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과 복
기원전 6세기는 구약성서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 당했으며, 이스라엘의 여러 지도자들이 5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일들이 모두 이때에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역사로 바꿔 말한다면 한일합방과 일본 식민시대를 거쳐 해방이 일어난 20세기 전반기와 비슷합니다. 국가적으로 위기에 처하면 민족주의자들이 나서는 것처럼 이스라엘에서도 이 시기에 많은 예언자들이 활동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기록한 예언자는 제3이사야입니다. 이사야 56-66장까지의 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벨론제국을 무너뜨린 신흥제국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기원전 538년에 예루살렘 성전재건 칙령을 선포했으며, 그 칙령에 따라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일단의 이스라엘 귀족들이 기원전 537년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기다려온 이스라엘의 독립과 귀향이 성취되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이제 모든 고생이 끝나고 새로운 이스라엘 재건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겠지요. 바로 이 시기부터 오늘 본문의 제3 이사야가 예언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늘 경험하는 것이지만 모든 꿈들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아니 꿈이 크면 클수록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망도 큰 법입니다. 성전 재건축을 위한 기초가 놓이기는 했지만 여러 가지 국제정세의 불안과 국내 경제의 파탄으로 인해서 오랫동안 그 사업이 원만하게 추진되지 못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기원전 515년에 예루살렘 성전 재건축이 완성되었지만, 그 뒤로도 이스라엘의 정작 중요한 문제들은 전혀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문제가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벌>
2b-5a절 말씀을 보십시오.
좋지 않은 길을 제멋대로 걷는 그들,
언제나 맞대놓고 나의 화를 돋우는 백성들,
동산에서 이방신에게 제사하고
벽돌 제단 위에 분향하는 것들,
굴무덤 속에 들어가 살며
으슥한 곳에서 밤을 지내는 것들,
돼지고기를 먹고 부정한 음식을 그릇에 담는 것들,
‘물러서 있어라, 부정 탈라, 가까이 오지 마라.’ 하며
거만하게 떠드는 것들
이 본문은 이사야의 눈에 비친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좋지 않은 길을 제멋대로 걷습니다. 이방신에게 제사합니다. 관리들은 으슥한 곳에서 사람을 고문합니다. 부정한 음식을 즐깁니다. 제사장들은 형식적으로 제사를 드리면서 자신이 거룩하다고 잘난 척 떠들어댑니다. 이런 모습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늘 반복되던 것이어서 별로 새로울 것도 없어 보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와 때를 어느 정도 알아야 하는 게 아닐까요?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그들이 그렇게 꿈에 그리던 포로귀환이 일어났다면 정말 정신을 차려야 했습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이렇게 특별한 때라고 한다면 한 마음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정의와 평화를 정착시켜나가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이스라엘이 옛날 조상들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니, 이사야의 마음이 어땠을는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다른 예언자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이사야도 이스라엘의 이런 정신적, 도덕적, 종교적 상황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의 못된 행동들은 바로 야훼 하나님의 ‘화’를 돋우는 것입니다.(3절) 그들의 행동 자체도 문제이지만 하나님이 그들에게 행했던 일을 생각할 때 더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특별히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에게 빌지도 않던 자의 청까지도 나는 들어주었고,
나를 찾지도 않던 자 또한 만나주었다.
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민족에게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 하고 말해주었다.
2절에는 “날마다 나는 배신하는 백성을 두 팔 벌려 기다렸다.”고 합니다. 예언자의 눈에 하나님은 거의 짝사랑에 가까운 사랑을 이스라엘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의 역사적인 사건이 바로 포로귀환입니다. 이스라엘은 조국 해방의 능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통해서 그런 일을 하나님이 이루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이사야는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그에 의하면 야훼 하나님은 “나 어찌 벌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랴?”(6b) “나를 모욕하는 그들의 죄를 조상들의 좌와 겸하여 벌하지 않을 수 없다.”(7a), “내가 그들의 소행대로 톡톡히 벌하리라.”(7b)고 말씀하십니다.
<복>
다른 한편으로 이사야는 야훼 하나님의 복을 선포합니다. 우상을 섬기고 고문을 일삼으며, 파렴치하게 사는 사람들 때문에 야훼 하나님의 종들까지 벌을 주지는 않는다는 뜻이겠지요. 그들에게는 오히려 복을 내리신다고 합니다. 그 당시 속담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즙이 배어나올 듯 싱싱한 포도송이를 보면 ‘복이 담뿍 들었다. 터뜨리지 마라.’ 하지 않느냐? 나도 나의 종들을 그렇게 아껴 망그러뜨리지 아니하고 그대로 위하리라.”(8절) 9b절 말씀도 이에 해당됩니다. “내가 뽑은 자들이 그 땅을 차지하고 나의 종들이 거기에서 살게 하리라.”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벌과 복을 나누어서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았으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벌을 내릴 수밖에 없지만, 야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복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벌과 복은 구약성서의 중심 주제의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은 신명기역사관을 그 토대로 하는 다른 구약성서의 본문과 비슷합니다.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복을 얻기 위해서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나가면서도 복을 받고, 들어오면서도 복을 받기 위해서 기도도 많이 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벌을 받을까 염려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목사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거나 십일조 헌금을 떼어먹었다가 사업이 망했다는 말들도 합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지옥 갈까 두려워서 열심히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오늘 본문도 분명히 하나님이 벌을 주신다고 했고, 복을 주신하고 했습니다. 과연 이 말씀은 옳습니까? 여러분은 그 말씀을 그대로 믿으십니까, 아니면 조금 다르게 생각하십니까?
솔직하게 이 세상의 돌아가는 모습을 들여다보면 벌과 복에 관한 성서의 가르침이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단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과 다니지 않는 사람의 삶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보면 됩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벌을 받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무조건 복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간혹 미국이 저렇게 잘 사는 것도 기독교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청교도들의 신앙이 미국 정신의 초석이기 때문에 잘 살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이에 반해서 동남아 국가들은 대개 불교를 믿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몇 년 전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났던 해일마저 종교 탓으로 돌리는 설교자들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고 한다면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에 복을 받아서 잘 산다는 말을 떳떳이 내뱉을 수는 없을 겁니다. 일본이 잘 사는 이유는 무엇으로 설명하며, 에티오피아가 못사는 이유는 무엇으로 설명합니까?
그렇다면 벌과 복에 관한 이 말씀은 틀렸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 걸까요? 조금 생각이 있는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부정, 부패, 부도덕, 폭력 등등, 삶을 파괴하는 사람들이 결국 그런 잘못이 드러나서 감옥에 간다거나 아니면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것이 곧 하나님의 벌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주변에서 제멋대로 살다가 인생을 망친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긴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이 늘 옳은 것은 아닙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 고생하는 걸 우리는 자주 봅니다. 선천적으로 불치병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건가요? 하나님이 벌도 주시고 복도 주신다면 이렇게 이유 없이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삶은 누가 책임을 진다는 말인가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은 벌과 복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론적인 해석입니다. 지금 이사야가 선포하는 벌과 복은 당장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거나, 또는 못 먹고 못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참여하는가, 아니면 배제되는가 하는 차원의 말씀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어쩌면 이 해석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성서의 메시지를 가장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길인지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우리에게 무엇이 벌이고 복인지 깊이 생각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돈과 지위가 아니라는 건 분명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이라면 가장 결정적인 벌은 예수 그리스도와 떨어지는 것이며, 가장 결정적인 복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으며, 그 부활 생명과의 단절보다 더 큰 벌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야말로 복의 원천입니다.
여기서 설교를 끝내도 좋습니다만, 오늘 본문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벌과 복을 가리키고 있는가 하는 점을 짚지 않고 그냥 설교를 끝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귀한 메시지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성서텍스트가 가리키고 있는 게 아니라면 조금 곤란하니까요. 오늘 본문을 조금 더 보십시다. 우리는 본문에서 벌과 복이 예수님과 연관된다는 그 어떤 정보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사야는 분명히 기원전 6세기 포로귀환 이후의 혼란한 상황을 근거로 해서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벌은 이전에 있었던 예루살렘 함락과 같이 아주 구체적인 것이고, 복은 구체적인 가나안 땅과 후손입니다. 그가 기대하는 새로운 예루살렘은 정의롭고, 평화롭고, 정직한 예배가 드려지고, 억울한 사람이 없는 이스라엘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에 따르면 행실이 못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삶의 터를 잃을 것이며, 말씀을 따르는 주의 종들은 그 터를 보존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가리키는 벌과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벌과 복에 그대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게 분명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영적인 딜레마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전혀 새로운 생명을 향해서 살아갑니다. 그 생명은 우리가 무슨 노력으로도 만들어 내거나 처리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배타적인 통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오늘의 최첨단 유전공학으로 도달할 수 없는 궁극적인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거기서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고 믿으면서, 바로 여기에 삶 전체를 걸고 살아갑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은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벌을 내리시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을 내리신다고 선포합니다. 이 두 주장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 사이에는 틈이 있습니다. 전자는 하늘의 관점이라면, 후자는 땅의 관점입니다. 전자는 위로부터의 구원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아래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전자에서는 사람의 노력이 필요 없지만 후자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서의 가시적인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사이의 틈을 놓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이 틈을 매워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의 복음을 믿고 따르는 자녀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을 읽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영적인 긴장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의 벌과 복을 넘어서면서 동시에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고 궁극적인 의미를 얻도록 최선으로 살아가야합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삶인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새로운 생명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우리는 이 땅에서 벌과 복 때문에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간다면 참된 벌이 무엇이며, 참된 복이 무엇인지 언젠가는 드러날 것입니다. 그것이 아직은 우리 눈에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은폐의 방식으로 이미 명백한 사실이 되었습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모든 사람이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그 사실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 이 땅에서 실행될 심판의 순간입니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무엇이 벌이며, 무엇이 복인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그것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복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벌과 복의 겉모습에 휘둘리지 말고,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기에 온 영혼을 기울이십시오.
0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