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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보이지 않는 삶 (삿 11: 29–40)

2025년 11월 17일 예배영상 https://www.youtube.com/live/lcjuO-9f4VA?si=Ooeo5ysPpyh2pCMf

 

▣ 들어가는 말

- 스틸 라이프

한 남자가 있습니다. 영국 런던 남부, 작은 구청 사무실의 공무원 존 메이. 그는 고독사한 사람들의 장례를 치러주는 일을 합니다. 세상과 단절된 사람들, 고독하게 죽음을 맞은 이들의 마지막을 마음을 다해 대합니다. 아무도 오지 않는 장례식을 위해 그는 고인의 흔적을 꼼꼼히 살펴 그의 삶에 대해 의미를 찾고 정성을 다해 추도문을 작성하고, 고인을 위한 장례식에 쓰일 음악을 고릅니다. 그리고 장례식을 진행하지요. 추도문이 낭독되고 성가가 고요하게 울려 퍼집니다. 고인의 마지막을 추모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장례식을 집례하던 신부가 묻습니다. “오늘도 아무도 안 왔나요?” 그는 조용히 대답합니다. “저는 왔습니다, 신부님.”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히 했으나, 효율적이지 않은 일 처리, 쓸데없이 비용이 많이 드는 그의 일하는 방식 때문에 메이는 상사에게 해고 통지를 받습니다. 해고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처리해야 하는 죽음(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 건너편에 살던 알코올중독자 빌리)에 대해 그는 마음을 다합니다. 빌리와 관련 있는 사람들(옛 직장 동료, 군대 동기, 노숙자들, 사랑했던 여인과 딸 등)을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찾아 만납니다. 그들에게 빌리의 이야기를 듣지요. 메이의 그런 노력 덕분에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던 ‘빌리’의 장례식에 많은 이들이 참여하여 마지막 길을 배웅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장례식 직전에 메이는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말지요. 그리고 메이의 장례식에는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아무렇게나 묻어버린 그의 무덤에 많은 사람이 하나, 둘 모여들어 메이의 축음을 추모합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메이가 마음을 다해 장례를 지내주었던 사람들의 영혼들이지요.

이 영화는 이탈리아 ‘우베르토 파솔리니’ 감독의 『Still Life』(2013)입니다. 잔잔하면서도 사회적 소외, 고독, 존재의 가치 등을 섬세하고 묵직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감독이 주목한 것은 그저 고독한 ‘죽음’이 아니라 ‘살아 있지만 존재감이 없는 삶’,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존재’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이들’ 등, ‘일상의 세계에서 존재의 가치가 너무나 흔히 잊히고 무시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존재와 비존재” “기억과 망각”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잊힘에 관한 두려움

‘스틸 라이프’는 원래 미술 용어인데, 우리말로 ‘정물화’를 뜻하는 회화의 한 장르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물체를 그리는 것이지요. 미술사에서 정물화는 단순한 ‘사물 묘사’가 아니라, 그 안에 인간의 삶과 죽음, 시간, 허무, 존재에 대한 상징을 담는 장르로 발전합니다. 예를 들어,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는 해골, 시계, 시든 꽃 같은 것을 통해 인생의 덧없음(vanity of life)과 죽음을 상징하기도 하지요. 바니타스는 라틴어로 “헛됨, 덧없음, 허무”를 뜻하지요. 아마도 삶에 있어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을 포착해서 그림으로 남겨 보지만, 결국 금세 사라지는 찰나의 순간일 뿐이라는 의미겠지요.

거울을 보며 ‘나도 나이가 들었구나’ 한숨지을 때가 있지요. 잊히고 점점 희미해져 간다는 걸 인식할 때, 슬퍼지고 씁쓸해지지요. 스틸 라이프는 어쩌면, 바로 이런 사람들, 존재하지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런 제목을 지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어떻게 존재로 남을 것인가?”

▣ 기억되지 않는 자

- 역사적·문화적 배경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사 입다는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형제들에게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집에서 내쫓겨 나게 됩니다.(11:2) 길르앗 땅의 추방자, 경계선에 선 자로서 사회적으로 주변화된 비존재의 위치에 있는 인물이지요. “그의 형제들을 피하여 돕 땅에 거주하매 잡류가 그에게로 모여 와서 그와 함께 출입하였더라”(11:3) 재미있는 사실은 ‘돕’은 히브리어 원어로 “좋음의 땅” 또는 “선한 땅(Good Land)”이라는 뜻입니다. 일종의 언어적 역설이지요. 성경에는 이런 역설이 자주 등장합니다. 다윗이 “광야”로 쫓겨났으나,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것처럼, 입다 역시 ‘돕 땅’에서 비존재의 자리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선함’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공동체에서, 사람들에게서, 존재에서 밀려난 자리가 오히려 좋은 땅, 선한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하게 된 “잡류”는 히브리어로 ‘레킴’인데, “비어 있는 자들, 무가치한 자들, 빈손의 사람들”이란 의미입니다. 직역하면 “공허한 자들(emptied ones)” 또는 “텅 빈 사람들”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아무 소유도, 신분도, 권리도 없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사회적 구조에서 배제된 사람들, 즉 존재하지만, 존재로 인정받지 못한 자들이지요. 그들이 모여 ‘비존재의 공동체’를 형성한 것입니다.

 

- 입다의 서원

사사 입다에 관한 해석에 있어, 가장 어려운 점은 그의 서원에 관한 내용입니다. 입다의 서원(11:30–31)은 고대 근동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인신 제사 서원의 잔재를 보여줍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신에게 인간을 바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의 자식을 몰렉에게 주면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레20:2) 성경은 이런 제사를 여러 곳에서 강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암몬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침공합니다. 이스라엘은 과거에 자신들이 버렸던 입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군대의 지휘권, 백성의 지도자가 되는 조건으로 그들의 요청에 응하게 되지요.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11:29) 입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합니다. 그 성령의 바람에 응답하여 숙적 암몬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서원합니다.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11:30) 이는 하나님의 임재와 인간의 불안한 신앙 사이의 긴장을 보여줍니다. 이미 하나님의 영으로 승리를 보장받았음에도, ‘확신’을 얻기 위해 서원이라는 인간적 장치를 덧붙입니다. 믿음의 부족일까요? 아니면 믿음의 과잉일까요? 왜 우리는 그 성령의 바람에 온전히 몸을 맡기지 못하는 걸까요. 여전히 이방 신앙의 방식(자식을 제물로 바치는)으로 하나님을 이해한 것이지요. 신앙의 외형은 있으나, 내용은 왜곡된 상태입니다. 어쩌면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성서에 기반하지 않은 각자 제멋대로의 신앙 말입니다.

 

- 왜곡된 신앙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1:31) 너무나 끔찍한 서원, 끔찍한 신앙의 왜곡입니다. 도저히 신앙의 이름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불행히도 이 서원은 입다가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무남독녀 딸에게 이루어지고 맙니다.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11:39) 너무나 참담한 일이 일어나고 맙니다. 성경은 왜 이런 기록을 남겼을까요. 이삭을 죽이려던 아브라함의 행동을 막았던 하나님이 이곳에서는 침묵합니다.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려라.”(11:34) 여기서 “무남독녀”로 표현된 히브리어 “여히다”는 단순히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라는 숫자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뿐인 존재’, ‘대체 불가능한 생명’, ‘사랑의 대상’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입다의 신앙(?)의 왜곡, 집착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보여주는 것이지요.

아울러 이 단어는 ‘이삭’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성경은 의도적으로 입다의 사건과 이삭의 사건을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이다지도 참담한 사건을 기록했을까요. 이삭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여 끔찍한 불행을 막아주는 해피엔딩도 아닌데, 이 사건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요.

여기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행위의 동기, 출발이 어디에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한 이유는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삿11:31) 입다는 자신의 집착에 있었지요. 아브라함의 사건은 “순종의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입다의 사건은 “왜곡된 신앙이 어디까지 인간을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사기는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라는 말로 끝납니다. 입다의 이야기는 바로 그 종교적 혼돈, 제멋대로 신앙의 표본입니다.

 

- 그녀의 이름은 ‘무남독녀’

입다의 딸은 성경에서 이름이 없습니다. 그저 ‘무남독녀’ ‘내 딸’이라는 표현이 있을 뿐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곧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름이 없다는 것은 기억이 없다는 것이고, 이는 비존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 ‘기억되지 못한 자’의 신학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인 것 같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서원을 따르지만, 하나님은 이 사건에서 침묵하십니다. 이 침묵은 신의 부재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왜곡된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 마지막에 등장하는 놀라운 구절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삿 11:40) 하나님은 개입하여 입다의 딸을 살리지 않았지만, 공동체의 기억을 통해 구원의 통로를 열어줍니다. 이건 단순한 애도가 아니라, ‘여성들의 예전(禮典)’으로서 기억의 회복 행위입니다. 즉,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도 인간 공동체의 기억을 통해 잊힌 생명을 존재로 회복시킵니다. 입다의 딸은 단순히 ‘희생자’가 아니라, 비존재 속에서도 존재의 존엄을 증언한 인물입니다. 그녀의 침묵은 부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침묵하신 그 자리에 머무는 신앙의 초상”입니다.

‘예전(禮典, liturgy)’이라는 단어는 신학·교회사·예배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개념인데, 단순히 “예배 순서”나 “의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존재적이고 공동체적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여성들의 예전으로서의 기억”이라는 표현은, 그저 ‘슬퍼한 사건’이 아니라 공동체가 잊힌 존재를 다시 세우는 신앙 행위라는 뜻입니다. 예전의 어원적 의미는 “삶을 하나님께 봉사로 드리는 행위 전체”를 가리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사용하는 “예배 예전”은 기도, 찬송, 성찬, 설교, 축도 같은 의례적 행위의 구조를 말하지만, 신학적으로는 그보다 훨씬 넓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전은 기억의 행위, 공동체의 행위, 존재를 회복하는 행위입니다.

“애곡하더라”라는 행위는 단순한 슬픔의 표현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원문은 “레나봇”, 즉 “노래하며 되풀이하다”라는 뜻입니다. 이건 일종의 정례화된 추모 의식, 다시 말해 예전(liturgy)으로서의 기억 행위입니다. 그녀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그 죽음을 반복적으로 “기억하고, 불러내고, 노래함으로써” 그녀의 존재가 공동체의 신앙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사건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여성들의 애도는 ‘감정’이 아니라 의례화된 기억, 즉 “비존재를 존재로 회복하는 신앙 행위”라는 말입니다.

 

 

▣ 나가는 말

- 신앙인가? 아집인가?

입다는 하나님께 헌신하려 하지만, 그의 신앙은 오히려 생명을 파괴하는 종교적 폭력이 됩니다. 그의 행위는 ‘하나님을 위한’ 신앙이 하나님을 잃는 신앙이 되어버린 사례입니다. 이것은 “형식적 신앙이 인간의 존엄을 잊을 때” 일어나는 비극입니다. 『Still Life』의 세계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행정적 절차로만 다루며, 그들의 이름과 삶은 형식 속에 지워집니다. 입다의 서원은 이 형식적 신앙의 전형이며, 존 메이의 조용한 행위는 그것에 대한 조용한 저항입니다. 존 메이는 의미가 사라진 세계 속에서도 의미를 만들어내는 인간입니다. 하루하루 죽은 자의 흔적을 정리하며, 아무도 오지 않는 장례에서 조용히 기도합니다. 그의 행위는 아무도 보지 않지만, 바로 그 ‘보이지 않음’이 거룩함이 됩니다. 그에게 윤리란 “타인의 부재에 응답하는 삶”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자를 기억함으로써, 인간은 여전히 존재할 수 있다. 그의 마지막 장면은 그 신학적 함의를 함축합니다. 그가 죽은 후, 그가 장례를 치렀던 이들의 영혼이 그를 맞이하는 장면은 ‘기억의 신학’(Theology of Memory)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기억, 존재, 존엄에 기반한 것인지 깊이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 침묵의 하나님 – 존재의 응답을 기다리시는 분

하나님이 입다의 행위에 개입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으로 그런 모습을 보여준 것은, 인간의 왜곡된 신앙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기억을 통해 회복을 이루십니다.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였더라.”(11:40). 이 구절은 단순한 추모가 아닙니다. ‘기억의 예전’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지워졌지만, 그 기억은 공동체의 의식 속에 살아남습니다. 기억은 비존재를 넘어서는 신학적 행위입니다. 잊힌 자를 기억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을 잇는 일입니다. 왜곡된 집착적 신앙의 악마성을 폭로하면서, 동시에 잊혀진 존재를 되살리는 것입니다. 존재의 가치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기억한다”라는 행위는 단순한 회상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자카르’는 ‘존재를 불러일으키다’ ‘되살리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셨다’라는 말은 그를 단지 떠올렸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생명을 다시 일으켜 세우셨다는 뜻입니다. 기억은 감사의 신학입니다. 폴 틸리히는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감사는 존재가 스스로의 무(無)를 넘어서는 용기다.” 존 메이는 무연고자들의 ‘존재의 무’를 넘어서 그들을 다시 생명의 언어로 불러냈습니다. 그의 기록은 작은 부활의 서사였습니다. 감사는 ‘받은 것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잊힌 존재를 다시 기억하는 창조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심으로 우리가 살아 있듯, 우리가 누군가를 기억할 때 그 사람 또한 우리 안에서 다시 살아납니다. 그것이 신학적 의미에서의 감사입니다.

 

하나님은 딸의 죽음에 침묵하셨으나, 기억의 예전을 통해 비존재를 존재로 불러내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잘못된 인간의 신앙을 지적합니다. 동시에 어둠 속에 있는, 외면당하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비존재의 인간과 삶을 영원히 잊지 않을 노래로, 기억으로, 예전으로 존재하게 합니다. 영화에서 홀로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 그리고 아무도 주목해 주지 않고, 외면하는 일을, 혼자 성실하게 임하는 메이와 그의 삶은 비존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입다의 딸 역시, 비존재의 자리에 선 자입니다. 비존재는 존재의 무가 아니라, 사람과 세상의 관심과 기억에서 멀어지고 외면당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비존재를 존재로 돌리는 일입니다. 쓸모없게 느껴지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 하찮게 보이는 이를 귀히 여기는 것.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사소한 것에 정성을 다하는 것.

입다의 서원은 신앙이 생명을 삼킬 때의 비극, 입다의 딸은 기억되지 않는 존재가 어떻게 신앙의 중심이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그녀를 ‘기억하게 하심’으로 응답하셨습니다. “기억은 구원의 다른 이름이다.” 인간은 잊음으로 비존재로 가지만, 하나님은 기억하심으로 존재를 다시 세우십니다. 『Still Life』의 마지막 장면처럼, 입다의 딸 역시 이스라엘의 노래 속에서 다시 존재하게 됩니다. 그녀의 이름은 없지만, 그녀는 여전히 불리고, 애도 받고, 기억됩니다. 그것이 곧 존재의 부활, 기억의 은혜, 그리고 비존재 속에 계신 하나님의 신학입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존재의 용기(The Courage to Be)』에서 말합니다. “비존재의 위협 속에서도 존재하기로 선택하는 용기, 그것이 곧 신앙이다.”

 

 

 

 

 

“하나님,

우리가 잊혀진 자들을 기억하게 하소서.

이름 없는 이들의 고통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보게 하소서.

의미가 사라진 세계 속에서도, 존재하기를 선택하게 하소서.

당신이 침묵하실 때에도, 여전히 사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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