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3:21-31
'법'을 넘어서
법의 한계
우리는 사람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을 때 “법대로 하자!”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이 말은 ‘법치주의’가 최선이라는 의미이겠지요. 사람들이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회에 문제가 생긴다고 주장은 일리가 있습니다. 작게는 시험 보는 학생들의 부정행위(컨닝)에서부터 크게는 뇌물을 통해서 탈세를 한다거나 불법적인 부동산 투기 같은 행위들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물론 인간 사회 치고 이런 불법이 없는 곳은 없겠지만 경제 수준에 비추어 우리나라에는 이런 부정, 불법적인 현상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아마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권력을 장악했던 군사정권과 물불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된다는 경제지상주의가 너무 오랫동안 이 사회를 지배했다는 데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최소한 이 사회가 건전하게 작동되려면 ‘법’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은 옳습니다.
그러나 이런 법실증주의의 내면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런 주장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는 불법적이고 파렴치한 행위보다는 오히려 합법적인 행위가 훨씬 심각한 게 아닐까요? 유신헌법도 법이었습니다. 인혁당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대법관들은 억울하게 간첩 누명을 쓴 사람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법을 신성하게 생각하는 법관들이 그 법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평생 감옥에 넣거나 죽게 한 일은 그렇게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도 이런 합법을 가장한 불법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접어두고, 장애인 고용촉진법에 의하면 300명(?) 이상의 기업체는 장애인을 3%(?) 이상 고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법을 지키는 기업체는 거의 없습니다. 대신 벌금을 내는 것으로 합법 행세를 합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이 사회의 비리를 고발하거나 우리 사회의 비인간적인 행태를 한탄하려는 게 게 아닙니다. 노골적으로 법을 무시하는 행위나 합법을 가장한 악한 반사회적 행위는 법이 잘못되어서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는 인간 자체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국회에서 좋은 법을 만드는 일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런 것으로 인간의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법은 이 사회를 꾸려가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일 뿐이지 인간 자체를 변화시키는 데는 무력하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별로 능력이 없는 법을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면 결국 우리는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율법의 한계
유대인의 율법과 로마인의 법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던 바울도 역시 이런 법의 한계, 즉 율법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이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율법서와 예언서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21절). 바리새인 중에서도 각별히 율법에 전념했던 바울이, 또한 지중해 연안의 많은 식민지가 체계적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한 로마법의 위대성을 익히 알고 있던 바울이 이렇게 율법의 한계를 주장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얻는 데에 율법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바울의 이 주장은 무슨 의미일까요?
율법은 인간이 실천하면서 살아야할 가장 중요한 가치들의 총체입니다. 율법에는 기도, 금식, 헌금 같은 각종 종교적인 의무 규정이나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와 병든 사람을 돌보는 윤리적 행위가 포함됩니다. 이 율법은 그야말로 가장 모범적인 사람이 취해야 할 행동 규정입니다. 지금도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들은 한결같이 이런 율법의 귀한 가치들입니다. 기독교인답게 양심적으로 살고, 이웃에게 친절하게 하고, 심지어는 사회의 높은 자리에 올라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옳은 주장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똑똑하고 가장 착하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는 모범생이 된다면 나쁠 건 없겠지요.
그런데 바울은 그런 모범생들이 지켜야 할 율법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확신합니다.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율법과 아무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씀일까요? 그럴 리는 없습니다. 바울은 율법 무용론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것의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기껏해야 상대적인 가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율법은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일단 그렇게 보이긴 합니다. 모범적이고 가치 있는 행위는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고 간혹 우리 모두를 감동시킨다는 점에서 장려할만합니다. 그러나 그런 행위를 절대화하게 되면 그것은 없는 것보다 오히려 못하게 됩니다. 절대적이지 않은 것을 절대화하면 결국 우리의 삶이 왜곡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이 왜 상대적인지 아시겠지요? 이 말은 곧 인간의 행위 자체가 그런 상대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기도를 생각해봅시다. 어떤 기도가 가장 아름다운 것일까요? 어떤 교회에서는 제단에 기도의 불을 끄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년 내도록, 혹은 수년에 걸쳐서 신자들이 릴레이 방식으로 기도를 합니다. 혹은 철야기도회를 열기도 하고, 금식기도까지 합니다. 어떤 기도가 가장 귀한 기도일까요? 하루에 1분 기도드리는 것과 1시간 기도드리는 것과 5시간 기도드리는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그런 시간의 차이는 단지 상대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상대적인 차이를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면 결국 기도의 본질이 훼손될 뿐입니다.
이 문제를 우리의 일상과 연결해서 설명해볼까요? 학생들이 중간시험이나 학기말 시험에 좋은 점수를 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1등과 10등과 30등이 갈립니다. 다른 친구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점수를 잘 받았으니까 칭찬을 받는 게 마땅하지만 그런 차이도 역시 상대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했다는 것과 지방의 이름 없는 대학교를 졸업했다는 것도 상대적인 차이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인간의 행위는 조금 잘나거나 조금 못난 정도의 차이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이기 때문에 그 분과의 관계도 역시 절대적입니다. 즉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며 생명의 완성이라는 뜻입니다. 그 분 앞에서는 기도를 조금 많이 했거나 적게 했거나, 조금 더 건강하거나 약하거나, 조금 착하거나 조금 못됐거나 큰 차이가 없습니다. 제 두 딸이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똑같은 딸인 것처럼 하나님은 절대적인 차원에서 우리와 관계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의
이런 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만이 주도적으로 일으키실 수 있는 사건이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율법은 우리가 만들어가는 의에 불과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스스로 나타내십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의 행위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해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 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과거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참고 눈감아 주심으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고, 오늘날에 와서는 죄를 물으심으로써 당신의 정의를 나타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올바르시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신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25,26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곧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에는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참으셨지만 이제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그 죄 문제를 해결했다는 뜻입니다. 교리적인 설명이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에 직접 와 닿지 않겠지만, 이런 바울의 진술은 단지 형식적인 교리에 머무는 게 아니라 인간과 그 역사 전체를 정확하게 뚫어본 사람이 언급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는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라 할 수 있는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의 주도적인 행위를 통해서만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게 곧 하나님의 의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충분히 생각하고 결단해야합니다. 나의 의에 의존해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의에 의존해서 살아갈 것인가?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의에 의존해서 살아간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우리는 온갖 열정을 다 보입니다. 자기 교회가 부흥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어서 몸을 불사를 정도로 수고합니다. 이런 일들은 모두 우리의 의에 치중하는 것들입니다. 교회생활이 어느 정도로 심각하게 남에게 보이는 일에 관심을 보이는가에 관해서는 여기서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훨씬 중요한 문제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인정받으려고 지나치게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말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식자랑에 열을 올리는 교회 지도자들이 어디 한둘인가요? 좋은 대학에 갈 수만 있다면 자기 자식들을 예배에도 빠지게 할 정도로 악착스럽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교회 안이나 밖이나 하나님의 의보다는 인간의 의를 강화하면서 살아갑니다.
믿음을 통한 의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우리를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놓이게 한다면, 이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에 대한 답을 모르는 기독교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 ‘믿음’입니다. 바울의 목소리를 들어보세요. “그러니 우리가 내세울 만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되찾게 되었습니까? 율법을 잘 지켜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27,28절). 놀라운 고백이지요? 믿음으로만 우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칭의는 하나님의 선물, 은총입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대답을 알고 있긴 하지만 그 의미까지 정확하게 아는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의미를 안다고 하더러도 그렇게 실제로 사는 사람들은 더더욱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게 무엇인지 전혀 모를 뿐만 아니라 알려고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의를 통해서 우리가 의로워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인식론적 결단입니다. 자신의 삶에 하나님의 의, 그의 생명, 그의 통치가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제로 받아들이고, 그의 통치에 우리의 삶을 완전히 일임하는 삶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쉬운 설명인 것 같지요? 말은 쉬운지 모르지만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신뢰하려고 하지 생명의 영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지 믿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이 많습니다.
2000년 일년 동안 우리 가족이 유럽 여행을 하면서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어떤 때는 잠자리를 구하지 못해서 고속도로 휴게소에 차를 주차해놓고 차 안에서 자기도 했습니다. 밤새도록 퍼붓는 비와 천둥 번개 속에서 말입니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그때 고1이었던 지예는 이런저런 일이 걱정되었지만, 초등4년이었던 지은이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옆에 있는 것 자체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예화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기초는 될 것 같습니다. 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늘 한정입니다. 더구나 나를 성취하거나 나를 내세우는 삶의 태도는 우리를 결국 좌절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게 곧 율법의 본질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분은, 즉 이 생명을 끌어가는 분은 곧 하나님뿐이십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이해하고 믿고, 그 하나님의 의에 우리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삶이 곧 믿음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31절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우리는 율법 해체론자들이 아닙니다. 율법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것 너머의 세계의 우리의 모든 삶을 투자하는 게 우리 기독교인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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