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자유
마 5:13-20, 주현절 다섯째 주일, 2014년 2월9일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신약성경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 2천 년 전 초기 기독교의 구체적인 역사에서 나온 겁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을 이해하려면 당시 기독교의 처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당시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신앙의 기초를 다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속했던 이들이 유대교 안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들이 유대교 안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책임이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있었지만, 동시에 산헤드린이라는 유대교 최고 법정에도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빨리 유대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게 이치적으로 옳습니다. 그들이 여전히 유대교 안에 머물러 있었다는 게 오늘 우리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나 당시에는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원래부터 유대교인들입니다. 유대교를 떠난다는 건 아예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대교 안에서 하나의 파를 형성했습니다. 유대교 안에 있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처럼 나사렛파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유대교 당국도 나사렛파를 인정했습니다. 이들 초기 기독교는 그렇게 유대교 안에 머물면서 재림 공동체로서의 신앙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은 유대교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곧 율법에 따라서 사는 것과 같았습니다. 율법의 내용은 주로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요약은 십계명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기본적으로는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 이방인들이 들어오면서 율법에 대한 문제가 복잡해졌습니다. 이방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 즉 복음에만 신앙의 중심을 두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계층과 여러 민족에 속한 이들이 교회에 들어오면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서 초기 기독교 안에 여러 분파가 생겼습니다. 크게 나누면 유대 기독교와 이방 기독교입니다. 유대 기독교는 율법을 지키면서 복음을 따르는 교회이고, 이방 기독교는 율법 없이 복음만 따르는 교회입니다. 이방 기독교는 결국 유대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했습니다. 이들의 대표자는 바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과 동생들이 주축이 된 유대 기독교는 신학적인 고민에 빠졌습니다. 바울처럼 유대교의 율법을 부정하고 완전히 딴 길을 갈 수는 없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노골적으로 유대교와 똑같이 율법을 강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복음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겁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들의 신학적인 고민과 나름의 대안 모색이 오늘 설교 본문인 마 5:13-20절에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17,18절을 먼저 읽겠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묘사된 이 문장에는 바로 앞에서 설명한 초기 기독교의 많은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율법 폐기론, 율법 해체론, 무율법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입니다. 율법 폐기론자들의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유대교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 주장의 단초를 우리는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 벌어진 안식일 논쟁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막 2:23-28절에 따르면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이삭을 잘라서 먹었습니다. 그걸 본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걸었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는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구약의 어느 한 사건을 예로 들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은 기본적으로 율법 이데올로기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킵니다. 즉 복음은 인간을 자유롭게 합니다. 이걸 놓치면 기독교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복음이 왜 자유인지는 여러분이 잘 아실 겁니다. 다른 복잡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예수를 믿고 의로워지고 구원받는다는 사실 하나만 생각해도 이건 분명합니다. 이것은 바울도 말한 거고, 루터도 말한 겁니다. 칼 바르트도 말한 겁니다. 바르트는 <복음주의신학 입문>에서 복음주의신학의 핵심을 ‘자유’라고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의와 구원이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이뤄진다면 인간은 모든 수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세상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모든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실제로 가능하지도 않은 율법을 성취해야 한다는 수고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습니다. 이 복음의 자유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문제는 복음의 자유를 극단으로 끌고가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들은 복음을 근거로 율법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계 2:6,15절에 나오는 니골라당이 그런 이들입니다. 구원받았으니 모든 윤리적 책임으로부터 해방 받았다는 겁니다. 그들은 도덕, 윤리, 법도 무시합니다. 우리나라의 구원파도 성격이 비슷합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과거와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기 때문에 사죄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완전히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런 분들이 우리교회 예배의 사죄기도라는 순서를 보면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이런 기도를 드린다고 생각하겠지요.
극단적인 율법 폐기론자들의 잘못은 복음의 자유를 오해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복음의 자유는 유기적이고 다층적인 삶의 구체성과 유리되었습니다. 자신의 자유가 다른 이들의 자유와 충돌한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겁니다. 한편으로는 순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숙한 생각입니다. 오늘 교회에 올 때 차를 끌고 오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예배 시간은 촉박한데 신호등은 자꾸 걸립니다. 신호등으로 인해서 자신의 자유가 훼손되는 걸 느낄 겁니다. 신호등만이 아니라 다른 차들도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 다른 차들이 자꾸 끼어들기를 합니다. 내가 끼어들기를 할 때는 다른 차가 야박하게도 틈을 주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겸손하고 인간성도 좋은데 운전대만 잡으면 난폭해지고 성질이 사나워지는 분들도 있습니다. 운전자들의 자유가 서로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충돌을 잡아주는 게 신호등이고 교통법규입니다. 교통법규가 우리의 자유를 훼손하니 없애버리자는 주장이 바로 율법 폐기론입니다.
이 사실을 뚫어본 마태복음 기자는 오늘 본문 17절에서 예수님이 율법을 폐기하려고가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일점일획도 간과되면 안 됩니다. 이런 입장을 20절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피력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서 ‘의’는 율법의 핵심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복음으로 자유를 얻은 기독교 신자라고 하더라도 율법을 무시하면 안 되고, 더나가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훨씬 더 율법적이어야 한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여기서 서기관은 율법학자이고 바리새인은 율법 수행자들로서, 모두 율법에서 전문가들입니다. 저는 앞에서 마태복음 공동체가 신학적인 고민에 빠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율법 준수를 요구하는 유대교와의 관계설정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이 구절에서 마태복음 공동체의 입장을 읽을 수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율법주의를 대표하는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보다 기독교인들이 훨씬 더 높은 차원에서 율법의 본질에 부합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제자들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꼼꼼히 지켜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누가 더 안식일을 잘 지키는지, 누가 더 십일조 헌금을 잘 드리는지 경쟁해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그야말로 율법주의입니다. 사람의 업적을 기준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점수를 얻으려는 태도는 복음 공동체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20절이 가리키고 있는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도 율법 준수라기보다는 율법의 본질에 천착하라는 뜻입니다. 율법의 본질은 의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의는 유대교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앞서야 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율법을 그대로 지키는 게 아니면서 어떻게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초기 기독교가 의를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했다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합니다. 그들에게 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율법의 완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7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은 율법을 폐기하려고 온 게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율법 폐기가 아닌 건 맞지만, 율법 실천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실천하려고, 그런 모범을 보이려고 오신 게 아닙니다. 그런 정도였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유대교의 뛰어난 랍비에 해당되지 그리스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율법의 완전한 성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온전한 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율법은 좋은 것이기는 하되 의의 길은 아닙니다. 의와 비슷한 것을 맛보게는 하되 의 자체에 이르게 하지는 못합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가능하지 않은 것을 요구함으로써 자유를 손상시키기 때문입니다. 오늘 많은 신자들이 복음을 율법처럼 따릅니다. 자기의 믿음을 업적으로 판단합니다. 자기를 닦달합니다. 마치 수능점수를 높게 따지 못하는 학생들이 자기를 닦달하듯이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을 통해서 의를 얻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완전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은 사람은 이미 율법의 완전을 이룬 사람이며,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에 이른 사람입니다.
이런 설명이 추상적으로 들리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가장 실감 있게 들리는 게 돈벌이니까 그걸로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연봉 3천만 원인 사람과 1억 원인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액수의 차이만 놓고 사람과 그의 삶을 평가하는 건 율법주의입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어느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1억 원의 연봉도 2억 원의 연봉 앞에서는 시시해보이니까요. 삼시 세끼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 기준으로 놓고 삶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연봉의 차이는 별로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3천만 원으로도 맛있게 먹는 사람이 있지만 1억 원으로도 소화불량에 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왕이면 1억 원을 받고 밥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하겠지요. 맛있게 먹는다는 사실이 그의 영혼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면 그 차이는 미미하게 됩니다. 그걸 경험한 사람은 자신의 연봉을 의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도 이와 비슷한 겁니다. 복음의 세계로 들어간 사람은 율법을 이미 성취한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에서 마태복음 공동체가 유대교와 선을 긋고 떠난 이방 기독교와 신학적인 입장이 다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가능한 대로 유대교와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점점 더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마태복음 공동체는 오늘 분문에서 자신들의 신학적인 견해를 분명하게 피력한 것입니다. 율법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율법을 복음의 차원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이들은 이제 복음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더 강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음 안에서 율법이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미 의로운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공동체가 이런 문제에서 마지막으로 풀어야 할 숙제는 기독교인들이 유대인 및 세상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율법 폐기론자들이라거나, 윤리 폐기론자들이라는 오해 말입니다. 바울도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주의를 경계하면서도 기독교인의 윤리적 책임을 역설했습니다. 즉 기독교인들은 율법주의자들보다, 그리고 도덕교사나 윤리선생보다 더 바른 삶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마태는 오늘 본문 13-16절에서 설명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으로 불립니다. 고대사회에서 소금은 태양과 더불어 생존에 절대적인 요소였습니다. 제자들이 세상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금과 빛처럼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걸 다시 율법의 요구로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억지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소금과 빛이라는 존재론적 능력이 우선입니다. 소금이 소금으로 있으면 당연히 짠 맛이 날 것이고, 이로 인해서 세상은 소금기를 머금게 됩니다. 태양은 태양으로 존재하면 충분하지만 일부러 빛을 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존재론적으로 새로워진 나무는 당연히 좋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마 7:15-18). 바울은 고후 5:17절에서 존재론적 변화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많은 신자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게 옳은지 잘 모르겠다고 하소연합니다. 또 구체적으로 교회생활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도 판단하기 어려워합니다. 저도 목사의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는 게 옳은지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복음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으로만 모든 실제적인 삶의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과 율법, 그리고 자유와 책임은 긴장관계에 있습니다. 이런 긴장관계를 단숨에 해소하고 도사처럼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16절 말씀에 기대서 이렇게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복음의 자유를 실제로 알고 믿고 산다면 여러분의 삶이 소금과 빛으로 드러날 것이며, 세상은 여러분의 그런 삶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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