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위한 진리 싸움
갈 1:1-10, 성령강림후 제2주, 6월2일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예수님의 제자는 열두 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시몬 베드로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으로 가룟 유다에 이릅니다. 사도행전 기자는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를 명단에서 빼고 맛디아를 충원했습니다. 사도들을 말할 때 논란이 되는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 생전에 한 번도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제자로 부름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맛디아는 그런대로 초기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람이지만 바울은 그렇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자칭 사도였습니다. 신약성서에 들어온 그의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사도성을 일관되게 강조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을 주장할 수 있었던 근거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나도 사도다.’ 하는 바울의 태도가 못마땅했을 겁니다. 바울도 주변의 그런 시선을 의식했습니다. 그게 일종의 자격지심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편지를 쓸 때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사도직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또 자기의 사도직이 사람의 권위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주장했다는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그런 상황이 좀 이상해 보입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사람들인데, 왜 사도직 문제로 갈등을 보이느냐 하는 겁니다. 사실은 사도직은 부차적인 겁니다. 더 본질적인 차이는 복음의 정체성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 타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리 논쟁이었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그런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유대 기독교와 이방 기독교로 분리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 기독교는 역사에서 사라졌고, 이방 기독교만 살아남았습니다.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 신학적 갈등의 단초가 갈라디아서에 소상하게 나옵니다.
다른 복음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의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우선 간단하게 인사를 한 다음에 다짜고짜로 이렇게 질책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갈 1:6). 표현이 거칩니다. 상황이 상당히 다급해 보입니다. 바울이 정신적으로 좀 과민했는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갈라디아 신자들의 신앙이 크게 흔들린 건 분명합니다. 바울은 이어서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더 나가서 바울은 8,9절에서는 그들에게 저주가 임하기를 바란다고 외칩니다. 그가 말하는 다른 복음이 뭐기에 위대한 신학자이고, 영성가이며, 선교사이자 목회자인 바울이 체면 불구하고 저주를 입에 담는다는 건지요. 여기에는 뭔가 그럴만한 사연이 숨어 있는 게 분명합니다.
바울은 갈 1:11절 이후부터 그 사연을 상세하게 언급합니다. 그는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3년 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베드로를 만났고, 또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도들이나 지도자들은 만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그를 별로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다는 의미입니다. 14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에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의 신학도 더 깊어졌습니다. 복음 사역의 성과도 나타났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일단의 사람들이 바울의 선교사역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개척한 교회에 가서 바울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한 겁니다. 바울은 갈 2:4절에서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이 거짓 형제의 목소리가 바로 다른 복음입니다.
이 상황을 여러분은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지금 바울과 대립하고 있는 이들은 사이비 이단이 아니라 정통 기독교에 속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핵심 구성원들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사도들과 함께 교회를 꾸려가던 사람들로서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처음 모임을 시작한 120 여명에 속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 중의 일부는 사도들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서 소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교회를 관리했습니다. 이들의 수고로 초창기 기독교가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그들은 모두 기독교의 초석을 세운 이들로서 존경을 받아야 할 분들입니다. 바울이 그들을 거짓 형제라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누워서 침 뱉기입니다.
바울이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그들과 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이방 기독교인들의 신앙적인 자유를 침해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화를 낼만 합니다. 미국의 노예 해방을 돌아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흑인들을 향해서 다시 노예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합시다. 노예 해방을 위해서 투쟁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런 이들의 말은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바울의 입장이 바로 그와 같은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마틴 루터가 출교를 각오하고 당시의 로마가톨릭 교황주의에 저항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바울과 대립하고 있던 이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복음에만 머무르지 말고 토라와 할례도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통칭 그것을 율법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주장을 한 마디로 거절합니다. 갈 2: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바울의 이런 신학적인 진술이 단순히 교리논쟁이 아닙니다. 그는 율법이 복음을, 그리고 교회의 공동체성을 어떻게 훼손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갈 2:11절 이하에서 안디옥에서 벌어졌던 하나의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게바(베드로)는 안디옥에 들려 이방인과 함께 밥을 먹다가 예루살렘의 야고보가 파송한 사람들이 그 자리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리를 피했습니다. 바나바를 비롯한 다른 유대인들도 베드로를 따라서 자리를 피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유대인이 이방인과 밥을 같이 먹으면 안 됩니다. 트집잡힐까 염려해서 아예 빌미를 주기 않으려고 베드로 일행은 자리를 피한 겁니다. 당시 그 자리에 함께 밥을 먹던 이방인들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배신감을 느꼈을 겁니다. 베드로 일행이 평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라고 말하던 것과 전혀 다른 행동을 보였으니까요. 노예 해방을 외치던 사람이 노예였던 이들과 함께 어울려서 밥을 먹다가 노예 제도가 여전히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온다는 말을 듣고 자리를 피한 것과 비슷합니다. 바울은 그걸 외식이라고 규정하면서, 베드로 일행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않았다고(갈 2:14) 비판했습니다.
복음의 자유
바울이 신앙의 동지로 여기던 베드로나 바나바를 비판하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복음의 진리는 무엇일까요? 아미 앞에서 언급한 겁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입니다(갈 2:4).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율법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자유를 포기하게 하거나 상대화하는 세력과는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폐기처분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갈 2:21절에서 이렇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우리가 오늘 바울의 말을 빌려 ‘복음의 자유’라고 멋지게 말은 할 수 있지만 그런 세계에 들어가는 게 쉽지 않습니다. 갈라디아 신자들이 흔들린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자유는 사실 위태롭습니다. 그게 방종으로 떨어질 위험성도 큽니다. 앞에서 예로 든 노예 해방 사건을 다시 돌아보십시오. 여기 평생 노예로 살던 사람이 이제 자유인의 법적 지위를 얻었다고 합시다. 그 뒤로 그에게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이전보다 더 혼란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일단 본인 스스로 자유가 두렵습니다. 주인의 눈치를 보던 습관도 하루아침에 바꿀 수가 없습니다. 독립된 개체로서 당당하게 행동하지도 못합니다. 거친 행동도 나옵니다. 이 사람은 다시 노예로 돌아가는 게 편하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노예해방을 주장하던 사람들도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노예제도가 오히려 나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로운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복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예루살렘에서 파송받은 할례파들이 율법을 다시 강조했습니다. 아무리 예수를 믿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율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지역 신자들이 크게 흔들린 겁니다. 예수도 믿고 율법도 지키는 게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전반적으로 볼 때 믿음과 율법을 병행하는 유대 기독교와 그 성격이 비슷합니다. 그 내용을 제가 여기서 일일이 지적하지 않겠습니다. 복음의 자유보다도 교회법과 교회 체제가 신자들의 마음을 더 강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율법적으로 믿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 자체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고 그걸 핑계로 교회 생활에만 열광적으로 매달립니다.
신자들이 이렇게 복음과 율법의 문제에서 혼란을 겪는 이유는 복음과 율법 사이의 경계가 또렷하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복음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고, 율법은 형식입니다. 그 둘을 완전히 나눌 수는 없습니다. 율법은 사람으로 치자면 옷과 같습니다. 옷을 벗고 살아도 되겠지만, 문명사회에서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 자체입니다. 옷을 위해서 사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옷이 존재합니다. 요즘은 간혹 옷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분들도 계시긴 합니다. 지금도 교회에 여러 제도가 있습니다. 목사, 전도사, 예배, 운영위원회, 교인총회 등은 다 율법적인 요소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몽땅 빼버리면 교회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고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게 불가능한 거는 아니지만 바람직한 건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신앙형식에 노예처럼 묶이는 데에 있습니다. 마치 옷을 위해서 사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복음과 율법 사이의 경계가 또렷하지 않은 이 현실 교회에서 최선의 길은 끊임없이 교회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질문하고 토론하고 합의를 통해서 과감하게 개혁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를 가리켜 이렇게 정의를 내렸습니다. ‘에클레시아 샘퍼 레포만다 에스트’(끊임없이 개혁되는 에클레시아). 이렇게 구도정진의 태도로 간다고 해도 교회는 본질을 놓치기가 쉽습니다. 교회는 현실안주의 경향이 크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대구샘터교회는 시작된 지 10년이 되었습니다. 2003년 6월1일 주일에 하양에 있는 천호아파트 206호에서 저희 부부와 큰딸, 그리고 권현주 선생, 이렇게 네 명이 첫 예배를 드린 게 그 출발입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교회 개척은 아니었습니다. 10년 후에 지금과 같은 교회의 모습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생각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고 싶다는 겁니다. 이런 전통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본질은 바로 예배에 오로지 담겨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대구샘터교회는 여전히 여러 가지 점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미숙한 부분도 많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대부분의 교우들은 영적으로 건강하고 풍성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본질을, 즉 복음이 주는 해방과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이런 복음의 역동성이 앞으로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요? 그게 10주년을 맞는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바울답지 않게 할례파들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저주를 입에 담기까지 했습니다. 갈라디아 신자들을 향한 안타까움이 절절이 묻어납니다. 바울은 복음의 훼손을, 그 변질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복음의 진리에 대한 열정이 그의 영혼을 사로잡은 겁니다. 그의 진리 싸움이 있었기에 오늘의 기독교가 가능했습니다. 그게 없었다면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의 아류로 전락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의 자유를 포기하지 맙시다. 그 중심으로 깊이 들어갑시다. 그리고 우리를 다시 종으로 삼으려는 목소리와 싸웁시다. 대구샘터교회는 이런 복음의 진리 싸움에 참여하기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성령께 미래를 맡기고, 우리 모두 신앙적으로 연대하여 거룩한 싸움의 길을 함께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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