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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

복음은 싸움이다!

복음은 싸움이다!

빌립보서 1:21-30, 창조절 셋째 주일, 2011년 9월18일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십시오. 사도 바울을 닮고 싶으신가? 모두 그렇다고 대답하실 겁니다. 아마 그의 신앙과 인격을 염두에 둔 대답이겠지요. 그 다음 질문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살고 싶으신가? 대답이 쉽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들은 바울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존경은 하지만 그의 삶을 따라가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생각은 솔직한 겁니다. 누구나 이 세상을 좀 편하고, 존경받고, 넉넉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그런 생각을 하면 큰일 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해서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특히 경제적인 능력이 신적인 능력으로 받아들여지는 오늘과 같은 세상에서는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그런 관점에서 읽는데 익숙해져버렸습니다. 바울의 명성은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그가 받았던 고통은 모른 척합니다. 바울의 신앙과 삶을 분리하는 겁니다. 그래야만 마음이 편합니다. 고난 받지 않고 믿음생활만 잘 하면 되니까요. 세속의 경제윤리와 똑같이 살면서도 교회만 잘 나가면 아무 걱정이 없으니까요. 그건 착각입니다. 바울의 신앙과 삶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바울의 신앙을 이해하려면 그의 삶을 토대로 해서 봐야 합니다.

     빌립보 공동체에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은 지금 옥에 갇혀 있는 신세입니다. 2천 년 전 당시 로마가 통치하던 시대의 감옥은 성한 사람도 견뎌내기 힘들 정도로 형편이 열악했습니다. 바울은 병약한 사람이었습니다. 평생 지병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가 감옥에서 감당해야 했을 육체적인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하기 힘들었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깊다고 하더라도 이런 상황을 쉽게 극복할 수 없습니다. 바울의 삶을 이해하는데 또 하나 중요한 관점은 당시에 바울은 그리스도교 핵심 세력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은 바울이 베드로에 버금가는 정도로 인정을 받지만 당시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유대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볼 때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세운 공동체에 대표자를 보내서 바울의 잘못을 지적하곤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압력을 견디다 못해 결국 소아시아에서의 선교를 포기하고 그리스 지역으로 선교의 장을 옮겼습니다. 새로운 선교의 장에서 초창기에 세운 교회 중의 하나가 바로 빌립보 교회입니다. 바울은 교회 안팎으로 시달렸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스도는 생명

     그런 탓인지 위 본문에서 바울은 매우 비장한 태도를 보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21절) 또 23절에서는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합니다.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말은 삶과 죽음을 초월한 사람의 입에서나 나올 수 있는 고백입니다. 그 앞 구절에서 이미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가 자기의 생명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더 사는 것과 떠나는 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뜻이니까요. 자칫 바울의 이 말이 허무주의적인 고백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옥살이가 너무 힘드니까,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까, 모든 걸 실패했으니까 삶을 도피하는 방식으로 말하는 게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있습니다. 삶에 대한 무기력증을 피안적인 삶으로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의 삶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치열했고, 열정적이었습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복음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자기를 비판하는 세력과 얼굴을 붉히면서 싸우기도 했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천막 일도 했습니다. 그런 바울이 허무주의에 빠질 까닭이 없습니다.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바울의 이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그리스도는 나의 생명’이라는 그의 말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은 바울의 편지만이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의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요한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요 14:6) 우리가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을 생명이라고 생각하면 바울의 이 말은 언어도단으로 들립니다. 예수를 아무리 잘 믿어도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니까요. 그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곧 늙고 죽습니다. 늙고 죽기 전에도 먹고 마시고 즐기는 삶 자체가 우리에게 참된 만족이 못됩니다. 우리가 설계하고 꿈꾸고 있는 삶의 미래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달성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어떤 사람도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이런 설명이 공자 왈처럼 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대단하게 잘 살지는 못해서 평균 정도는 살아야 하지 않느냐, 크게 부정한 방식이 아니라면 돈을 많이 버는 게 행복한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가난하고 병들고 힘들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포함된 오늘의 시대는 돈과 물질을 하나님처럼 섬긴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돈과 물질을 통해서 얻어 보려고 애를 씁니다.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는 겁니다. 예수님도 사람이 돈과 하나님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사실 사이에서, 즉 돈이 필요한 세상살이를 떠날 수 없다는 사실과 돈이 참된 생명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 사이에서 고민합니다. 개인에 따라서 이런 고민이 깊은 사람도 있고, 좀 덜 깊은 사람도 있습니다. 아주 심한 경우에는 아예 고민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민을 일단 깊이 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 나가서는 그 고민이 신앙적으로 극복되어야 합니다. 그게 억지로 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실질적으로 깨우쳐야만 그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나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는 나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깊이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그것과 일치해가는 과정입니다. 이건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말로는 할 수 있지만 실제로 알고 삶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 두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입니다. 각각의 단어에는 깊고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먼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스도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구원자를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이 구원받아야 할 처지에 빠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연봉이 많다는 사실로 위로를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연봉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성서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만이 그리스도라고 믿습니다. 그에게서 구원이 온다는 뜻입니다. 그 구원은 곧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그가 곧 생명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생각해보십시오. 너무 당연한 질문인가요? 아니면 너무 복잡한 질문인가요?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하고 있을까요? 이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이 구원이며,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에 주목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 사건이 자기 삶의 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바로 그것을 정확하게 경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었다고, 종말에 그 생명이 완성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동안 자기가 운명을 걸면서 의를 이뤄보려고 노력했던 율법의 길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길을 통해서 생명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죽는 것까지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과 고난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당장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혼자 사막에 나가거나 동굴에 들어가서 산다면 모르지만 구체적으로 세상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교우들과 함께 산다면 수많은 문제들이 생깁니다. 그리스도가 생명이라는 사실을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이들과의 싸움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그런 이들을 가리켜 ‘대적하는 자들’(안티케이메노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 이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28절) 이 말은 거꾸로 그들은 두려워할만한 대상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누군지는 본문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로마 정권이나 지역 토호세력이었을지도, 또는 교회 내부의 반대파였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빌립보 교회 공동체를 흔들던 특정 세력이었을지 모릅니다. 이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앞에는 반드시 그런 대적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마렵니다. 예수님이 그런 대적하는 자들의 손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은 사랑을 선포했기에 대적하는 자들이 나올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는 늘 진리 아닌 쪽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어떤 세력에게 불편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가능하면 그런 충돌을 피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피하려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지 말고,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대처해야만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어떤 이들은 서로 다투지 말고 좀 평화롭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믿음 생활을 잘 하면 충분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입니다. 일리 있는 생각입니다. 평화, 관용, 인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아주 소중한 삶의 자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주장에 완전히 빠져서 남을 억압하려고만 한다면 신앙적으로도 그렇고 보기에도 좋지 않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교회 안에서의 싸움이 많은 시절에는 좀 싸우지 말고 살아보자는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복음적인 삶은 ‘대적하는 자들’까지 피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을 적대하는 자들, 하나님 나라를 파괴하는 세력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회퍼는 <순종과 항거>(Ergebung und Widerstand)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제자라고 한다면 이 세상의 악에 항거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 ‘대적하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제가 어느 특정 집단을 거론할 수는 없고, 방향만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만드는 신자유주의, 공동체를 근본에서 허무는 경쟁 만능주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인간 편의주의, 교회의 단일성을 부정하는 개교회주의, 군사력을 통해서 세계를 지배하려는 군사 모험주의는 분명히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그리스도인은 악한 세력과 부단히 투쟁해야 합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으로 고백하는 바울의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그 문제를 29절에서 신학적으로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런 삶을 가리켜 바울은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싸움은 지금 옥에 갇혀 있는 바울만이 아니라 빌립보 공동체에 속한 모든 이들에게 해당된다고 했습니다.(30절) 믿음과 고난이 여기서 한 묶음으로 제시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믿음과 고난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걸 그리스도교적인 영성으로 살아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합니다.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는 책에서 불의에 분노하라고 외쳤습니다. 분노는 옳은 것과 잘못된 것을 구분할 줄 안다는 증거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이라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생명을 대적하는 세력을 두려워하지 말고 싸우십시오. 그 과정에서 오는 고난은 바로 우리의 믿음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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