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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

복과 화 (눅 6:17-26)

복과 화

누가복음 6:17-26, 주현절 후 여섯 번째 주일, 2019217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18.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19.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20.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당신은 지금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은 인류 역사에서 오래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을 겁니다. 다른 사람이나 책에서 그런 질문을 받기도 하지만, 자기 내면에서 그런 질문이 나오기도 합니다. 모두가 행복하게 살고 싶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자기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행복하게 느낀다고 해서 실제로 행복한 것도 아니고, 행복하지 않게 느낀다고 해서 실제로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행복에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똑같은 조건인데도 어떤 사람은 행복으로 느끼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불행으로 느끼기도 합니다. 목사에게는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당신은 목회를 통해서 행복을 경험하십니까?’ 일반 사람들이나 목사나 마찬가지로 행복에 대한 생각이 왜곡될 수 있습니다. 상투적인 행복의 조건에 예속되기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예수님도 소위 행복론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로마 철학자 세네카처럼 인생론을 펼치는 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 유명한 팔복이 그것입니다. 5:1-12절에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삼은 누가복음에는 네 가지 복이 나열되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나오지 않는 네 가지 화도 보충되었습니다. 복과 화가 대칭 형식으로 나옵니다. 복 있는 사람은 다음의 네 종류입니다.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박해받는 자입니다. 거꾸로 화 있는 사람은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 칭찬 받는 자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행복관과 반대됩니다. 이게 실제로 말이 될까요? 아니면 믿음 생활로 인해서 받는 어려움을 잘 견디라는 덕담일까요?

 

1) 가난한 자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20). 거꾸로 부자에게 화가 임하는 이유는 그들이 위로를 이미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24). 현대인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속으로 비웃을지 모릅니다. 화를 받아도 좋으니 부자로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겁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대부분은 가난한 자가 아니라 부자로 살아야 한다는 확신과 욕망에서 나옵니다. 국제관계도 똑같은 원리도 돌아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지금 부자 나라는 모두 화를 당한 겁니다. 교회에서도 역시 부자 교인은 화를 당한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교회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성경의 가르침을 무력화시키는 상황입니다.

가난 자체가 복은 물론 아닙니다. 가난은 일상을 파괴하기에 우리는 가난에 저항해야합니다. 가난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가난은 부를 의지하지 않게 만듭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원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가난하면 더 돈에 매달리게 된다고 말입니다. 그게 자본주의 속성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점에서는 현대사회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가 모두 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가난이 자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 나라에 의존할 수 있게 하기에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겁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이려면 우선 돈이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돈은 좋은 집과 자동차와 자녀 교육과 취미생활 등, 우리의 일상을 총체적으로 지배하긴 합니다. 그러나 윤택하게 사는 것 자체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 건 다 지나가는 겁니다. 여러분이 실감할 수 있도록 목회를 예로 들어야겠습니다. 우리교회는 가난합니다. 교회당도 없고, 빌린 교회당 공간도 넉넉하지 않습니다. 부자 교회에 비해서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행하게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어떤 교회 신자들보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합리화가 아니라 신앙생활에서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아닌가를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배 공간이 절대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진작 교회의 모든 에너지를 예배당 준비에 사용했을 겁니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실제 삶에서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분간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부요한 자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는 말이 정곡을 찌릅니다. 부자는 돈이 주는 위로를 이미 받은 겁니다.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온갖 편의를 맛보았습니다. 그런 위로에 적응이 된 사람은 더 이상 다른 위로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돈이 주는 위로를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적당하게 받고, 죽으면 천국 가는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게 안 됩니다. 이미 돈의 위로에 길들여진 사람은 하나님의 위로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기대하는 것처럼 흉내를 내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기대하지 않습니다. 돈의 위로에 길들여진 개인이나 사회는 불행합니다. 삶의 수단에 불과한 것을 절대화함으로써 삶의 본질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뚫어본 이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자발적 가난을 선택합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은 수도사들입니다. 우리가 수도사들처럼 살 수는 없으나 수도사들의 영성만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행복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억지로 되는 않습니다. 특히 자본이 신처럼 숭배 받는 사회에서는 꿈꾸기도 힘듭니다. 꿈도 꾸지 못하는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는 모두 화를 당한 사람들입니다.

 

2) 주린 자

두 번째 복 있는 사람은 주린 자입니다. 굶주림도 가난하기 때문에 겪게 되는 어려움입니다. 지난 127일 주현절 후 3주의 설교 본문은 눅 4:16-21절이었습니다. 그 본문에는 사 61:1절 이하가 인용되었습니다. 이사야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성령이 자기에게 임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 뒤로 나오는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는 다 가난한 자의 범주에 속합니다. 오늘 본문도 이와 비슷한 구조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임하는 복은 주린 자에게도 임합니다. 그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지금 배부른 사람은 화를 당합니다. 그들이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신학적으로 설명하기 전에 삶의 실제 경험에 근거해서 설명하겠습니다. 밥을 충분히 먹지 못하면 배가 고픕니다. 배고픈 것은 참기 힘듭니다. 역설적으로 배고픈 거를 모르면 배부름도 모릅니다. 밥맛을 절실하게 느끼려면 굶는 게 최선입니다. 요즘 티브이에서 소위 먹방(먹는 방송) 프로그램이 많이 나옵니다. 개인 유튜브 방송만이 아니라 지상파 방송에도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먹고 싶다는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프로그램입니다. 먹는 행위가 일종의 연예 오락으로 떨어지는 현상입니다. 로마 시대 귀족들은 향연을 열고 산해진미를 마음껏 먹었습니다.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지경이 되면 옆방에 가서 먹은 거 다 토해내고 다시 돌아와서 먹었다고 합니다. 모든 귀족들이 그런 방식으로 살지는 않았겠지만 로마 시대가 먹는 욕망을 마음껏 발산하던 시대였다는 것만은 분명해보입니다. 이런 식으로 참된 의미에서 배부름을 얻지는 못합니다. 더 먹어야겠다는 욕망만 자극할 뿐입니다. 그것이 곧 굶주림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회학자들은 이런 먹방 프로그램을 음식 포르노라고 부릅니다.

본문이 말하는 주린 자는 실제로 먹을 것을 먹지 못하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영혼의 만족을 굶주린 사람처럼 갈망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누구나 영혼의 갈증을 느낍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갈증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고, 절실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은 세상살이에서 부지런하게 뭔가를 생산하고 성취하고 재미있는 것을 찾아다닙니다. 일상에 매몰되는 것으로 영혼의 갈증을 외면합니다. 인생이 잘 풀릴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배부르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헛배가 부른 것에 불과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문제를 진지하게 느껴서 근본적인 것을 구하고 찾습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을 찾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기대합니다. 이런 사람은 배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의 영혼이 생명의 영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다른 것을 찾으려고 발버둥을 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린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은 옳습니다.

 

3) 우는 자

세 번째 복 있는 사람은 우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가 웃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웃는 자는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울다가 웃게 된 사람은 복 있는 것이고, 웃다가 울게 된 사람은 화를 당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떨어진 사람을 불행하게 여기고, 웃는 상황에 놓인 사람을 행복하다고 여깁니다. 저도 울면서 살기는 싫습니다. 교우들도 우는 일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불행 자체가 행복일 수 없고, 행복 자체가 불행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울 수밖에 없는 일은 찾아옵니다. 자기가 당하지 않는다고 해도 가족이 당하거나 이웃이 당하면 자신이 당하는 거나 다름이 없습니다. 문제는 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 계속 머물지 않고 벗어나는 순간을 실제로 희망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예를 들면 좋을까요. 가족이 먼저 세상을 뜰 수도 있고, 사업이 망할 수도 있습니다. 실연도 울만한 일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눈물이 납니다. 가장 큰 슬픔은 자식을 잃는 참척입니다. 고통의 나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울다가 지칩니다. 정신이 들면 다시 울게 됩니다. 이런 운명에 떨어진 사람을 향해서 앞으로 웃게 될 터이니 복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런 말을 꺼낼 수 없습니다. 꺼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옆에서 지켜보고 그런 슬픔에 동참할 뿐입니다. 이런 일은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아야겠지만 인생살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절망적이라고 여기겠지만, 그런 이들에게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차원에서 삶의 기쁨을 경험하는 일이 앞으로 일어납니다. 늘 웃는 일만 경험한 사람은 웬만큼 좋은 일에는 웃지도 않겠지만 나락으로 떨어져서 울어본 사람은 아주 작은 것에도 웃을 수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의 고난에 동참한 사람들이기에 지금 살아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웃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4) 박해받는 자

네 번째로 복 있는 사람은 박해받는 자입니다. 네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복입니다. 앞의 세 가지는 간단하게 묘사되었지만 네 번째 복은 길게 설명됩니다. 이것이 앞의 모든 복을 총괄하는 것이라고 봐도 됩니다. 여기에 바로 당시 기독교인의 실존이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22, 23절을 읽겠습니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이 문장도 앞의 문장과 마찬가지로 마카리오이 ...’로 시작됩니다. 마카리오이의 원형인 마카리오스는 영어로 blessed(복 받은)라는 뜻입니다. 그 단어 뒤에 나오는 사람에게 복이 있으라.’는 문장입니다. 복은 구원과 같은 의미입니다. 여기에 당시 기독교인의 모습이 그대로 묘사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미워하고 멀리하고 욕하고 악하다 저주하고 버린다고 했습니다. 일종의 왕따를 당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당한 운명이기도 합니다. 이런 운명에 떨어지면 누구나 절망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유는 이런 운명이 구약 선지자들에게 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26절에는 화가 임하는 경우가 나옵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유대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환호한 이유는 선지자들이 대중들의 귀에 달콤한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다 잘 된다고, 하나님이 축복하신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솔깃한 말을 외친 선지자는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기복주의 신앙을 외치는 교회에 신자들이 몰리는 현상과 비슷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와 반대 입장을 취했던 하나냐 선지자가 대표적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무조건 배척당하는 게 옳다는 뜻은 아닙니다. 배척당하는 이유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세상이 개혁되고 새로워지는 걸 반대하느라 배척당한다면 그건 부끄러운 것입니다. 남북관계를 전향적으로 풀어나가려는 노력을 폄하하고 북한 정권을 무조건 매도하는 기독교인들을 세상이 비난합니다. 이슬람교를 혐오하고 동성애자들을 혐오합니다. 이런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심지어 진화론을 부정하는 기독교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는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정상적으로 바라볼 줄 모른다는 증거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좋은 게 아니라 무식한 것입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입을 다물고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나 하고 있는 게 낫습니다. 이런 일들로 무시당하는 것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의 경우가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받은 박해는 예수님의 십자가 운명과 직결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한 이유는 기존의 종교 절대 권력과 정치 절대 권력에 저항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교는 오래 내려온 율법 전통을 절대화함으로써 인간 삶을 왜곡시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수는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유대교 고위층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주장입니다. 제자들은 로마 황제 숭배를 거부함으로써 로마 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로마 인근의 지하묘지인 카타콤에 숨기도 했습니다.

인자인 예수로 인해서 박해를 받는 이들을 향해서 본문은 기뻐하고 뛰놀라.’고 격려합니다.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에게 해당되는 하늘의 상은 나중에 받는 게 아니라 이미 여기에 은폐의 방식으로 주어졌습니다. 예수의 복음을 위해서 박해를 받는 사람은 이미 여기서 기뻐하고 뛰놀 정도로 큰 상을 받았습니다. 선지자의 영성으로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그 상이 무언지 압니다. 세상의 칭찬은 멀리하고 하나님의 칭찬에 귀를 기울일 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칭찬은 오히려 우리 영혼을 위축시킵니다. 하나님의 칭찬만이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 역시 죽을 몸이지만 부활을 희망하는 사람으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갈 수 있으니, 그것 자체가 이미 큰 상을 받은 거 아니겠습니까.

누가복음 6:17-26
https://youtu.be/fehIi1XBn-0
http://afreecatv.com/nferm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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