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은총
신 4:1-2, 6-9, 성령강림후 열넷째 주일, 2015년 8월30일
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6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 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8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9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
3천5백 년 전 이집트에서 소수 민족으로 설움을 받던 고대 이스라엘이 탈(脫)이집트를 감행하여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생활을 마친 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지켜야 할 규례와 법도를 길게 설명했습니다. 그 내용이 바로 구약의 신명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약속의 땅으로 생각했지만 거기서의 삶이 녹록한 건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곳에 자리 잡고 있던 여러 부족들과의 생존 경쟁을 피할 수 없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 신앙이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지난 시절 시집갈 딸에게 시댁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자세하게 가르치는 아버지의 심정이 여기 신명기에 담겨 있습니다.
율법의 세계
신명기가 말하는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얻고, 불순종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상 외로 단순합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구호처럼 유치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신명기의 영적 세계는 깊고 아득합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를 경험한 사람, 즉 생명의 절대 세계를 경험한 사람은 순종과 불순종이라는 이 말을 이해합니다. 신앙은 근본적으로 절대적인 겁니다.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은 자신의 이성, 지성, 합리성, 논리 내세우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순종할 뿐입니다. 순종이 아닌 것은 모두 불순종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욥에게서 우리는 그런 영적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모세도 바로 그런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호렙 산에서 불이 붙었지만 타지는 않는 가시떨기나무 현상 앞에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거룩한 대상 앞에서 그는 신을 벗었습니다. 피할 수 없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누구냐, 이름을 알려 달라,’ 했지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답변만 듣습니다(출 3장). 세상 언어와 개념과 범주로 담아낼 수 없는 어떤 분을 경험한 그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생활을 시작하는 즈음 화산이 폭발하여 구름과 불길과 연기가 가득한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으면서 그는 하나님을 향해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 달라.’ 했지만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는 답변만 듣습니다(출 33장). 자신을 다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즉 은폐의 방식으로 찾아온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도 바로 그런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을 우리는 오늘 설교 본문(신 4:1-2, 6-9)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1,2절을 들어보십시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본문은 ‘규례와 법도’를 듣고 실천하라고 준엄한 명령을 내립니다. 여기서 말하는 규례와 법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규칙들입니다. 보통 율법이라고 합니다. 율법의 총체는 십계명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뒤의 신 5장에 십계명이 나옵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로부터 시작해서 ‘네 이웃을 ... 탐내지 말지니라.’로 끝납니다. 십계명에 율법 정신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이것은 한 국가의 헌법과 같습니다. 헌법은 그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합니다. 국가에 헌법만 있는 게 아니라 온갖 법률과 시행세칙 등이 따라오는 것처럼 구약의 율법에도 십계명 외에 여러 가지 규례와 법도가 나옵니다. 모세는 그 모든 것을 잘 지켜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규례와 법도, 즉 율법을 지켜야 할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1) 산다. 2) 가나안에 들어간다. 3) 그곳의 땅을 얻는다. 이걸 한 마디로 줄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통해서 가나안 땅에 두 발을 딛고 편안히 살게 될 것이라는, 쉽게 말해 잘 먹고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에는 그런 삶이 곧 구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율법 민족이라 불릴 정도로 율법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오늘 본문 신 4:8절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이어 9절에서 이 율법을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면서 자손들에게도 알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모세는 무엇을 근거로 율법이 이스라엘 민족의 살 길이라고 선포한 것일까요? 그런 주장은 정말 옳을까요? 고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면 답이 나옵니다. 그들은 광야생활을 하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나안에서 이룬 것이 많습니다. 다른 나라처럼 왕정국가를 이루고, 예루살렘 성전도 건축할 수 있었습니다. 자수성가한 어떤 사람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거기서 늘 성공적이지는 못했습니다. 주변의 제국으로부터 끊임없는 수난을 당했습니다. 선지자들은 그게 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지만, 순종했다고 해서 모든 일이 순탄하게 풀렸을 거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경우로 바꿔서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포함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 말씀대로 산다고 해서 모든 일들이 늘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본문은 왜 율법 준수가 생명의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모세의 말과 하나님의 말을 우선 구분해야 합니다. 모세의 말은 인간의 말기 때문에 그걸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말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신 4:1절은 율법을 모세의 가르침이라고 하고, 2절은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이라고 합니다. 모세의 말과 하나님의 명령이 다르다는 사실을 성경기자들도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십계명만 놓고 봅시다. 이건 분명히 이스라엘의 역사에 그 뿌리가 놓여있는 겁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이스라엘 민족은 가장 가치 있는 명제를 열 가지로 완성한 것입니다. 신약성경도 이런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닙니다. 모두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고, 사람의 손으로 기록된 글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이게 과연 말이 되나요? 여기에는 무슨 근거가 있는 걸까요?
하나님에게는 사람과 같은 방식의 말과 글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지만, 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말과 글이 아니라 창조의 원초적 능력을 가리킵니다. 사람만이 말을 하고 글을 씁니다. 목사의 설교도 목사 자신의 말이지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결코 아닙니다. 다만 그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 초등학교 교실에서 벌어진 일을 상상해보세요. 선생님이 급한 일로 교실을 떠나면서 반장에게 학급 일을 맡겼습니다. 반장이 선생님의 형편과 선생님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하기만 한다면 그 말은 반장의 말이 아니라 선생님의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게 쉬운 게 아닙니다. 반장이 아무리 선생님의 뜻을 정확하게 전한다고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잘못 전할 수도 있습니다.
모세의 경우를 봅시다. 그는 호렙 산과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즉 절대 생명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 경험으로부터 자기 민족이 나가야 할 방향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하나님을 인간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어 너머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모세의 딜레마입니다. 자신의 하나님 경험은 분명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사실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율법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켜야 할 도리가 바로 율법입니다. 그걸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오늘의 신앙생활도 기본적으로는 이런 차원입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기도드리고,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읽고 헌금을 드립니다. 교회 밖에서도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도록 노력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목사의 설교는 물론이고, 또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곧 실제 하나님의 명령 자체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예로 든 선생님과 반장의 경우를 다시 보십시오. 반장이 선생님의 생각과는 다르게 오후 수업은 없다고, 또는 반대로 오후 수업 뒤에 대청소를 해야 한다고 전할 수 있었습니다. 반장이 선생님의 생각을 어림짐작으로 전했을 수도 있습니다. 반장이 아무리 정확하게 전했다고 하더라도 말 자체의 한계로 인해서 선생님의 뜻이 바르게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을 문자적인 차원에서 그대로 다 지킬 수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폴란드 영화감독 키에슬로프스키의 <데카로그>를, 이 제목은 십계명이라는 뜻인데,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십계명은 인간의 온갖 뒤틀린 욕망을 꿰뚫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그걸 얼마나 지켰느냐, 또는 지키지 못했느냐의 문제라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를 폭로하는 규범입니다. 십계명 앞에서 우리 모두는 절망합니다. 우리를 절망하게 만드는 것에 매달리는 것은 죄입니다. 율법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이 문제를 가장 치열하게 고민한 사람이 바울입니다. 그는 모태 유대인이면서 바리새인이었고 율법 박사로서 율법에 자기 인생을 건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율법에 충실했지만 거기서 생명을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즉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자기의 한계만 드러났지 하나님으로 인한 궁극의 기쁨과 평화가 경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로마서에서 율법의 본질을 정확하게 진단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한걸음 더 나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롬 4:15).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모든 신경을 거기에 쏟아야 합니다. 어느 한 순간도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수능시험에 목을 매는 입시생과 같습니다. 점수가 조금만 내려가도 불안하고, 조금 올라가면 그걸 유지하거나 더 올리려고 노심초사합니다. 끝없이 자기를 성취해보려는 욕망이 거기에 작동되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죄라고 바울은 진단합니다. 죄로 인해서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늘 제3 독서인 막 7장에는 율법주의의 한 전형이 나옵니다. 율법의 전문가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왔다가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 먹는 것을 보고 예수님에게 ‘당신 제자들은 왜 율법을 지키지 않느냐.’고 따졌습니다. 제자들의 행동은 율법을 위반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문제 제기는 틀린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당신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소.’ 하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볼 때 율법은 사람의 전통이었습니다. 율법을 완성한 모세도 사람이니 사람의 전통이라는 말은 옳습니다. 사람의 전통에 매달리면 결국 하나님의 계명을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은 폐기처분해야 할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인간 사회의 유지는 불가능합니다. 법이 없으면 국가 운영이 어떻게 될지, 교칙이 없으면 학교 운영이 어떻게 될지를 보면 답이 나옵니다. 교회도 교회법이 없으면 굴러가지 않습니다. 예배만 해도 그렇습니다. 예배 순서 없이 신자들이 함께 둘러앉아서 은혜가 느껴지는 대로 서로 간증하고, 성경 읽고, 설교하고, 찬송 부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 이에 비해서 예전 중심으로 드리는 우리교회의 예배는 율법적인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법과 질서와 규범들은 나름으로 공동체를 유지하는 근거들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해서 최후의 심판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실현되기 전까지는 일종의 필요악으로서의 율법이 없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지금 다 그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은총의 세계
구약종교인 유대교는 율법에 신앙의 거점을 잡았다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신앙의 거점을 잡았습니다. 이 대목에서 다시 바울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그는 철저한 유대교인이었다가 철저한 기독교인으로 돌아선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게서 정확한 대답을 들을 수 있습니다. 율법의 기능이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짚은 뒤에 바울은 전혀 다른 차원의 어떤 궁극적인 사실을 언급합니다. 롬 3:21-24절입니다. 공동번역의 내용을 발췌하는 식으로 읽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무런 차별도 없이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 주셨습니다.
신앙의 중심이 율법에서 은총으로 옮겨졌다는 뜻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발언을 정신 나간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율법적으로 사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자유주의자이든 공산주의자이든, 남한 사람이든 북한 사람이든, 지성인이든 일자 무식쟁이든 아무 차별 없이 죄에서 풀어주셨다는 발언을 이해하고 동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율법에 충실했던 사람들과 모범생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은총의 능력을 이해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이상한 사람들과 자기가 동일 취급을 받는다는 게 못마땅한 겁니다.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안타깝게도 그는 아직 하나님의 은총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볼 때 (율)법은 가깝고 은총은 멉니다. 세상의 작동 원리는 실체로 다가오고, 하나님은 관념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혼란스러워합니다. 과연 은총으로 이 세상을 살아낼 수 있는 거야, 믿음만으로 세상을 버텨낼 수 있는 거야, 하고 말입니다. 설교자로서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우선 은총의 빛을 바라보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만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들어선다는 이 놀랍고 충격적인 사실을 영혼의 깊이에서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삶의 원리인 법이, 즉 세상살이가 눈에 보일 겁니다. 거꾸로 은총의 빛이 희미하면 율법과 죄의 질서에 숨이 막힐 겁니다. 악하면 악한대로, 착하면 착한대로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 아닌 것에 지배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의 빛과 능력에 기대서, 한걸음 더 나가 그 은총의 화염에 휩싸여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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