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는 말
- 경외심
아인슈타인은 신의 이름을 ‘경외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과학자이며 동시에 영적인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천체의 진화와 빛, 시간, 중력처럼 보이지 않는 실제들을 연구하면서 점점 ‘영적인 경외심’을 감지하게 됩니다. 그는 말년에 들어서 신비로운 우주 저편에 존재할 것 같은 ‘마음’에 대한 묵상에 전념합니다. 그는 경외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은 신비입니다. 아름다움은 모든 진정한 예술과 과학의 힘입니다.” “이러한 감정을 모르는 사람, 더 이상 궁금해할 수 없거나 황홀경에 빠질 수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침투 불가능한 것들이 실제로 존재합니다. 이것들은 우리의 무뎌진 감지 능력으로는 그것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만을 이해하는 숭고한 지혜와 가장 빛나는 아름다움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알고 느끼는 것이 진정한 종교성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저는 진정한 종교인들 축에 속합니다.”(필립 프랭크, 『아인슈타인 : 그의 삶과 시대』)
20세기 최고의 천재 과학자, 신이나 신비… 와는 가장 거리가 멀 것 같은 사람의 고백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지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 ‘그 무엇’ ‘그 어떤 것’ 혹은 ‘마음’이 있는데, 그것을 감지하는 것은 바로 황홀경, 아름다움, 경외심이라는 것이지요.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것은 감탄, 놀라움, 감격, 경외심이 아닐까요? 우리가 세계에 대해, 사람에 대해, 삶에 대해 가장 적확한 응답이 바로 이런 감정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 응답의 노래
- 감성 = 인간의 본질
시편 1 편은 전체 시편(150편)의 ‘서두의 글’ 즉 여는 글입니다. 즉 시편 전체를 조망해볼 수 있는 내용과 방향을 담고 있는 것이지요. 시편 1편을 잘 이해한다면, 시편 전체의 윤곽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 성서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동양 사상의 가장 중심이 되어온 사서삼경에도 시경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의 본래적 특성 가운데 하나가 감성인 것 같습니다. 현대 과학의 시대에 자칫 감성의 중요성이 평가절하 될 수 있지만, 감성을 뺀 혹은 상실한 인간을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요.
성경역시 시편이라고 하는 방대한 분량의 인간의 감성적 내용을 성경에 담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뜻이 있을 것입니다. 희. 노. 애. 락. 인간의 모든 감성을 담고 있는 시편은 인간 삶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의 삶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삶은 온갖 감성들로 가득합니다. 그 속에서 인간은 신과 함께 노래하며 춤추고 울고 웃으며 살아온 것이지요. 예술보다 더 인간의 진정한 삶의 모습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도구가 있을까요.
- 태초에 길이 있다!
시편 1편은 “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길을 찾고 있다면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서는 두 가지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의인의 길’과 ‘죄인의 길’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바로 이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 있을 뿐입니다. 너무나 다양한 삶의 양태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의 삶은 두 가지의 길이 있을 뿐입니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말입니다.
- 복 있는 사람
‘복 있는 사람은’ 여기서 사용된 언어는 ‘아쉬레’입니다. 이는 ‘너는 복 있는 사람이다!’ ‘축하합니다.’ ‘얼마나 기쁘십니까?’ ‘참 행복이 있도다!’ 라는 의미인데, 주로, ① 번영을 누리거나 자식을 많이 둔 사람에게, ②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물질 축복을 향유할 때, ③ 물질이나 자식의 소유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법도 안에서 올바로 처신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의 산상수훈(마5:3-11)에서 이 단어를 8번이나 사용하셨지요. “심령이 가난 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아쉬레)”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 그런데, 오늘 시편 1편에서는 복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가까이 함이 곧 복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묵상한다.’는 말은 그저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과 율법을 생각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유대인들에게 묵상한다는 것은 낮은 어조로 율법을 소리 내서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의 독특한 독서법입니다. ‘율법을 묵상한다는 것은 묵상하는 사람의 온 존재 속에 율법이 침투해 들어가도록 그 율법 속에 깊이 잠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묵상한 내용이 제2의 천성이 되어 버린다.’(윌리엄 버클레이, 『주는 나의 목자』) 성경의 말씀을 계속에서 입으로 웅얼거림으로써 그저 암기하는 정도가 아니라, 온몸에, 존재 속에 율법에 배어들도록, 물 들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히 읽거나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이것은 의미를 밝혀내는 지적인 과정이라기보다는, 다시 소리 내어 읽으면서 말씀을 듣고 또 들어 그 소리들이 근육과 뼈 속 깊은 곳까지 파고 들게 하는 생리적인 과정인 것입니다. 한 번 시도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특히 시편은 묵상하기에 좋은 성경입니다. (잠시 눈을 감고… 정말 좋지요?^^)
-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율법’이라는 표현에서 율법은 토라라고 하는데, ‘토라’라는 말은 창을 던져 과녁을 맞히는 경우처럼 무언가를 던진다는 뜻의 ‘야라’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이를테면, 과녁을 꿰뚫는다는 단어가 바로 ‘토라’인 것이지요.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은 겨냥된, 의도적인, 개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애초부터 인간을 향해서 오시는 말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겨냥해서 던져진 의도와 목적을 가진 정교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말씀이 우리에게 닿을 때, 놀라운 효력과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향해 날아와 우리에게 명중합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우리의 심장에 꽂힐 때, 놀라움과 기쁨, 두려움과 경외심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편은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묵상하는 이, 말씀이 곧 자신의 살과 뼈가 되게 한 이들이, 그러한 놀라운 감격과 감정을 표현한 것, 예배를 올려 드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시냇가의 심은 나무
그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이들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은 삶이 되리라 약속하고 있습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에서 시냇가라는 표현은 바벨론의 관개 수로를 말합니다. 가뭄이 들면 말라버릴 수 있는 시냇가가 아니라, 물을 대기 위해 계획적으로 파놓은 물줄기를 말합니다. 사시사철 절대로 마르지 않는 끊이지 않는 물이 가득한 바벨론의 수로를 보며 그들은 얼마나 놀랍고 신기해했을까요.
아울러 ‘심은 나무’는 야생나무가 아닙니다. 옮겨 심은 정원수를 말합니다. 아무렇게나 자라나는 나무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마르지 않는 수로 옆에 심겨진 나무이지요. 시냇물이 마르지 않는 한 언제나 푸르고 아름다운 모습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살과 피가 된 이의 삶은, 삶의 매순간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어떠한 순간에도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부요해도 가난해도 영광중에도 고통 중에도 그는 여전히 아름다움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 여호와께서 알고 계신다.
그러한 삶을 성경은 “의인들의 길”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길이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율법과 함께 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말씀합니다. 대체 우리가 무엇이라고, 우리를 알고 계신다는 말인지요. 온 우주의 창조자께서 우리를 아고 계신다고, 우리를 향해 미소 짓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아픔과 눈물과 한숨과 크고 작은 나의 모든 삶의 순간들을 세상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분께서 내 길을 알고 인정해 주십니다.
-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그러나 악인의 길은 ‘바람의 나는 겨와 같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겨는 공허하고, 무가치하고, 그리고 쓸데없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그저 한순간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 같은 것입니다. 오래가지 못하고 불안정합니다. 악인은 겨와 같이 파괴될 운명을 갖고 있습니다.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마25:12, 눅13:25,27) 말씀처럼 그는 영원히 잊히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의 삶은 무의미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오히려 잊고 싶은, 어떤 선한 영향력도 갖지 못하는 존재로 먼지와 같이 사라질 것입니다.
▣ 나가는 말
-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
시편에 수록될 글들을 모아 기도책(시편)으로 만들던 당시,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기에 있었습니다. 바벨론의 무자비한 태양 아래 있는 피난민들은 자신들이 기도하기에는 최악의 조건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화려하던 솔로몬의 성전은 저 먼 예루살렘 땅에 폐허가 된 채로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기도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시137:4)
우리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곳, 혹은 있기 원하는 곳에 있게 될 때까지 기도하는 것을 미룹니다. 우리는 물리적 심리적 환경이나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방해하도록 내버려둡니다. 지금은 기도하고 예배하고 말씀을 생각할 때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절망의 한 가운데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된 복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순간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졌던 화려한 궁전도, 솔로몬의 성전도, 나라도, 소위 그들이 복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을 잃고 나서 그들은 진정한 복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어느 날 저녁이었다. 죽도록 피곤한 몸으로 막사 바닥에 앉아 수프 그릇을 들고 있는 우리에게 동료 한 사람이 달려왔다. 그러더니 점호장으로 가서 해가 지는 멋진 풍경을 보라는 것이었다. 밖에 나가서 우리는 서쪽에 빛나고 있는, 짙은 청색에서 핏빛으로 끊임없이 색과 모양이 변하는 구름으로 살아 숨 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진흙 바닥에 패인 웅덩이에 비친 하늘의 빛나는 풍경이 잿빛으로 지어진 우리의 초라한 임시 막사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감동으로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빅터 플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플랭클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경험한 내용입니다. 매일매일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있는 사람들. 극심한 굶주림과 폭력과 학대에 시달리는 사람들. 뼈밖에 남지 않은 앙상한 몸으로 끔찍한 추위와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이 해가 지는 저녁노을을 보며 감탄합니다. “세상이 이리도 아름답다니!”
이리도 아름다운 세상에서, 이리도 찬란한 생명을 가진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걸까요? 우리의 기도, 우리의 노래는 처절한 삶의 자리에서 비로소 빛을 발하지 않을까요. 모든 이방인들과 바벨론 사람들이 그들을 향해 저주받은 자라고 비난하는 그 자리에서 그들은 여호와를 향해 노래합니다. 삶은 아름답다고, 삶은 가치 있고 의미가 있다고 말입니다.
시편 1편은 편안한 방안에서 드리던 찬양이 아닙니다. 그것은 서러움과 눈물과 한숨과 절망의 언덕에서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절규와도 같은 기도였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찬양은 바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의 땀 냄새에서, 우리의 눈물에서, 우리의 한숨에서도 나와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기도이며, 찬양이며, 예배일 것입니다. 그런 예배하는 삶, 찬양하며, 노래하는 삶이되시길 축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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