ‘밥’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밥인 이유는 또 하나의 설교로 설명되어야 하기 때문에 오늘은 줄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를 궁극적으로 살리는 밥이라는 사실만은 놓칠 수 없습니다. 이 밥은 종말에서 시작될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차원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오늘 이야기처럼 실제적으로 이 역사에서 궁핍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투쟁하고 실천해야 할 사명은 예수님을 생명의 밥으로 믿는 모든 기독교인들 각자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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