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2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dATJJVRPfD0?si=JnzEU-PcO7EH6kjH
▣ 들어가는 말
- 역설적 효과
미국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 교수 다니엘 웨그너가 1987년 ‘백곰’실험을 통해 ‘역설적 효과’ 혹은 ‘반동 효과’라 불리는 인간 심리를 발견해 냈는데요, 실험에서 학생들은 ‘지금부터 백곰을 생각하지 말라’라는 말에 오히려 백곰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빨리 잠을 자야 해’라고 생각하면 할수록 더 긴장하고 불안해져서 잠을 이룰 수 없거나, ‘절대 술을 마시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더 술에 대한 갈망이 커지는 경우 등이 바로 이런 경우이지요. 사람의 심리, 마음은 참 알 수가 없습니다.
- 매로우 논쟁
18세기 초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신학적 논쟁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은혜, 구원, 그리고 율법의 역할에 관한 것이었는데, 구원에 있어 인간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혜 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매로우 논쟁(Marrow Controversy)이라 부릅니다. 이런 이름은 1645년 에드워드 피셔(Edward Fisher)의 책, 『구원의 골수(The Marrow of Modern Divinity)』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책이 1718년경 목회자 토머스 보스턴(Thomas Boston)에 의해 재발견되면서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스코틀랜드 교회에는 구원의 본질에 관해서 율법주의 즉,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인간의 도덕적 노력과 공로가 필요하다는 관점과 안티노미안주의(antinomian, anti-반대, nomos-율법) 즉,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더 이상 율법에 대한 책임이나 순종의무는 필요하지 않다는 관점, 두 가지 흐름이 있었습니다. 이 책 『구원의 골수』는 이 두 극단을 모두 비판하면서,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었는데, 책의 내용이 일부 사람들에게 율법을 부정하는 것으로 오해되면서 논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지요.
매로우 논쟁의 핵심 쟁점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그것은 ‘구원의 조건’, ‘구원의 대상’, 그리고 ‘율법의 역할’ 문제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첫째,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떤 행위나 율법의 준수 여부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율법을 경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안티노미안주의)이라고 비판받습니다. 둘째, 구원의 초대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주장입니다. 반대파는 이를 ‘만인구원설’로 오해하지요. 셋째, 율법이 구원을 위한 조건은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의 지침이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파는 이것이 율법의 권위를 약화한다고 봅니다. 결국, 이 매로우 논쟁의 결과로 교회가 분열되는 씨앗을 심게 되지요.
어떻습니까?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거슬러 올라가 보면, 교회가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미 이에 대한 진지하고 심각한 논의들이 있어 온 것 같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롬7:7)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7:12)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4) 등의 성경 말씀을 보면 이미 초대교회 당시에도 은혜와 율법의 관계에 대해 여러 가지 오해와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율법과 은혜에 관한 말씀은 너무나 많이 발견됩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3:31)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6:14)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딤전1:8) 교회가 시작되던 당시부터 성도들은 율법과 은혜에 관한 정확한 이해를 갖지 못했고 이로 인해 갈등과 다툼이 있었고, 이에 대해 사도들은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뱀의 신학
- 유혹의 뿌리
은혜와 율법에 관한 문제를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지만 교회의 역사와 우리 개인의 신앙에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 우리로 말미암아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자꾸만 다시 빠져들게 하는 뭔가 치명적이고 매력적인 유혹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바로 그 뿌리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동방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2:8), 그곳에 아담과 하와를 살도록 하시며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2:16-17) 명령합니다. 그런데 뱀이 여자를 유혹합니다.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3:1)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3)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4)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5)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7)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8) “네가 어디 있느냐?”(9)
- 유혹의 본질
이 뱀의 유혹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율법주의적 사고의 함정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Legalism)는 단순히 어떤 규범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자기 의로움, 행위 중심의 신앙,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칙 수행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뱀의 메시지,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3:5)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기 성취와 노력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거짓된 사고를 심어주었습니다. “네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 유혹은 본질적으로 ‘행위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라는 율법주의적 유혹의 시초로 볼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신의 노력과 성취로 영적 만족을 얻으려는 태도를 조장합니다. 이는 하와가 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통해 스스로 지혜를 얻고자 한 행위와 유사합니다.
뱀의 메시지, 뱀의 신학, 뱀의 유혹의 핵심은 먼저, 말씀의 왜곡입니다. 교묘하게 본질을 흐립니다. “참으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사실과 거짓을 섞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마음대로 먹되” ‘모든 나무의 열매를 마음껏 먹어도 좋다’ ‘너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다’ ‘네 앞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을 마음껏 누려라’ 사실 이것이 핵심이지요. 그러기에 기쁨의 동산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지으신 에덴동산은 결코 감옥이 아닙니다. 인간을 향한 배려,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선악과의 금지는 에덴을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만든 최소한의 보호 장치입니다. 교통법규가 사람의 생명과 안전과 편리한 교통을 위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참으로~”라는 말로 대화를 시작합니다. “정말일까?” “진짜 그럴까?” 이런 말로 시작을 하게 되면, 뒤에 이어질 모든 내용에 대한 깊은 불신과 의심을 심어놓게 되지요. 아울러, “모든 나무의 열매를~” 이 말 뒤에는 반드시 “마음껏 먹어라” “먹어도 좋다” 등의 말이 당연히 따라 나와야 하는 구조인데,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예상을 깨는 부정적 어휘를 배치함으로써 처음 심었던 불신과 의심이 더욱 자라도록 만들지요. 이는 앞서 언급한 ‘역설적 효과’처럼 계속해서 의심과 부정적인 생각(프레임)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듭니다. 그래서 첫 대화(1~4절)의 마무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로, 진실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결론으로 이끌고 말지요. 그러자 뱀의 유혹에 넘어갔음을 보여주는 하와의 반응이 나옵니다.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먹지 말라’ 당부하는 하나님의 애정 어린 마음은 잊혀지고 ‘먹지도, 만지지도’ 부정성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그래, 맞아, 그분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사실은 나를 억압하며 존중하지 않는 거야.’ “반드시 죽으리라”가 “죽을까 하노라”로 바뀝니다. 불신과 불평, 의심이 그의 생각을 가득 채웁니다.
두 번째 뱀의 유혹의 핵심은, 스스로 구원에 다다를 수 있다는 환상을 심습니다.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선악과(행위)를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속삭입니다. 더 성실히 규율을 지키고 더 치열하게 노력하면, 영적으로 우월해질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바벨탑을 높이 높이 쌓아 올리면, 언젠가는 하늘에 다다를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조금 더 선한 마음을 먹고, 세상에서 선한 일을 하면, 더 나은 인간이 되지 않을까.’ ‘나는 더 열심히 기도하고 인내하고 참고 있으니, 저들과는 달라.’ ‘매일 성경을 깊이 읽고, 매일 예배를 드리며, 찬송을 부르고, 힘에 부치게 헌금도 하고, 예배에 빠지지 않고, 교회에서 봉사에도 열심히 하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지켜주시고 복을 넘치도록 주시지 않을까.’ … 이런 방식은 우리를 영적으로 교만하게 만들고 다른 성도들과 비교하게 만듭니다. 다른 이들과 비교를 통해 상대적 우월감과 안도감을 느끼지요. 타인을 향해 지적하며 죄책감과 주눅 들게 만듭니다. 결국, 이러한 신앙은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거짓된 확신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의무관계로 바꿉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8) 이제는 하나님의 소리와 얼굴을 대하는 일이 반갑고 즐겁고 행복한 일이 아닙니다. 세상 누구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자애로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의 잘못과 허물을 낱낱이 드러내는 엄격하고 무서운 재판관이 된 것이지요. 그분 앞에 나오면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안아주시는 분이 아니라 꾸짖고 화내며 위협하는 존재가 보입니다. 그러나 피하고 숨고 도망칠 수밖에요.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눅15:18~19) 아버지와 아들이 아닌 주인과 종이 됩니다.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하고, 일한 만큼 대가를 얻는, 일을 잘하지 못하면 욕을 먹고 쫓겨나고, 잘하면 인정받는 철저히 기브엔테이크의 관계가 되고 말지요. 신앙생활은 이제 기쁨이 아닌 의무감 속에서 힘겨운 짐이 됩니다. ‘에덴’이라는 이름은 수메르어에서 기원한 것인데, “기쁨”이란 의미입니다. 그래서 불가타역 성경은 에덴동산 대신 기쁨의 동산으로 번역을 했지요. 기쁨의 동산, 주인의 삶이 “두려워서 숨었나이다” 고통의 땅, 노예의 삶으로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 현대적 뱀, 율법주의의 유혹
오늘날에도 뱀의 유혹, 뱀의 신학은 다양하고 교묘한 형태의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 “더 기도해야 한다.” “더 헌신해야 한다.” 강박적 신앙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고, 예배에 참여해야 하고, 시간을 아껴 기도해야 하고, 성경을 읽어야 하고, 십일조에 감사헌금에… 되도록 많이 헌금해야 하고, 힘을 다해 봉사해야 하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점점 해야 할 일이 많아집니다.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내가 부족하다” “충분하지 않다” 불안감이 더 커집니다. 뭔가 아직 내가 불안하고 평안하지 못한 것은 나의 헌신이, 나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 생각하게 되지요. 율법주의는 끊임없이 불안과 의심을 심어줍니다. 이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왜곡하고, 율법적 종교성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을 때,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 했던 태도와 유사합니다.
이런 신앙생활이 계속 이어지면, 겉보기에는 나무랄 데 없는 성실하고 좋은 신앙처럼 보이지만, 내면은 불안하고 공허한 껍데기의 신앙생활이 되고 말지요. 율법주의는 외적인 종교적 행위를 강조하지만, 하나님과의 내면적 친밀함은 부족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점점 더 냉소적으로 바뀌게 되지요. 비판하고 판단하는 것은 잘하지만, 정작 내 안에 사랑과 믿음은 점점 바닥이 나게 됩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 후 나무 뒤에 숨은 것과 같은 것이지요. 진정한 은혜의 관계 대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추구하는 모습이 되고 맙니다.
▣ 나가는 말
- 오직 은혜
율법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우리의 그 어떤 행위를 통해서도 구원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통해서만 우리를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을 믿으십시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예수를 믿는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닙니다. 자녀입니다. 자녀의 삶을 누리십시오. 자녀의 자리는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우리의 연약함이나 부족함과 관계없이 우리는 새로운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그분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 환희와 감격을 마음껏 누리는 삶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율법을 주셨지만, 그것은 부담이 아니라 보호와 자유의 길임을 알려주셨습니다. 먹지 말라고 한 동산 중앙의 한 나무가 아니라 동산 곳곳에 풍성하게 열려 있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아야 하지요. 우리의 삶은 고해가 아니라 에덴입니다. 이 놀라운 생명이 어떻게 고통일 수 있을까요. 이 아름다운 세상이 어찌 지옥일 수 있을까요. 살아 있어서, 생명이 있고, 존재하고 있어 누릴 수 있는 이 놀라운 세계와 삶을 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성도와 하나님의 관계는 피고인과 재판관의 관계가 아닙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신앙생활은 행위의 굴레가 아니라 친밀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행위가 아닌 관계 중심의 신앙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자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기에 아버지의 말을 따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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